전남 곡성 -1
추억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골짝나라
- 강과 계곡이 그리운 계절, 호남땅 곡성(谷城)으로 간다. 호남의 으뜸 강물인 섬진강이 흐르고, 깨끗한 보성강이 젖줄을 이루고 있는 곡성은 ‘골짝나라’다. 백제시대엔 욕내군(欲乃郡), 혹은 욕천군(浴川郡)으로 불렸는데, 이는 골짜기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빌려 표현한 것이다. 지금의 한자도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곡성은 호남정맥에서 뻗어나온 ‘통명지맥’이 부려놓은 골짜기에 소박하게 자리 잡은 심심산골이다.
하지만 이런 자연 조건 때문에 곡성은 발전이 늦다는 전남에서도 제일 낙후된 지역으로 손꼽혀왔다. 나라에서 세운 광역개발권역 어디에도 들지 못했다. 그래서 곡성 주민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긴 순창처럼 고추장을 자랑할 수 있나, 남원처럼 광한루와 춘향이를 내세울 수 있나, 구례처럼 지리산 화엄사가 있나, 화순처럼 고인돌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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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진강에서 유일하게 남은 호곡나루 줄배. 안타깝게도 이번에 들렀을 때는 뱃줄이 끊어져 있었다.
- 돌이켜보면 이런 박탈감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 같다. 곡성은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고을이란 색깔이 강했다. 전라선 열차를 타고 가며 스치는 차창 밖 섬진강 풍경을 감상하면 끝이었다. 간혹 광주 등 인근 대도시 사람들이 태안사나 도림사 같은 데를 알음알음 찾아들긴 했어도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기엔 힘이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곡성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보물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섬진강과 보성강의 깨끗한 자연이 최고의 자산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전라선 폐선 구간의 활용, 효의 상징인 심청전 근원설화 발굴 등은 곡성을 짧은 시간에 전국적인 명소 반열에 올려놓았다. 21세기 욕구에 어울리는 자연·문화·놀이의 삼박자가 딱 맞게 떨어진 것이다.
곡성 여행의 동선은 읍내에서 섬진강 따라가다 압록에서 보성강을 거슬러 오르는 것을 큰 줄기로 삼으면 된다. 곡성의 때깔을 찾으려면 읍내의 곡성장(3·8일장)을 빼놓을 수 없다. 옛날 시골의 5일장은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도 전하며 농사 정보도 교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통수단이 발달한 요즘엔 이런 5일장은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해 가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곡성 5일장은 아직 예전의 장점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옛날 시골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에 속한다. 주민들의 여유로운 발걸음과 구수한 남도 사투리엔 정겨움이 듬뿍듬뿍 묻어난다. 수십 년 전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순댓국집에서 배를 채우거나 막걸리 한 사발 들고 장터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튀밥 튀기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대장간도 들러 어릴 적 추억에 젖어들기도 하며. 운이 좋다면 이따금 “깽매, 깽매” 흥겨운 꽹과리 소리 울리는 호남좌도 농악도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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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곡성을 전국적인 관광지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섬진강 기차마을 상품. / 2 곡성읍의 전라 좌도 농악. 각종 전국 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다. / 3곡성장터에서 만난 대장간. 곡성읍내에선 매월 3, 8일자로 끝나는 날에 5일장이 선다.
- 곡성장 구경을 했다면 곡성의 진산인 동악산(動樂山·735m)을 만나야 한다. 원효가 도림사를 창건할 때 하늘에서 울리는 풍악에 산이 춤을 췄다고 하여 동악산이라 했다던가. 읍내 어디서나 도드라진 동악산이 바라뵈고, 곡성팔경에 동악조일(動樂朝日)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동악산이 돋보이는 까닭은 다름 아닌 계곡 덕분이다.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동악산의 여러 계곡 중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도림사 계곡의 풍치가 으뜸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계곡 안엔 도림사란 절집이 들어앉아 있다. 절집의 운치야 전쟁 때마다 상처를 많이 입었어도 그런대로 봐줄 정도지만, 너른 반석 깔린 계곡의 풍치는 근동에선 둘째라면 서운할 정도다. 곡성 주민들은 ‘수석의 경치는 삼남에서 으뜸’이라고 자랑한다. 이는 좀 과장이 섞인 표현이긴 하지만, 계곡에 어리는 기상만큼은 충분히 삼남의 으뜸이 되고도 남을 자격이 있다.
도림사 계곡을 다르게는 청류동(淸流洞)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도 구곡(九曲)이 있다. 청류동이란 연유와 구곡의 풀이는 여러 자료 중에서 박혜범 선생이 도림사 계곡에서 시작된 개혁사상과 항일독립운동의 비사에 대해 쓴 책 ‘도채위경’(박이정, 2007년)에 충실하게 실려 있다.
청류동은 글자대로 풀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만, 원래 청류(淸流)는 청렴과 선비들을 상징한다. 이 도림사 계곡을 청류동이라 한 연유를, 저자는 조선 말기 어지러운 국내외 상황에서 점차 수렁으로 빠져드는 조선을 구하려 했던 위정척사론자들의 개혁사상을 상징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계곡에 구곡의 이름을 붙인 분은 조병순(曺秉順·1876-1921)이다. 일곡은 쇄연문, 이곡은 무태동천, 삼곡은 대천벽, 사곡은 단심대, 오곡은 요요대, 육곡은 대은병, 칠곡은 모원대, 팔곡은 해동무이, 구곡은 소도원이다. 여느 명소의 구곡이 대부분 음풍농월하면서 경치를 읊은 것이라면, 여기의 구곡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우국지사들의 피눈물 나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중 사곡 단심대(丹心臺)는 나라와 고종황제를 향한 우국지사들의 굳은 결의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흔적이고, 팔곡 해동무이(海東武夷)엔 힘을 길러 바다 건너 오랑캐를 무찌르고 자주 독립을 이루려는 염원이 묻어있다.
지금도 단심대 너럭바위엔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의 단심가(丹心歌)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뇌하는 우국지사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단심대엔 100여 년 전 우국지사들이 나라 바로 세우기 위해 뜻을 모을 때 곁에서 내려다보던 늙은 소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소나무는 20여 년 전 겨울 폭설에 가지가 부러져 죽었고, 2007년 옛 소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소나무를 구해 심어놓았는데, 이름은 ‘단심송’이다. 참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 우국지사의 마음이 서린 이 단심송이 잘 뿌리내리길 진심으로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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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성 동악산 품에 안겨있는 도림사. 도선국사가 중창할 때 도인들이 숲같이 모여들어 절 이름을 도림사라 했다고 한다.
- 조선 말기에 위정척사운동의 발원지이자 항일독립운동의 호남 내 최대 거점이었던 도림사 계곡. 그러고 보니 철마다 행락객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 저 널따란 반석 위를 흐르는 청류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걸었던 우국지사들의 피눈물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이 계곡의 풍치를 즐기면서 편안히 하루를 쉴 수 있는 까닭은 모두 그분들이 목숨 바친 충절 덕분이 아니겠는가. 경관에 눈이 즐겁고, 사연에 가슴 아린 청류동 계곡이다.
도림사 계곡의 청류는 흘러 흘러 섬진강으로 몸을 섞는다. 이젠 섬진강을 둘러볼 차례. 섬진강은 이름이 여럿이다. 곡성 주민들은 예전엔 섬진강을 순자강(瞬子江)이라 불렀다. ‘순자(瞬子)’란 명칭은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 나온다. ‘섬진강은 근원이 진안의 중대(中臺) 마이산에서 나와서 합하여 임실의 오원천(烏原川)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운암(雲巖) 가단(可端)을 지나서 태인의 운주산(雲住山) 물과 합하여 순창(淳昌)의 적성진(赤城津)이 되는데, 이것을 화연(花淵)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또 저탄(猪灘)이 되고, 또 동쪽으로 흘러서 남원(南原)의 연탄(淵灘)이 되며, 또 순자진(瞬子津)이 된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엔 순자진이란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곡성 북쪽의 옥과(玉果) 근처에 이르러 방제천(方悌川)이라는 이름이 비로소 보일 뿐이다.
옛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섬진강을 즐기는 방법은 여럿이다. 하나는 제일 쉬우면서도 싱거운 드라이브, 둘은 추억의 기차 여행, 셋은 두 바퀴로 즐기는 자전거 하이킹, 넷은 천천히 걷는 일이다. 이 네 가지를 모두 해봐야 섬진강을 제대로 구경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곡성 읍내를 지나면서 섬진강변을 향해 달리다보면 ‘섬진강 기차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눈길을 붙든다. 곡성군이 섬진강변을 지나는 전라선 폐선구간 17.9km를 활용해 관광자원화한 섬진강 기차마을은 곡성의 최고 효자상품이다.
1999년 전라선 일부 구간이 폐선되자 곡성군은 철도청으로부터 이를 사들여 관광객을 태울 증기기관차와 전시용 증기기관차, 기차카페 2량, 철로자전거를 갖추는 등 6년간의 철저한 준비작업 끝에 섬진강 기차마을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시험 운행을 거쳐 본격 운영한 지 3년만에 곡성은 ‘추억 속의 친자연 관광지’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곡성의 명물로 떠오른 섬진강 기차는 옛 곡성역 자리인 기차마을에서 고달면 가정마을 간이역까지 약 9km 구간을 왕복 운행한다.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구간을 시속 30km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감상하는 맛은 색다르다. 섬진강 맑은 물과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차창으로 달려드는 강바람은 도시에서 묻혀온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준다. 아마 곡성 읍내서 만난 외지 차량 중 열에 여덟아홉은 섬진강 기차를 타려는 손님이라고 봐도 그다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줄배도 섬진강을 돋보이게 하는 여러 콘텐츠 중 하나다. 예전엔 섬진강에 줄배가 많았다. 화개장터, 운천나루, 염창나루, 금천나루, 한동나루, 섬진나루…. 곡성에도 동산나루, 무너미나루, 호곡나루, 두계나루, 가정나루…. 나루터마다 줄배가 있었다. 하지만 다리가 하나둘 놓이면서 줄배는 점차 추억으로 사라져갔다.
고달면의 호곡나루는 주민들이 실제 사용하는 줄배로는 섬진강 전 구간에서 유일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화개장터에도 줄배가 있었으나 그 아래로 남도대교가 생기면서 이젠 추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호곡나루 줄배에 큰 기대를 하고 찾았으나 안타깝게도 큰물 때문인지 줄이 끊어진 채였다.
배는 깊은 강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배를 이용하지 않고 산길을 돌아가려면 보통 반나절은 더 걸린다. 더 오랜 옛날엔 줄배가 아니라 노를 젓는 나룻배였다고 한다. 그래서 배가 강 건너에 있으면 행인은 “배 대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면 강 건너의 뱃사공이 소리를 듣고 나와 행인을 건네준다. 하지만 사공이 늘 붙어있어야 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바로 줄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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