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원의 돌부처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채 보름이 못 되었을 때의 일이다.
오랜 세월동안 당파싸움을 일삼으며 안일하게 살아온 썩은 선비들은 왜구가 침입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나라 걱정에 앞서 식솔을 거느리고 줄행랑치기에 바빴다.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
는 어처구니없는 구호를 들고 부산포에 상륙한 왜구는 단걸음에 동래성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그중 일군의 왜병들이 안동 제비원을 막 지나칠 무렵이었다.
요란한 말발굽소리에 먼지를 날리며 질풍같이 달리던 말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왜장이 놀라 말의 엉덩이를 후렸으나 말은 몸만 꿈틀할 뿐 움직이질 않았다.
다른 말들도 말굽이 떨어지지 않는 듯 버둥대기만 했다.
수십 명의 장졸들이 채찍을 휘둘러보고 내려서 말고삐를 잡아당겨 보기도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잘 달리던 말들이 갑자기 움직이질 않다니 왜군들은 기가 막혔다.
"여봐라, 말들이 왜 움직이지 않는지 아는 자가 없느냐?"
왜장은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왜졸들은 연신 땀을 흘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건 필시 조선 놈들이 쓴 마술의 장난일 것이다.
너희들은 주변을 샅샅이 뒤져서 생쥐 한마리라도 남기지 말고 잡아오너라."
왜군들은 숲 속을 이 잡듯 뒤졌으나 언덕 위 푸른 숲 사이로 암자 하나가 보일 뿐 주위는 고요했다.
왜장은 곧 부하들을 이끌고 암자로 올라갔다.
밝은 단청에 퇴색한 작은 절이었으나 경내는 조촐하고 깨끗했다.
법당안에 있든 스님을 끌고 나온 왜장은
"네 이놈, 바른대로 말하거라."
"허허, 장수의 말버릇이 너무 무례 하구려"
"뭣이라구? 감히 조선을 평정하러온 일본군 장수보고 무례하다니‥‥
너는 어찌하여 우리 군사를 못 가게 방해했느냐?"
온화한 스님의 미소에 왜장은 그만 기가 질렸다.
"숨기지 말고 어서 마술을 풀어 말을 움직이게 해라.
만약 명을 거역하면, 당장 네 목을 칠 것이다."
스님은 이번에도 역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칼을 거두시오."
"그래 마술을 풀겠단 말이냐?"
스님이 말을 시작하자 왜장은 기고만장했다.
"마술이라니? 그런 거짓 술수는 섬나라에나 있을까 우리 조선에는 없소. 내 모르긴 모르되 지금 그대의 군사들이 요지부동 한 것은 필시 부처님의 뜻일 것이오.
살생을 금하는 부처님께서 그대들의 이유 없는 살생을 막기 위해 그 뜻을 넌지시 시현하신 듯하니 어서 병마를 거둬 돌아가시오."
왜장은 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 미친 듯 길길이 뛰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칼로 생업 하는 자, 그 칼이 자기 목을 칠 것이오. 내 부처님 뜻에 필히 살생을 원치 않으므로 그대 목숨 상할 것이 걱정되어 이르노니 어서 마음을 돌리시오."
왜장은 마치 포효하는 맹수처럼 이빨을 내놓고 으르렁 거렸다.
"네 이놈, 내 지금 당장 네 목을 베고 싶으나, 그 부처의 목을 베기 전에 칼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참는 것이니
목을 길게 늘이고 순서를 기다려라."
이때 왜졸들이 달려왔다.
"대장님, 저기 산마루에 돌부처가 있습니다."
"돌부처가? 가자. 너희들은 저놈을 끌고 따라와라
내 단칼에 그 돌부처의 목을 칠 것이니라."
왜장은 돌부처 앞에 싫다
"이 돌덩이가 마술을 부린다 말이지?"
왜장은 돌부처에서 서너 걸음 물러서서 호흡을 가다듬더니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기압소리와 함께 미륵불의 목이 동강나 땅바닥에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통쾌하게 웃던 왜장은 갑자기 낯이 파랗게 질했다.
돌부처의 잘린 목에서 선혈이 솟구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일면서 천둥 번개가 치니 사람은 울부짖고 말은 날뛰었다.
왜졸들은 손으로 감싸고 땅바닥을 기었다.
당황한 왜장은 황급히 명을 내렸다
"저 스님을 풀어줘라. 어서."
그러나 왜장은 끝내 벼락을 맞고 쓰러졌으며 왜병들은 산산히 흩어졌다.
이때 기회를 엿보던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왜적을 물리쳤다.
그날 그 스님이 누구였으며, 왜장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경북 안동 제비원에는 선혈의 자욱이 있는 목 잘린 돌부처가 풍운의 역사를 지닌 채 지금도 서 있다.
<韓國寺刹史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