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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8: 39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 - 요 18: 40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8. 십자가에 못 박도록 예수를 넘겨주다 ( 18: 39 – 40 )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요 18: 39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 -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
38절에서 빌라도는 예수께 무죄를 확인했으면 자신의 판결대로 유대인의 동의를 물을 것도 없이 무조건 석방했어야 옳았다. 이것은 엄연한 빌라도의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이 질문을 던짐을 물론 예수를 놓아주려고 한 의도는 엿보이나 이 질문은 유대인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무조건 죽이려고 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1]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빌라도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심문하기는 하였지만, 재판장으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유기(遺棄)하였다. 그는 자신이 말한바 예수의 무죄를 확인하였으므로(38절) 유대인들의 동의를 물을 것도 없이 예수를 석방했어야 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의 동의를 얻고자 함으로써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을 드러냈다. 아마 그는 자기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의 지도자들이 고소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자기의 판단대로 밀고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시켜 주는 전례를 따라 예수를 풀어주고자 했다. 한 사람을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한 자들이 유대인들로 기록되어 있다.
* 막 15: 8 -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요한은 자세한 대화를 기록하기보다는 빌라도의 말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유대인들의 요청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석방해주는 관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미쉬나의 암시 외에 자료의 불충분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예수 당시에 그런 관습이 적용되고 있었던 사실만큼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아마 그 전례는 로마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에 대한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유화(有和)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2]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빌라도는 예수를 가리켜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한다.
혹자는 빌라도가 이 명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 그가 예수를 위해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L. Morris).
그러나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굳이 표현으로써 유대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자 한 것 같지는 않다. 아마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고소했던 내용 중 하나인 '유대인의 왕'이란 표현을 단순히 반복한 것 같다.
다음 장(19장)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함을 두 번 더 말한다(19: 4, 6).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요 18: 40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
빌라도는 무죄인 예수를 살인과 반란의 음모자 바라바(마 27: 20)를 놓아준다는 제의로 로마 당국자로 책임을 진 사람으로 그 책임을 회피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대중들의 동요를 두려워하여 또 인심을 얻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넘겨주었다.
1]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 대신 강도 바라바를 사면해 주라고 요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강도보다 못한 악인으로 취급하였다.
'강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스테스'(*)는 당시에 '게릴라'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C. K. Barrett).
바라바라는 반로마적 혁명 운동을 주도했던 정치범이었을 것이다.
* 막 15: 7 -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 눅 23: 19 –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유대인들은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 왕 즉 정치법으로 고소한 반면 진짜 정치범은 놓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전혀 일관성도 없이 다만 예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메시야를 죽이려고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2] 바라바를 선택한 무리들
빌라도는 피고로 자신의 재판석에 서 있는 예수란 청년에 대하여 가부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예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마음으로 결정을 내린 빌라도는 이제 예수를 살려 보려는 최종적인 시도를 꾀했다.
유대인의 민족적인 절기인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별사면하는 관례가 있었다. 빌라도는 이 같은 관례를 이용하여 옥에 갇혀 있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인 바라바를 등장시켜 예수와 바라바 이 두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석방시키는 것이 좋을 것인가를 묻는다면 그들은 필연 바라바는 재판의 결과대로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수를 놓아주라고 외쳐 댈 줄로 알았다.
(1) 유대인들이 찾은 두 가지 죄
유대인들은 예수를 붙잡았지만 그에게 적용시킬 죄명이 분명치 못했다. 적어도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내려면 그에 해당되는 죄목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낸 죄라고는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든 자들을 고쳐 주었다는 구실이었다.
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 안식일을 범한 죄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일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가 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그들의 규례에 얽매어 외식적으로 지켜 왔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도록 안식일을 지키셨다.
②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성 모독하는 죄가 된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셨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다.
* 요 10: 30-33 –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님을 결박하여 잡아 온 유대인들은 그들의 재판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댔지만 서로 합하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었던 차에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다시 묻게 되었다.
* 막 14: 61 -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간의 침묵을 깨치고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하셨다. (눅 14: 62)
이 같은 말씀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외쳐댔다.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막 14: 63-64)
이때 유대인의 무리들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했다고 했다(막 14: 64).
(2) 바라바냐? 예수냐?
사형선고를 앞에 놓고 빌라도는 심한 고민에 빠졌다. 이 예수는 유대인의 무고에 의하여 희생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최종적으로 할 수 있었던 양심적인 그의 행동은 유월절이면 전례에 의하여 옥에서 내보내 는 사례를 이용하여 이 의로운 청년을 석방시켜 줄 것을 생각해 냈다.
① 빌라도는 군중들 앞에 나와서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랴”고 물었다.
빌라도는 그 전에 “내가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바라바는 강도로 붙잡혀 이미 십자가의 사형선고를 받은 기결수였다. 그러나 빌라도의 생각은 적중하지를 못했다. 유대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40절)
② 이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을 응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는 선한 사람들의 손만을 쓰시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악인을 통해서 그의 일을 성취하신다.
* 잠 16: 4 -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미 모든 인류 구원의 시나리오는 작정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양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으셨다.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빌라도까지라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속죄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연기를 연출해야 했다.
③ 바라바를 선택하게 하신 일은 그들의 완악함을 드러내 놓으신 일이다.
하나님은 완악한 자를 악한 일에 사용하실 뿐 아니라 아무 일에나 절대로 불의하심이 없으시다.
그들이 불의를 저지른 일에 쓰임 받은 일은 그들 스스로가 불의해서이며 그들이 그 일을 좋아하여 그들 자신이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제외된 무리임에 틀림이 없다.
④ 우리는 바라바를 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선택을 잘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택하느냐? 바라바를 택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난다. 바라바란 존재는 십자가 위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들의 육신적인 죄악들을 말한다.
* 갈 5: 24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들의 몸 안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죽이려는 강도같은 바라바가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택해 줄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는 내 안에서 살아야 한다.
* 롬 6: 6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갈 2: 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유대인들은 생명의 주를 버리고 강도인 바라바를 선택함으로 그들의 생애에 천추의 한을 남겼다. 우리는 언제나 육신의 사람 바라바를 버리고 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택하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무지한 열심은 위험하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고자 하는 데 있어서 열심이 있었다. 그들은 새벽부터 모여 예수님을 정죄하였다.
사람이 열심히 산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그 뜻에 일치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한 열심을 버리고 바른 지식과 지식 있는 열심을 소원해야 한다.
둘째, 타락한 종교인은 불신자보다 더 나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유대 지도자들은 이방인 빌라도보다 더 나빴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알았다.
사형은 큰 죄를 범한 자에게 내려져야 한다. 종교적인 죄 때문에 사형이 필요한 경우도, 먼저 그 죄를 확증해야 할 것이다. 어떤 재판에서든지 죄의 명확한 증거가 없이 사람을 정죄하는 일은 옳지 않다. 도덕성 없는 경건의 모양은 위선에 불과하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의 왕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의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
성경은 그 나라의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도덕적인 나라이다. 그 나라의 행동 지침은 의와 사랑이며 그 나라의 특징은 평안이다.
신약교회는 이 나라의 부분적 성취이다. 그 나라는 장차 주 예수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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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이라는 아름다운 공간에 행복을 담아 나의 인연 모든 분에게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미소와 함께 전해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 하십시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