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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미운 진달래
강동기가 서운상을 가해한 사건은 읍내 지주들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우선, 소작인이 지주를 가해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주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감정적 문제였고, 감정을 누르고 이성적으로 따져보더라도 그 사건이 다른 많은 소작인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결코 작은 문제일 수가 없었다. 지주로서의 체면을 위해서나, 휘하의 소작인들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서나 지주들로서는 좌시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결성을 하기로 합의를 본 별교· 보성지구 좌익척결위원회가 그 사건을 계기로 결성식을 대대적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유주상의 머리로 짜여진 그 계획은 모든 지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서운상이 곤궁에 빠진 입장을 십분 이용해서 논을 헐값으로 몰아 때려 사들인 유주상으로서는 그 사건이 남달리 신경에 거슬리고 있었다. 서운상이 그런 흉악한 꼴을 당한 것에는 자신이 무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 사장 때부텀 부치든 작인 넷이 있는디, 그 사람덜이 성가시럽게 쫓아댕게싼께 기왕지사 소작 낼 것이먼 그 사람덜얼 부치는 것이 워쩌실란지."
돈을 챙긴 서운상이 지나가는 말처럼 했었다.
"알겠습니다. 생각해보도록 하죠."
그자들이 바로 정 사장 집에서 난동을 부린 것들 아닙니까? 하는 말이 곧 입 밖으로 쏟아지려는 것을 유주상은 겨우 참아내며 그렇게 완곡한 대꾸로 지나쳤다. 그런데 그자들이 서운상을 그 꼴로 만들고 말았다. 유주상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놈들에게 소작을 부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를 몇 번이고 다행스러워했다. 만약 소작을 부쳤더라면 서운상이가 당한 꼴을 자신이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자신이 서운상의 논을 사들인 연관말고도, 앞으로 벌교 바닥에서 지주 노릇을 하게 된 이상 그 사건을 소홀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달아난 범인은 틀림없이 잡아야 하는 것이고, 유치장에 갇힌 두 공범도 가차 없이 엄벌에 처해야 했다. 그래야만 께름칙한 마음도 개운해질 것이고, 모든 소작인들이 딴 마음 먹지 않고 정신 바짝 차려 황소처럼 일하게 될 것이었다.
그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는 벌교·조성지구좌익척결위원회 결성식을 대대적으로 벌일 필요가 있었다. 지주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게 되면 심재모도 범인들 처리에 압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고, 소작인들도 지주들의 단결된 힘 앞에 기가 죽게 될 터였다. 벌교·조성지구좌익척결위원회 결성식은 남국민학교 강당에서 그야말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벌교, 보성, 조성, 고흥의 한다하는 지주들은 다 모여들었고,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이 빽빽하게 강당을 채웠다.
"………우리 국가와 민족의 양양한 앞길을 가로막고 파괴하려는 공산도배들을 우리는 그대로 좌시 관망할 수 없어 다 같이 힘을 합쳐 무찌르기 위하여 이에 본 좌익척결위원회를 결성하는 바이며, 앞으로 공산도배와 그 분자들을 일소 척결함에 있어서 우리는 용맹무쌍하게, 일사불란하게 나설 것이며, 따라서 이 어떠한 용공적 행위나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도 결단코 용인하지 않을 것임을 이에 천명하는 바이며………"
위원장으로 뽑힌 최익달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만큼 격앙된 어조로 취지문을 읽어 내려갔다.
읍장과 나란히 앉은 심재모는 뒤늦게 이 위원회가 결성되는 저의가 무엇일까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각 지역의 지주들이 중심이 된 데다가 '좌익척결'을 내세우고 있는 이 모임을 현실적으로 권장을 했으면 했지 불법으로 간주할 근거나 이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좌익척결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있었지만 지루하게 긴 취지문 낭독이 다 끝나도록 그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네들을 방어하기 위한 모임에 지나지 않고, 앞으로 일해 먹기 힘든 골칫거리가 될 거라고 심재모는 생각을 정리했다.
결성식이 끝나고 옆 교실에서 축하잔치가 벌어졌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물론 지주들만으로 한정되었다. 심재모는 영 기분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 자리를 피할 방도는 없었다. 심재모가 그런 눈치를 보이자 경찰서장이, "조금만 참으시지요." 하며 만류의 눈짓을 보냈다.
"짜아, 좌익척결위원회 결성을 축하허는 뜻으로 우리 모다 한잔씩 쭈욱 듭시다!"
위원장 최익달이 술잔을 높이 치켜들었고, 제각기 기분 들뜬 소리들을 한마디씩 해대며 술잔을 높였다. 술잔이 오가는 속에서 심재모는 술을 마시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기분도 기분인데다가 낮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자아, 심 사령관, 내 술 한잔 받으씨요."
단상에서 흥분된 기분이 그대로 연속되고 있는 것 같은 최익달이 술잔을 내밀었다.
"예에………" 심재모는 엉거주춤하게 잔을 받았다.
"거어, 서운상이럴 해꼬지헌 놈은 안직도 잽힐 미꼬미가 안 뵈요?"
술을 따른 최익달이 터무니없이 큰 소리로 물었다. 심재모는 순간적으로 비위가 상하는 것을 느꼈다. 최익달이 고의적으로 큰 소리를 지른 듯했고. 그 어투가 시비조가 완연했다. 술을 권한 것도 그 말을 꺼내기 위한 의도적 행위로 여겨졌다. 이걸 어떻게 대처하나, 심재모는 흔들리려는 감정을 누르며 잠시 생각했다.
"예, 지금 수사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심재모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장 권병제가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심재모는 그런 서장에게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이 얼른 그런 식의 형식적인 응답을 해버리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서장헌테 물은 말이 아닝께, 권 서장은 나서지 마씨요."
최익달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거침없이 내쏘았다. 권 서장의 안색이 변하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권 서장을 보자 심재모의 마음은 금이 가고 말았다.
"말씀 삼가시오. 수사행정에 민간인은 개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엄연한 수사행정관한테 나서라, 나서지 마라, 하는 말투는 도대체 뭐요. 권 서장이 나서지 말라면, 나더러 나서라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수상행정에 간섭하려 드는 거요? 좌익척결위원장 자격이오? 내가 계엄사령관 자격으로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건 그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는 민간임의단체일 뿐이고, 만약 그 단체를 이용해서 불법적 권한행사를 하게 되면, 계엄사령관 권한으로 그 단체를 해산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지금은 엄연히 계엄 하요."
심재모는 최익달이보다 큰 소리로 억제하고 있던, 그러나 언젠가는 쐐기를 박고 싶었던 말을 시원하게 토해내 버렸다. 술자리는 금방 얼어붙어버렸고, 예기치 못한 공격을 당한 최익달은 말이 막힌 채 볼만 씰룩여대고 있었다.
"아, 심 사령관님, 최 위원장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 범인이 잡히지 않아 염려해서 하신 말씀 아닙니까. 오해 마시고, 제 술 한잔 받으시죠."
유주상이 끼어들며 술잔을 내밀었다.
"됐습니다. 난 낮술은 한 방울도 못하니 마신 걸로 합시다."
심재모는 손을 들어 잔을 거절하고는,
"좋습니다. 유 단장 말대로, 염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앞으로 위원회의 협조에 기대를 걸면서, 난 근무 중이라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만큼 상대방의 감정을 수습해놓고 자리를 뜰 요량으로 그는 속과는 다른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고는 곧바로 술자리를 빠져나갔다. 심재모는 의식적으로 유주상을 '유 단장'이라 불렀던 것이다. 유주상이 끼어들었을 때, 당신이야말로 나서지 마시오, 하는 말이 곧 튀어 나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유 단장'으로 호칭함으로써, 너는 내 휘하야, 하는 사실을 일깨워 그의 잘난 체하는 콧대를 꺾어버리려는 의도였다.
그의 통통하게 살이 오른 허연 얼굴을 대할 때마다 심재모는 비위가 상하는 것을 느꼈다. 그 혈색 좋은 허연 얼굴에는 교활과 간사함이 언제나 감돌고 있었다. 그의 교활기는 염상구의 교활과는 사뭇 다른 냄새를 풍겼다. 염상구의 교활은 단순하면서도 썩는 냄새는 나지 않는데, 그의 교활은 복잡하면서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염상구에게는 주먹패의 의리나마 있지만 그에게는 돈과 권력만을 좇는 파렴치함밖에는 없는 것으로 보였다. 청년단장에다가 좌익척결위원회 총무 직책까지 거머쥔 그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우익이 아닐 수 없었다. 심재모는 비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차암…… 어째야 좋을지……"
교문을 나서며 권 서장이 한숨을 흘렸다.
"신경쓰지 말아요. 자기네가 입으로 떠들어댄다고 좌익이 척결될 것도 아니고, 배부르고 할 일들 없으니까 저런 일이라도 만들어내야 소일거리가 될 거 아닙니까."
심재모가 모자를 고쳐 쓰며 코웃음을 흘렸다.
"어쨌거나 강동기를 잡기는 잡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권 서장이 근심스럽게 말했다.
"잠복근무는 여전히 효과가 없나요?"
심재모는, 그가 어디로 도망갔을 것 같으냐고 물으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없습니다."
"허점을 찔리게 될 지도 모르니 잠복은 계속시키도록 하고, 피해자의 그 뒷소식은 뭐 없습니까?"
"계속 전신마비 상탠 모양입니다."
"전신이 마비라니, 더 회복이 되지 않으면 그 사람 앞날도 참 딱하게 됐소."
심재모는 그 사람의 인생살이 어리석음에 혀를 찼다.
3월로 접어들면서 산과 들은 완연하게 푸른 색조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들녘에는 온갖 풀들이 저마다 다른 색감의 초록빛으로 돋아 오르며 맑은 햇살 속에서 눈부신 싱그러움으로 반짝거렸고, 산은 가을에 위에서부터 갈빛으로 물들어 내리던 것과는 반대로 이제는 아래서부터 위로 화사한 봄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 푸른 봄기운은 마치도 물이 차오르듯이 하루하루의 밤이 바뀔 때마다 위로위로 번져 오르고 있었다. 그 푸른 물결에 감싸여 진달래도 아래서부터 꽃을 피워내며 문득문득 꽃피움자리를 위로 바꾸어 갔다. 진초록·연초록·황초록·감초록 등 갓 돋아나는 가지가지 나뭇잎새들이 어우러져 이룬 푸름 속에 점으로 찍힌 듯 피어난 진달래의 붉은 꽃잎들은 점점이 불꽃으로 고운, 산이 입은 봄옷의 화사한 무늬였다.
산이나 들녘이 그리도 신비롭고 곱게 변해가지만 그런 것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연이 새로운 활개짓으로 싱싱하게 살아 오르는 것과는 반대로 사람들은 절정에 이른 춘궁기의 굶주림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로도 하루 한 끼를 때울 둥 말 둥 하는 굶주림에 시달리며 나날의 삶을 넘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부황기로 들뜬 얼굴에 눈이 풀렸고, 병약한 노인네들은 목숨줄을 놓아버리고 잠들 듯이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봄초상을 당하는 것처럼 박복한 목숨도 없었다. 산 사람 입에 넣을 것도 없는 형편에 죽은 사람 길닦음에 격식 차릴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어느 집에서나 거적쌈을 하다시피 하는 것이 봄초상이었다. 그것이 서로 간에 흉일 수 없었고, 부모에게 불효일 수 없었다. 그래서 노인네들은 가을에 죽기를 소원했지만 춘궁기의 아리고 아린 굶주림은 그런 소원을 매정하게 외면했다.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눈앞이 샛노랗게 변하는 아뜩한 현기증에 비틀거렸고, 저 깊은 데서부터 귀가 찌잉 울리는 이명에 시달리며 그저 먹을 것, 먹을 것만을 찾아 허덕거렸다. 굶주리고 굶주려서 생긴 병인 부황기가 전신에 퍼지다 못해 눈까지 누리끼리하게 물들였다. 그 눈에 새 순 돋는 초록빛의 다양함이 신기할 리 없었고, 꽃이라고 해서 고와 보일 리 없었다. 싹은 싹대로, 꽃은 꽃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대상일 뿐이었다. 먹을 수 있는 싹은 쑥이었고, 먹을 수 있는 꽃은 진달래였다. 여자들은 쑥을 찾아 논두렁 밭두렁에 쪼그려 앉았고, 아이들은 진달래꽃을 좇아 산자락을 기어올랐다.
그 어느 풀보다도 먼저 돋움하는 쑥은 그저 예사로운 풀이 아니었다. 겨울에는 흔적도 없다가 봄기운이 비치기 무섭게 젖빛 솜털로 감싸인 잎을 피워내는 것이나, 그 쓰임새가 한두 가지가 아님이 그러했다. 풀들 중에서 제일 먼저라고 할 만큼 빠르게 잎을 피우는 쑥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어엿한 양식이 되어주었다. 시래기가 진작 동나고, 보리싹도 억세어져 버린 때에 연초록빛 어린 쑥잎은 죽거리로 너무나 흡족스러웠다. 그 보드라움과 향기로움은 주린 뱃속을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너나 없이 굶주린 손들이 다투듯 쑥을 뜯어냈지만 쑥은 동나는 법이 없었다. 잎을 뜯어내면 뜯어낼수록 다년생의 질긴 뿌리에서는 새 잎이 돋아 올랐다. 굶주린 속 더 많이 채워주겠다는 것처럼. 사람들은 쑥을 '불사초'라고도 불렀다. 자기네들을 굶어죽지 않게 해주는 풀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자기네들이 그렇게 모지락스럽게 뜯어먹는데도 죽지 않는 풀이라는 뜻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불사초인 쑥을 그 어떤 풀보다 먼저 돋아나게 한 것은 하늘의 무수한 섭리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쑥은 춘궁기의 죽거리로만 그 몫을 끝내지 않았다. 쑥이 쑥다운 면모를 갖추는 것은 보리가 알을 퉁퉁하게 밸 즈음이었다. 그때쯤이면 쑥잎은 검푸른 죽거리로는 쇠었지만 쑥으로서의 다양한 쓰임새로는 제격을 갖추고 있었다. 여자들은 보리농사 틈틈이 그 쑥을 치마폭에 뜯어 담아다가 툇마루 그늘에 펴서 말렸다. 그늘에서 말려진 쑥은 망태기에 꼭꼭 눌러 담겨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갈무리되었다. 그건 가난한 설을 쇠기 위한 갈무리이면서, 그 사이에 일어나는 길흉사에 떡감으로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쑥은 떡감만이 아니라 남자들이 곰방대 담배를 피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부싯돌 불쏘시개였고, 줄기나 잎꼭지는 한방의 약제였으며, 특히 뜸을 뜨는 데는 쑥이 절대가치를 발휘했다. 그런 것들 말고도 쑥은 또 한 가지 쓰임새를 가지고 있었다. '쑥버무리'를 만드는 것이 그것이었다. 쌀가루에 연한 어린 쑥을 버무려 시루에 쪄내는 것이 쑥버무리였다. 고슬고슬하게 익은 쌀가루가 쑥잎들과 섞인 쑥버무리는 색감의 조화로도 식욕을 자극했고, 입에 씹히면서는 쑥향의 그 진하고 그윽함이 한결 맛이 돋우었다. 그러나 그건 가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배부른 사람들이 봄을 즐기기 위한 미각놀이거나, 환절기의 밥맛없음을 벌충하기 위한 간식 마련이었다.
그 어디를 훑어보아도 물밖에는 배를 채울 것이 없는 아이들은 진달래꽃을 따라 산자락을 헤맸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었지만 아무리 먹어도 밥처럼 배가 불러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것을 다 알면서도 허리가 꺾이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진달래꽃을 따먹어야 했다. 배가 부르지는 않아도 코끝에 스미는 여린 향기와 함께 무언가를 씹고 있다는 기분이 당장의 허기를 달래주는 탓이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개의하지 않은 채 손승호는 교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그 글짓기를 읽어 내리며, 아이들 앞에서 낭독을 시킬까 말까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동시는 국민학교 6학년으로서는 놀라우리만큼 잘 지은 것이었다. 문학적 소양을 가진 누군가가 써준 것이라고 의심할 정도로, 그러나 글짓기는 바로 지난 시간인 어제 실시했던 것이지, 숙제가 아니었다. 그 동시에 투영되어 있는 체험이 특히 가슴을 치는 아픔과 함께 감동을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그 대목은 거짓 없고 숨김없는 동심의 표현이면서, 문제점이 중첩되어 있는 현실의 가장 큰 일면을 거울이듯 생생하게 비춰내고 있었다. 이런 좋은 글은 점수를 많이 주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모든 아이들이 듣고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낭독시켜야 한다고 손승호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망설이는 것은 혹시나 허명길이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잠시 놀림감이 된다 하더라도 동시를 낭독시키기로 그는 마음을 정했다.
"자아, 모두들 조용히 하고, 일동 주목!"
손승호는 손바닥으로 교탁을 가볍게 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교실 안의 소란이 일시에 딱 멎으며 아이들의 눈길이 선생을 향해 모아졌다.
"에에,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글짓기를 했지요?"
아이들이 함께 입을 모아 "예에―" 대답했다.
"됐어요, 그럼 지금부터, 그 중에서 제일 잘된 것을 골라, 글을 지은 사람이 앞으로 나와 낭독하도록 하겠어요."
아이들의 얼굴에는 금방 긴장감이 감돌았고, 교실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고요가 흘렀다.
"허명길!"
마침내 이름이 불리었다.
실망스러운 소리, 놀라는 소리, 부러워하는 소리가 뒤섞이면서 아이들의 눈길은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학우들의 눈길을 받으며 소년은 주춤주춤 일어서고 있었다.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당황기와 함께 상기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양부족으로 인한 초췌함을 가려지지 않았다.
"자아, 명길아, 어서 나와야지."
손승호는 쓰다듬듯 하는 눈길을 보내며, 감싸듯 하는 어조로 말했다.
허명길은 공부가 중간 정도인, 별로 표가 나지 않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글짓기를 해냈기 때문에 더 신통하고 대견하게 여겨졌다.
손승호는 허명길을 교단으로 오르게 해서 교탁 앞에 세웠다.
"여러분, 조용히들 하고, 허명길의 글짓기를 잘 듣도록 해야 해요. 왜 잘된 글짓기인지, 어디가 잘되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면서 들어야 해요. 이게 다 국어 공부니까요."
손승호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나서,
"명길아, 글을 지을 때의 기분을 다시 생각해가며, 빨리빨리 읽어버리지 말고, 또박또박, 천천히, 네 기분이 잘 살아나도록 읽도록 해라. 겁먹지 말고, 알겠지?"
허명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승호는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어린 몸의 떨림과 열기가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져 왔다.
"잘 읽을 수 있겠지?"
손승호는 허리를 구부려 허명길의 눈을 쳐다보았다.
"예에……" 소년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자알 지은 글이니까 읽기도 잘할 수 있을 게다."
손승호는 아이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교단을 내려섰다.
"그러면 지끔부텀 선생님이 시키신 대로 지 글짓기럴 읽겄습니다."
허명길이 교탁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며 고개를 꾸벅했다.
눈길은 떨구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또랑했다. 손승호는 안심이 되며, 손뼉을 쳤다. 아이들이 모두 따라서 짝짝짝짝 손뼉을 쳐댔다. 눈이 커진 허명길은 잠시 어리둥절 하는 것 같다가 부끄러운 웃음을 띠며 머리가 교탁에 닿도록 다시 절을 했다.
"미운 진달래. 6학년 2반 27번 허명길."
허명길은 삐쩍 마른 목을 길게 늘이며 마른침을 삼키고는 혀끝을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두 손에 잡힌 종이 끝이 바르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진달래 진달래
분홍빛 예쁜 꽃
진달래 진달래
분홍빛 먹는 꽃
진달래 진달래
온 산에 피면
풀꾹풀꾹 풀꾹새
따라서 우네
풀꾹새 풀꾹새
배고파 우는 새
풀꾹풀꾹 우는 소리
배고파 배고파 하는 소리네
풀꾹풀꾹 풀꾹풀꾹
우는 소리 들으며
배고파 배고파
나도 더 배고파
진달래꽃 따먹으러
산으로 갔지
많이많이 먹을려고
혼자서 갔지
진달래꽃 쌀밥 같아
하루내내 따먹었제
구역질 참아내며 먹어도 먹어도
배는 부르지 않았네
밤중에 배가 째지게 아프고
옷에다 그만 설사를 했네
주욱주욱 쏟아진 물똥은
진달래꽃 물똥이었네
엄니가 물똥을 닦으며
그 꽃 많이 묵으먼 뒤져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네
나는 거짓말로 크게 울었지
진달래 진달래
분홍빛 미운 꽃
설사만 나게 하는
분홍빛 미운 꽃
읽기를 마친 허명길은 아까처럼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손승호가 손뼉을 치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이 한꺼번에 손뼉을 쳤다.
허명길은 허둥지둥 교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 글도 잘 지었고, 낭독도 아주 잘했다."
손승호는 교단으로 올라서며 말하고는,
"여러분들은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왜 잘 지은 글인지 알겠어요?"
학생들을 향해 물었다.
"피이, 돼지새끼맹키로 미런허게 진달래 따처묵고 물똥 깔긴 그런 이약이 머시기가 잘 쓴 것이여."
불쑥 터져 나온 말이었다. 손승호는 소리 나는 쪽으로 빠르게 눈길을 쏘았다.
느낌 그대로 박태웅이었다.
박태웅은 눈길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는데, 쑥 내밀고 있는 입술에는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 너 같은 아이들한테는 물똥 갈긴 더러운 이야기일 뿐이겠지.
손승호는 그 아이가 미워지려는 감정을 지그시 눌렀다. 박태웅은 언제나 쌀밥에 장조림이나 계란부침, 멸치볶음 같은 것을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였다.
"그래, 박태웅군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건 박태웅군의 생각이니까, 좋다. 어떤 글이든 읽거나 듣고 나서 생각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다. 자아,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 박태웅군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생님 눈치 보지 말고 손들어 봐요."
손승호는 학생들을 휘둘러보았다.
박태웅의 말을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그와 비슷한 생활여건을 가진 아이들이 네댓 명이 있었고, 그들은 학급의 주도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냥 지나쳤다가는 허명길은 놀림감만이 아니라 '돼지새끼맹키로 미런허게 진달래 따처묵고 물똥 갈긴 드런 눔'으로 멸시당하고 천대받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칭찬을 하고 격려를 해주려다가 오히려 기를 죽이고 상처를 받게 만들 판이었다.
손승호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도 어쩐 일이지 손을 드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럼, 다들 허명길군의 글이 잘됐다고 생각합니까!"
"네에―"
"좋아요,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서 허명길군처럼 배가 고파서, 재미나 장난이 아니고 정말 배가 고파서 진달래꽃을 따먹어본 사람은 솔직하게 손들어 봐요. 그건 절대로 창피스러운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니까 솔직한 마음으로 손들어야 해요."
손승호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이들은 별로 자신이 없는 태도로 미적미적 팔들을 밀어 올렸다. 예상했던 대로 손을 든 아이들은 거의 다였다.
"됐어요. 다들 손 내려요." 손승호는 교탁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는,
"여러분들은 거의가 배가 고파 진달래꽃을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가지고 좋은 글을 지은 건 허명길군 한 사람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첫째, 그 슬픈 일을 하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서입니다. 그리고 둘째, 그 일을 창피스럽거나 부끄럽게 생각해서 감추려고만 했지 글로 써보려고 마음먹지 않아서입니다. 여러분, 좋은 글을 짓는 것은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를 솔직하게 쓰는 것입니다. 자아, 보세요. 만약 허명길군이 남에게 보이는 것이 창피하고 부끄럽다고 생각해서, 밤중에 배가 째지게 아프고/옷에다 그만 설사를 했네/주욱주욱 쏟아진 물똥은/진달래꽃 물똥이었네, 이 대목을 쓰지 않았더라면 이 글은 잘 지어진 글이 될 수 없어요. 이 대목이 바로 제일 잘된 대목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 대목, 엄니가 물똥을 닦아내며/그 꽃 많이 묵으먼 뒤져/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네/나는 거짓말로 크게 울었지, 얼마나 눈에 선하게 보이도록 있는 그대로 썼습니까. 이 두 대목이 없었다면 이 글은 칭찬받을 수 없는 보통 글이 되고 말았을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
"네에―"
"좋아요. 그럼 선생님이 허명길군의 '미운 진달래'를 다시 한 번 읽겠어요. 여러분들은 진달래꽃을 따먹던 일을 생각하며 잘 들어보도록 해요."
손승호는 목을 가다듬었다.
유동수네 아랫방에 서인출과 김종연, 세 사람이 모여 앉았다. 그들이 모이면 으레 끼게 마련인 장칠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칠복이 쪽에서도, 그들 세 사람 쪽에서도 서로 얼굴 맞대하고 앉기를 꺼렸다. 장칠복이가 세 사람 몰래 소작을 더 얻어부친 것이 드러나면서 그들의 사이에는 살얼음이 끼게 되었다.
"으쩌까, 궃으나 좋으나 오동평이럴 찾아가야 허겼제?"
유동수가 힘없는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눔에 꼬라지 꿈에 볼까 무섭제만, 워쩌겄소. 물만 묶고 젼디는 것도 한도가 있제."
김종연이 체념적으로 말했다.
"동평 아재도 우리가 대문 넘어스기럴 이제나저제나 허고 기둘리고 있을 것잉만."
서인출이 마른 입맛을 다셨다.
"그 인종이야 폴세부텀 입맛 다시고 앉았겄제. 지 재산 불키는 호시절인디."
유동수의 쓰게 웃는 얼굴이 흐린 등잔불빛 속에 쓸쓸했다.
등잔불빛도 그 밝기가 가을과는 달랐다. 심지를 줄일 대로 줄여서 등잔에 간신히 붙어 있는 불꽃은 반딧불처럼 미약했다.
"고 잡녀러것 심뽀로는 춘궁기가 일년 사시절 내내이기럴 바랠 것이요. 지주눔덜도 몰악시럽지만 마름눔덜 악독헌 것은 지주 쩜쪄묵는 판인디, 그중에서도 오동평이는 질일 것잉마. 양반집 마당쇠가 양반보담 곱절 권세 부리드라고, 마름눔덜 허는 행투, 싹 다 배꼽에 대창 꽂아뿌러야 써, 씨부랄 눔덜."
김종연이 결기를 부렸다.
"금메, 고것이 워디 하로이틀 된 일이등가. 말허는 입만 아프제."
유동수가 꽁초를 집어 들었다.
세 사람은 마름 오동평에게 장리쌀을 내러가기로 한 것이다. 장리쌀을 내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빚인 줄 다 알지만 굶주림을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막바지에 이르면 그 함정에 발을 넣지 않을 수가 없었다. 5부 변인 장리쌀을 먹는다는 것은 제 살을 뜯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다급한 형편에 장리쌀을 빌 때는 그래도 덜한데, 가을에 빚을 갚다 보면 자신들이 지주나 마름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생살을 뜯기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는 했다.
"긍께, 입만 아프지 말게 이눔에 시상얼 뚜둘겨 뿌식어뿌러야 헌다 그 말이요."
"짜가 시방 무슨 뜽금웂는 소리 허고 앉었다냐?"
유동수가 길쭘하게 찢은 종이 끝을 등잔에 갖다 대고 불을 붙이며 김종연을 곁눈질로 쏘아보았다.
"뜽금웂는 소리가 아니어라, 성님. 요분 참에 술도가 정가눔 논 사딜인 고흥 지주눔 등짝얼 삽으로 찍어뿐 일이 벌어지고 나서 나가 되작되작 생각혀봤는디, 고 강동기라는 것이 물건언 물건이다 싶고, 지나 내나 나이묵은 것이야 얼추 같은 것인디, 나넌 먼고 허는 한심시런 생각이 듭디다. 강동기가 한 분도 아니고 두 분썩이나 그리 독허니 대드는 판인디 나넌 머 허고 자빠졌는 삼시랑이다냐 생각헌께 나가 똥친 작대기맹키로 빙신 팔푼이로 뵙디다."
"아, 그 사람이야 소작이 떨어져뿌렀응께 그리 독얼 부리는 것이고, 니야 소작이 그대로 붙어 있응께로 가만있는 것이제 워째야."
"성님, 나 말언 고런 말이 아니랑께요. 나도 소작이 떨어져뿔먼 그리 턱허고 야물딱지게 혀낼 수 있느냐 허는 생각이 한 자락 있고라, 또 한 자락 다른 생각이 있는디, 나가 이 젊디나젊은 나이부텀 소작에 목매고 찔찔이 고상험스로 살아갖고 대체 은제꺼지 요런 꼬라지로 살아야 헐 것이다냐 하는 생각이 그것이요."
"참말로 뜽금웂다. 죽을 때꺼정 살아야 허는 것 몰라서 실답잖게 고런 생각허고 앉었었냐."
유동수가 어이없어 했다.
"성님, 바로 고것이 문제요. 죽을 때꺼정 요리 사느니 요눔에 시상얼 팍 엎어뿔러야 헌다 그것이요."
"쟈가 시방 미쳤다냐? 무신 수로 시상얼 팍 엎어뿔고 뒤집어뿔고 헐 것이다나."
"금메 들어봇씨요. 평상얼 지주고 마름눔덜헌테 등까죽 벳게지고 피 뽈려감서(빨려가면서) 굶기럴 묵디끼 허고 사는 요것이 워디 사람 꼬라지라고 헐 수 있겄소. 아나 어런이나 모다 누르팅팅허니 부황이 들어 멋이 되얐거나 묵을것을 찾어 눈에 불키고 헐떡기리는 요 허천딜린 꼬라지가 개나 돼지허고 머가 달브요. 끝도 한정도 웂는 뻘밭 걷대끼 허는 요 팍팍허고 징헌 시상살이럴 원제꺼지 젼디고(견디고) 살 것이요. 인자 시상이 변혔구만요. 일정 때가 아니랑께요. 시상이 변허먼 으당 사람 사는 법도 변해야제라. 그 무선 일정때도 소작쌈얼 여기저그서 일으켰는디, 인자 달라진 시상에 삼스로도(살면서도) 우리가 손끝발끝 맺고 앉았어야 되겄소. 우리 밥그럭 우리가 찾어묵지 않으먼 누가 찾아주겄소. 그렁께 말이요, 우리가 당허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강동기가 헌 것맹키로 일시에 들고일어나 지주고 마름이고 싹 다 때레쥑여뿔먼 시상이 엎어진다 그것이요."
"쟈가 양잿물얼 묵은 것도 아니겄고, 워째 저리 생각 삐까닥헌 소리럴 해쌓는지 몰르겄네? 고것이 니 혼자 맴이제, 일시에 일어나지는 것도 아니고, 일시에 일어나서 그리 헌다 혀도 나라가 귀경만 헐 숭불냐? 무신 일 벌어졌다 허먼 나라가 무지막지허게 닦달해대는 것 그간에 한두 분 젺어봤다고 고런 실답잖은 소리여. 글안해도 사지 늘어지고 기운 웂는디 쓰잘디웂는 소리 허덜 말어라."
"아, 고것이야 누가 몰르요? 우리가 요리 살아있는 것도 다 운수가 좋아 그런 것 아니겄소? 그간에 죽을 고비 한두 분썩 안 넴긴 사람덜이 웂는 것이야 니나 웂이 다 아는 일잉께 더 말헐 것 웂고라, 작인덜이 지주나 마름보담 수십 배가 많은께 강동기 그 싸람이 헌 식으로 새로 들고 일어나먼 시상얼 엎을 수 있따 그것이요."
"어허! 그 똑똑헌 염상진이도 총 지니고 내쫓기는 판인디, 니가 참말로 정신이 훼까닥혀뿌렀구나. 인자 나라꺼지 새시로 맹글어 갖고 쪼간 옳은 소리 험스로 나대기만 허먼 쩨까닥 빨갱이로 몰아쳐 평생얼 망치게 허는 시상잉께, 존 일 헌다고 입 조심혀. 순사덜이 즈그 계급 올라갈라고 되나케나 사람 잡아딜여 빨갱이 맹그는 무선(무서운) 시상이란 것 니 알제?"
"참말로 니미럴 것, 우로 봐도 옆으로 봐도 모다 칵칵 맥히고 첩첩산중이라 살 방도가 웂는 환장헐 눔에 시상이요. 우리 웬수가 한둘이 아닌디, 순사눔덜이 코쟁이덜 믿고 사람 개잡디끼 헌 것도 기가 찬디, 배급표 띠묵어 부자할라 되고, 인자 고런 느자구웂는 짓거리꺼지 해대니 요눔에 시상얼 워째야 쓸께라. 똥통보담도 더 드럽게 썩어가는 시상이요."
"냅두소. 썩을 대로 썩다가 보면 지물에 밑창이 빠져 내레앉을 날이 올 것이네. 그때꺼정 기둘리는 것도 한 방도시."
"태평시럽소. 그간에 피 뽈리고 굶어서 다 죽게 되는 것은 안 생각허시오? 염병헐 것, 강동기 그 사람이 장허고 장헌 인물인디, 서가눔 대갈통얼 수박 쪼개디끼 반으로 쫙 갈라뿔어야 허는디 말이여."
김종연은 마른 입을 짭짭 소리 내며 담배쌈지를 끌어당겼다.
"니 말허는 것이 영 위태위태허다. 여기서야 무신 소리 혀도 암시랑 않제만, 혹여 암디서나 그리 입 씸벅씸벅 놀리다가는 영축웂이 빨갱이로 몰릴 것이다."
유동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니미럴 것, 속 씨언허게 빨갱이질이나 한바탕 혀부렀으먼 좋겄소. 요런 미꼬미 웂는 시상 살아가기도 인자 징글징글허요."
"참말로 니 못허는 소리가 웂다이. 인출이맹키로 잠 진득혀라."
"아이고 성님, 인출이가 입 봉허고 앉었응께 생각이 나만 덜헌 것 같지라? 사람덜이 다 속언 뻔험스롱도 말만 안허고 있데끼, 인출이도 입만 봉허고 앉았을 것이요. 워디 한분 물어봇씨요."
김종연이 자신 있다는 듯 유동수를 응시했다.
"행에 니 같을라디야. 워쩌냐, 니넌?"
유동수가 서인출에게로 눈을 돌렸다.
"금메요………" 서인출은 더디게 앉음새를 고치더니,
"종연이 말이 맞기야 맞제라. 작인덜치고 속맘으로 지주고 마름이고 쥑여보지 않은 사람덜이 워디 있겄소. 열 분, 스무 분, 분허고 원통헐 때마동 쥑였겄제라. 으쩌요, 성님언 그런 일 웂었소?"
그는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유동수는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자신도 마음속으로 지주나 마름을 죽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종연의 말이 어느 대목 하나 틀릴 리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그대로 자신의 마음이었다. 다만, 나이 값을 해야 했으므로 종연의 결기를 다독이려고 했을 뿐이다.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바뀌어야 했다. 이대로는 평생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세상인심은 다 그쪽으로 돌아 있었다. 강동기라는 작인이 지주를 삽으로 찍은 것에 대해 사람들은 큰길에 나서서 외치지 않았을 뿐이지 모두들 시원해하고 고소해했다. 그리고, 지주가 죽어버리지 않은 것을 아까워했고, 강동기가 영영 잡히지 않기를 빌었다. 작인이 지주를 찍어서 조용했지, 만약 지주가 작인을 찍었더라면 읍내가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모여 앉으면 세상살이 불만으로 입들을 모았고, 세상이 뒤집어질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눈치들이었다.
"성님, 강동기 그 사람이 워디로 도망질헌 것 겉으요?"
김종연이 깊이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내뿜고 나서 물었다.
"나가 점쟁이다냐? 고런 것얼 알게."
"어허, 점쟁이만 고런 것을 안다요. 이적지 잽히지 않은 걸 요리조리 생각혀보먼 짚이는 것이 있을 것인디라?"
"금메……… 하늘로 솟았을끄나, 땅으로 꺼졌을끄나."
"와따, 강동기가 홍길동이간디 하늘로 솟고 땅으로 꺼지고 혀라. 그리 건숭건숭 생각지 말고 책장 넴기데끼 조단조단 생각혀봇씨요."
"책장 아니라 명주올 시데끼 혀도 나넌 몰르겄는디."
유동수는 허기로 맥이 빠져 필요한 말을 하는 것도 힘이 드는 판에 그런 엉뚱한 일을 생각하느라고 신경을 쓰는 것은 너무 귀찮았다.
"허, 성님이 고런 생각 허기가 성가신개비요이. 어이 동상, 자네가 한분 용헌 점쟁이가 되야보소."
김종연이 다리를 뻗어 서인출의 무릎을 질벅였다.
"호로자석, 성님얼 몰라보고. 이눔아, 복채럴 내야 점얼 치제."
"워따, 선무당 장구 나무래네. 몰르겄으먼 솔직허니 몰르겄다고나 혀야 붕알값을 허제."
"아까부텀 니눔 말허는 꼴라지가 워디 짚이는 디가 있는갑는디, 그려, 니나 붕알값얼 싸게 혀바라."
서인출도 허황한 이야기를 길게 끌 흥미가 없어 종연에게 대답을 떠넘겼다.
"나가 묻고, 나가 답허는 요런 싱건 일얼 나가 멀라고 혀. 오동평이헌테넌 낼 아칙에 가기로 허고, 일어나 보드라고."
김종연은 등잔받침대 아래 붙은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 일어섰다.
"어허, 이 사람아, 내논(내놓은) 말이나 끝내고 가야제. 그 사람이 대체 워디로 갔다는 게여?"
유동수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컸다.
"아이고, 나도 모르겄소. 혀봤자 다 봉사 문고리 더듬는 소리제라."
"이눔아, 비싸게 꼬랑댕이 틀지 말고 싸게 말해뿌러. 글안허먼 니 못 간다."
서인출이 김종연의 바지를 틀어잡았다.
"처자식 기둘리는 집에 갈라먼 천상 말얼 혀야 쓰겄구마."
김종연은 피식 웃고 나더니, "율어" 한마디를 툭 던지듯 했다.
"율어?" 유동수가 허리를 세우며 큰 소리를 냈고, 서인출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잠시 침묵이 그들을 에워쌌다.
"참말로 그까?" 유동수가 입을 열었다.
"아매 그럴란지도 몰르요." 서인출이 대꾸했다.
"요것이 니 생각이 아니라 워디서 진짜배기 소식으로 들은 것 아니어?"
유동수가 김종연을 올려다보았다.
"아이고메, 성님언 나보담도 한술 더 뜨고 나오요이."
김종연이 고개를 저었다.
"만일에 율어로 들어갔다 허먼 남은 마누래허고 새끼덜이 큰 걱정이다."
유동수가 힘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성님, 워째 말얼 꺼꿀로 허고 그러요. 마누래야 젊디나젊은 삭신에, 딸린 새끼가 하나뿐잉께 정재살이럴 허든, 품을 폴든, 산 입에 거미줄 칠랍디여. 걱정이람사 입산헌 남자가 걱정이제라."
김종연이 지게문을 밖으로 밀었다.
"참말로 빌어묵을 시상이다." 유동수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서인출도 몸을 일으키며 어찌할 수 없어 매형 하대치를 떠올리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딸자식이 겪는 고생이 마음아파 사위에게 미운살이 박혀 있었지만 속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해방이 되어 매형이 징용에서 돌아오자 아버지는 갑자기 능구렁이를 잡아야 한다며 산을 헤매 다녔다. 매일 빈손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는, 능구렁이를 어디에 쓸려고 그러느냐는 어머니의 줄기찬 물음에 대꾸 한번 하지 않았다. 산을 헤맨 지 열흘이 다되어 아버지는 실히 한 발이 가까운 능구렁이를 기어코 잡아왔다. 그 살아 꿈틀거리는 능구렁이는 대두병에 대가리부터 밀어 넣어졌다. 대두병 주둥이는 작고, 능구렁이 대가리는 커서 아버지는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반나절을 애먹어야 했다. 일단 대가리를 밀어 넣자 병 주둥이보다 세 배는 굵어보이던 몸매는 앞으로 뒤로 불룩불룩해지며 미끄러지듯이 병 속으로 들어갔다. 지체 없이 병 속에 소주가 채워졌다. 능구렁이는 제 몸을 제가 감으며 대가리로 병 주둥이 쪽을 수없이 치받았다. 그 뱀술은 헛간 기둥에 꼬박 100일 동안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말 한마디 없이 그 술을 손수 사위에게 갖다 주었다. 술을 받고 매형이 눈물을 훔치더라는 말도 누님을 통해서 들었다. 매형은 장인의 정을 그렇게 고마워했으면서도, 장인이 버리기를 바라는 공산주의는 끝내 버리지 않았다.
매형 하대치는 몸만 강단진 사람이 아니었다. 몸만큼 마음도 강단진 사람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버지가 맞아 죽었는데도 그는 좌익 활동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맞아 죽었으므로 그는 더욱 마음이 강단져질지도 몰랐다.
서인출은 그럴 수 있는 매형이 두렵고도 부러웠다.
첫댓글 소작인
즐감
즐독 감사합니다
참으로 깝깝한 세상이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