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의 노을
지중해의 가이사리아에 있는 유적 중 로마 수로의 일부분
분주하게 보냈던 일정의 마지막 순례지는 지중해의 가이사리아였다.
어느새 태양이 내일을 기약하는 모습을 띠었다.
우리는 버스의 속력을 천천히 하면서 이곳을 순례하기로 했으나
석양에 아름답게 물든 지중해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근접해 보이는 야외극장과 원형 경기장은 겉모양만 보았고
조금더 지나서 로마 수로가 보이는 해변에서 잠시 내렸다.
우리는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면서 지중해 해변을 신발을 벗은 채 거닐면서
우리의 보호자이신 성바오로 사도의 체취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곳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로마선교를 위해 출발한 곳이기에
바오로 사도의 사도적 열정을 살아가는
우리 바오로딸들에게는 더없이 감회가 깊은 곳이다.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되어 총독부로 압송되기 전
거의 2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아그리빠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부활한 예수님을 증거했다.(사도 26장)
또한 이방인 고르넬리오가 베드로 사도에게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닮은꼴(?)
기원전 1세기경 헤로대왕이 지금의 델아비브 북쪽으로 약50여km 떨어진
이곳에 그리이스 로마식 도시를 건설한 후 가이사리아로 불렀다.
당시 가이사리아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와 더불어
지중해 3대 항구였다.
지중해와 아라비아를 연결하는 동서국제무역항으로 발달하여
이 지역 중심 도시가 되었고
로마에서 파견된 유대총독이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기원후 6년부터 500여 년 동안 로마총독이 상주하였으며
640년 아랍인들이 점령하였다가 1101년 프랑크족 십자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3세기 경에는 이 지역에서 탁월한 율법학자들이 배출되어
가이사리아 학파를 이루었으며, 알렉산드리아 출신 교부 오리게네스도
여기에 와서 신학을 창시했다.
그의 뒤를 이어 밤필루스와 에우세비우스에 의해
가이사리아 신학파가 형성되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프랑스왕 루이9세가 13세기 중엽에 구축한 요새이고,
본래의 도시 규모는 이보다 세배쯤 컸다고 한다.
이 도시는 1291년 이집트의 바이바르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우리가 본 수로는 갈멜산으로부터 40km 이상 물을 끌어온
긴 수로의 일부분이 남아 있는 형태라고 한다.
1956년 고고학자들이 가이사리아를 발견하고 귀중한 유물들을 발굴하였는데
그중 예수님을 재판한 본시오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돌을 찾아냄으로써
빌라도가 이곳에 살았다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
지중해변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다니!!!
진정!!! 꿈???은 아니었다.
다음날은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날이다.
설레이는 마음은 마치 지중해의 잔잔한 파도처럼 출렁인다고나 할까?...
어떤 표현으로도 다 나타내지 못할 것만 같다...
카페 게시글
◈ 영생을위해 ◈
지중해의 가이사리아 [성바오로딸 수도회 홈피에서발췌]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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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05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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