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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비밀
딤전 3:14-16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딤전 3:14-16 / [심오한 진리] 속히 그대를 만나러 갈 계획을 세워 놓고서도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15) 만일 내가 곧 그곳으로 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어떤 사람을 직분에 맡게 선택할 것인가를 그대에게 알려 주고자 해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의 터전이며 또 그 진리를 높이 선양해야 하는 곳입니다. 16)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해답은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성령께서 그분의 흠없고 순결함을 입증하셨으며 천사들에게 섬김을 받으셨고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분을 믿게 되었고 다시 하늘의 영광에 싸여 승천하셨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책임 맡은 디모데에게 목회자로서 가져야 할 올바른 교회관과 경건의 비밀과 복음의 핵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14) 바울은 로마 1차 투옥(61-63년경)에서 풀려나 마케도니아 지방을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에베소에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처할 필요성을 느끼고 디모데를 그곳에 남아 있게 하였습니다. 그 후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 속히 볼일을 마치고 에베소로 돌아가려고 하였지만 지체되자 우선 편지를 보내 목회상 중요한 사항들을 알게 하였습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15) 본문에는 바울의 교회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교회관은 ‘하나님의 집’으로써의 교회입니다. 집은 건물이나 그 집에서 사는 가족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가족으로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둘째, 바울이 제시한 교회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하나님을 ‘너희 중에 계신 하나님’(신 6:15)으로 표현하였고, 여호수아는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수 3:10)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의 핵심입니다. 셋째, 바울의 교회관은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진리란 일반적인 사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기독교에서만 발견되는 구원의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요 1:14, 15; 14:16). 터와 기둥은 ‘굳건하다’, ‘견고하게 하다’는 뜻으로 건물을 견고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교회는 이단이나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의 공격으로부터 성도가 흔들리지 않도록 확고하게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기둥처럼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내세우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16) 바울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낸 바 되셨고 영으로 의롭다함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승천하셨다고 하며 경건의 비밀을 감격적으로 선포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이것은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 물질을 만든 신은 최저의 신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 영지주의를 배격하는 바울의 확고한 고백입니다.
적용: 당신에게 교회와 경건생활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된다는 것을 믿음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진 진리는 예수입니다. 그분이 누구신가와 행하신 일과 여전히 하고 계신 일에 대한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 설 교 >
그리스도인과 적그리스도
딤전 3:10 / 최병남 목사
이단의 일반에 대해서 잠시 소개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1. 이단의 특징
여러분! 이 이단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부인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2) 교주가 있고 교주를 신격화 한다.
그리고 교주를 신격화 합니다. 그 교주가 바로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 박태선이란 사람도 처음에는 좋게 시작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3) 성도들을 유혹한다.
지금도 부천에 가게 되면 거기에 그 시온 성도들이 말하는 박태선의 추종자들이 모이는 시온성이 있습니다. 밖에도 사람들이 경비가 그곳을 지키면서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도록 얼마 전에 그곳에 부흥회 가서 들으니 그곳에 남자들은 출입을 못하고 여자들은 출입을 시킨다고 그럽니다.
4) 특별한 매력도 있다.
그리고 우리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 다음 예수를 증거합니다. 왜 사람들이 이단을 쫓아가냐 하면 어떤 부분에서 아주 매력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5) 교주들이 10대에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또 그 교우들을 보면 공통적인 것은 쉽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의 문선명도 15세에 계시를 받았다고 하고 몰몬교의 러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게 10대에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6) 성경 외에 다른 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 이단들은 보통 자신이 갖는 성경이 있습니다. 몰몬교 같으면 몰몬경이 있고 통일교 같으면 원리강론이 있고 또 여호와의 증인 같으면 세기번역성경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이단의 교리적 특징
1) 성경을 가감한다.
그런데 이단이 그 교리적으로 크게 다른 경우는 첫째는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가감합니다. 어떤 것은 붙잉고 어떤 것은 떼버리고 그러니까 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단에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또 이단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 권위와 성경말씀이 영감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성경 말씀을 인정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성령으로 감동해서 기록했다고 하는 이 말씀은 천지가 변해도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2) 계속적인 계시를 주장한다.
그리고 그 교주가 계속해서 하나님과 직통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교주가 직접 계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그렇습니다. 이 교황이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이 직접 하나님과 더불어 직접 계시를 받아서 교황이 말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보다 교황의 말에 더 권위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 북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어느 기록을 읽어보니까 탈북자가 탈북했다가 다시 체포되어서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감옥에 앉았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감옥 안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렸습니다. 크게 틀어놨는데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그래서 깜짝 놀라서 북한 감옥에서 어떻게 찬송가가 나오나 그래서 가만히 들어보니 다른 건 다 똑같은데 메마른 내 영혼에 성령의 단비를 부어달라고 성령을 김정일의 이름을 넣더라는 것입니다. 북한도 하나의 종교입니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하나의 교주입니다. 교주 그 어떤 공산주의 정치사상을 다 뛰어 넘어서 하나의 교주입니다. 그 종교 집단이 그래서 이 교주를 신격화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제한하거나 무시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가 아니라 그 교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서 교주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지배하고 그 교주가 신이 되고 그 교주가 구원자인 것처럼 그래서 조금 전에도 동영상을 보셨지만 그 안에 들어와야 과천 안에 들어와야 구원받는다, 14만 4천이 들어와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박태선도 그렇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성경과는 완전히 차이가 나는 그런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4)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자기들이 잘못된 교리를 만들어 가지고 이단 교리의 특징은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일단 거기에 들어가면 강압적인 수단을 써서 혈연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끊어버립니다. 오로지 거기에 충성하게 만들고야 맙니다. 그래서 이단이 이렇게 생기면서 아무하고나 같이 살고 이래서 도덕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는 그런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또 반사회적입니다. 이 사회에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모여서 독특한 사회를 이룩하고 자기들만이 구원받는다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에 있는데 이단 종파가 거기에서 전부 자살을 했습니다. 그 건물을 누가 사겠습니까? 아무도 안삽니다. 그래서 우리 친구 목사가 그 건물을 사서 한인교회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서 하룻밤을 잔 기억이 있습니다.
5) 현실도피적 신비주의다.
여러분! 이단들이 이와 같이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이고 그러면서 거기에 특별한 어떤 세속을 기피하는 신비주의가 있습니다. 어떤 불이 내려온다, 뭐 죽은 자를 살렸다. 그런 우리 보통사람들이 들을 때 현혹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주로 교인들을 전도합니다. 그래서 왜 신천지를 오늘 이 귀한 시간에 여러분에게 방영하느냐 하면 신천지가 지금 전국적으로 난리입니다. 교회마다 지금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는 신천지 사람들 나가라고 하니까 700명이 일어나서 나갔단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이단에 대한 대책
1) 서로 사랑하라
어떻게 하면 이단을 방지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사랑해야 하고 또 가정교회에서도 사랑해야 하고 교우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족장님들이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곳에 끌려간 사람들이 사람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규모가 큰 교회는 아무래도 따뜻한 사랑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이단들이 들어가면 접근해서 얼마나 살뜰하게 알뜰하게 살펴주는지 모릅니다. 성도들이 그 사랑에 넘어간단 말입니다.
2) 성경공부를 교회에서 체계적으로 하라.
또 그런 곳에 가면 말씀을 전하는 것도 평소에 수 십년을 신앙생활을 했어도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그런 해석을 하고 그런 말을 하면 한참 멋있어 보입니다. 참 멋져 보입니다. 아주 은혜가 많은 것 같고 신령한 것 같고 들어보니 아주 합리적이고 그럴듯하고 그런 것을 여러분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단을 방지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을 체계적으로 성경공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는 1년짜리 SCM이 있고 기타 부수적인 것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다 참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아야 내 머리 속에 들은 것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단이 들어올 때 말씀으로 그것을 물리칠 수 있지, 예수 믿어도 그저 교회만 왔다갔다 하면 속이 텅 비어서 이단이 말하면 답변할 자료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쉽게 해석하는 성경 프로그램을 다 참석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어디서 "여기 참 성경공부 잘 가르치는 곳이 있어요. 정말로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우리 교회 최목사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러면서 유혹하는 곳에는 절대 가면 안됩니다. 이단의 특징은 기성 교회와 기성 교회 목사들을 아주 심하게 공격하고 비판합니다. 그것이 이단의 특징입니다. 누가 벌써 기성교회나 기성교회의 목사님에 대해서 비판을 하면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교회에 다른 성경공부에 가면 절대로 안됩니다. 성경공부는 꼭 교회 안에서만 해야 됩니다. 교회 안에서 왜 아멘을 안합니까? "뭐 어디 가니까 굉장하더라 뭐 얼마나 은혜가 많은지 난 평생에 신앙생활 했어도 그런 은혜로운 설교 못들어 봤어. 어디 가니까 앉은뱅이가 눈앞에서 벌떡 벌떡 일어나. 너 가봐, 너 병 있잖아."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말세에는 하늘에서 불도 떨어지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적과 기사,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건 불교에서도 합니다. 불교에서도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무조건 다른 데 가보자는 곳에 가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직 어느 교회만 가야 된다고요? 꼭 중앙교회만 가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데 가면 안됩니다. 뭐 여러분들에게 와서 어디서 "외국에서 굉장한 목사님이 오셨는데요, 불의의 사정으로" 뭐 그런 말을 들으면 안됩니다. 오로지 교회에 나와서 말씀 듣고 교회에 나와서 성경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도 라디오에서도 설교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도 가끔 들어보면 독이 있는 설교들이 있습니다. 말씀이 아닌 그런 것 여러분들 너무 선호하지 말고 여러분들 비록 부족하고 마음에 안들어도 제 설교만 들으십시오. 틀림없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이단하고 사이비 기독교에서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문에 들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상대하면 안됩니다. 왜 같이 사귀다 보면 내 생각해서 꼭 한번 꼭 가봐 그러면 가게 되고 맙니다. 그 사람은 일단 들어가면 나오게 되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긴 말씀 드리지 않습니다.
3)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라
또,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신천지뿐만 아니라 이 대전에는 전국에서 이 사이비 기독교와 이단과 미신이 제일 많은 도시입니다. 대전에 교회가 몇 개인 줄 아십니까? 1850개입니다. 전국에서 이 인구비율로 교회가 제일 많습니다. 지금도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교회 좀 그만 짓고 이렇게 많은데 왜 자꾸 하나 그렇게 하나 이렇게 말하는 분 계실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교회는 계속 생겨나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단에 넘어가지 아니하도록 여러분들에게 벌써 이상한 말을 한다거나 어디 데려가려고 한다면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증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맨 처음 들어보면 우리와 거의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거의 모릅니다. 가서 들어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통 한 1년쯤 있으면 그때 본체가 서서히 들어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제일 좋은 방법은 무조건 딴 데 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이단들은 논쟁을 좋아하거든요, 성경 구절을 가지고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논쟁하려 하지 말고 무조건 이단은 만나지 말고 같이 하지 말고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제일 안전한 방법입니다.
보상이 약속된 직분
딤전 3:11-13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5월 첫 주일에 있을 항존직 직분자 선출을 위한 말씀을 연속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3장에서 처음에는 감독 즉 장로의 직분에 대해서, 지난주는 집사의 직분에 대해서 살폈고, 오늘 우리는 권사의 직분에 대해서 살피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살핀 것은 직분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 강조점은 해당 직분자의 자격을 중심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권사의 직분에 대해서 말씀드릴 순서입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권사라는 칭호는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1절은 남자 집사에 준하는 여자 권사의 직분에 적용시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11절)
이 여자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여자들을 집사의 아내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타당한 것 같지 않습니다. 집사가 되는데 아내의 자격까지 논한다면 마땅히 장로(감독)가 되는 데도 그 규정을 두어야 공정합니다. 그러나 감독의 자격을 논할 때는 그 아내가 어떠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는 것을 볼 때 이 여자들이 집사의 아내를 의미한다는 것은 큰 설득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문장의 구조를 살펴볼 때 감독과 집사에 준하는 또 하나의 독립된 직분을 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라고 시작하는 8절이나 “여자들도 이와 같이”라고 하는 11절의 구조는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 “여자들도”라고 하는 대신에 왜 “여 집사”나 “권사”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됩니다. 그것은 아마 디모데 전서를 기록할 당시까지 권사는 그만두고 “여 집사”라는 칭호가 쓰이지 않았거나 혹 일부 교회에서 사용되어도 보편화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는 남자 집사에 상응하는 여자들의 봉사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여자들”은 집사의 아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 내의 일반적인 여자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전서라는 편지가 쓰일 때까지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여자들을 가리키는 확정된 명칭이 없었기에 그것을 남자 안수집사에 준하는 여 집사로 부르든지 아니면 우리 한국교회처럼 권사로 부르든지 하는 것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11절을 가지고 권사의 직분, 그 자격을 살피려고 합니다. 어쨌거나 교회 내의 여자들 가운데 직분을 맡아서 수고할 사람들은 마땅히 소정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우선 놀라운 것은 남자 집사의 자격에 비해서 조금도 모자라거나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장로의 자격이나 집사의 자격이 그 수준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살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과는 다르게 결코 권위적 계급 구조를 가진 단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은 결코 계급식 직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은사와 소명이 다르기에 직책이 다른 것이지 직책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장로, 집사, 권사에 대한 자격 기준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신앙인으로 직책으로 사람 사이의 우열을 가리지 않습니다. 비단 교회 조직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은 모든 조직에서도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일반 사원이나 과장이나 부장이라도 아니면 사장, 회장이라도 마찬가지지만 직책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풍조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고유한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학벌이나 능력이나 지위를 사람의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그가 누구며 무엇이냐를 떠나서 존중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우열을 논하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은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남녀의 우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르게 창조되었고 다른 일을 더 잘하도록 각각 지음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 곳에는 남녀의 평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성의 차이가 인간 차별을 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동일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데 남 집사나 여 권사가 그 자격기준이 서로 다르지 아니합니다. 8절과 11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고”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고 절제하며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비록 개역개정판은 헬라어 같은 단어를 가지고 남자 집사의 경우는 “정중하고” 여자의 경우는 “정숙하고”라고 달리 번역을 했지만 남녀를 막론하고, 집사이든 권사이든 막론하고 개역성경은 우선 꼭 같은 단어, “단정하고”라는 기준을 맨 먼저 말합니다.
어떤 단어로 번역되었든지 헬라어의 본래 의미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공통분모입니다. 다만 어떻게 해야 존경을 받느냐는 구체적인 항목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기질이나 삶의 자리에 따라서 좀 다르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존경받을 만한 여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먼저 “모함하지 말며”라고 규정합니다. 남자 집사인 경우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며”였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두 경우 공통점은 말에 관한 규정이라는 것입니다. 남녀 불문하고 직함에 상관없이 사람이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언어생활에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말이 신뢰할 만해야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면 왜 남자보고는 “일구이언을 하지 말며”라고 하는 반면 여자보고는 “모함하지 말며”라고 합니까? 일구이언에 대해서는 지난주일 상세히 설명했기에 그만두고 “모함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남을 헐뜯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나쁜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하필 여자에게 “모함하지 말며”라고 했을까요? 남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업 상(?) 일구이언할 위험이 큰 반면 여자는 그 기질 상 남을 헐뜯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할 위험이 커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자와 여자 중에서 대체로 누가 말을 더 많이 하고 잘합니까? 십년수도를 하고 방금 하산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여자가 더 말을 잘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결혼해서 10년, 20년 살고 나서도 말로 여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는 대단한 남자입니다. 그런 남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받을 만합니다. 말에 관한한 여자가 탁월합니다.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생활 몇 년 해보면 이웃사람 만나서 외국어로 수다 하는 것도 남자보다 여자가 탁월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나 장점 그것이 바로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왕자 압살롬의 머리털을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에는 이스라엘 처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든 왕자 압살롬의 등록상표였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그의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걸림으로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말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말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경받을 권사의 자격 가운데 첫째 살펴야 할 기준은 “모함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에 세워야 하는 존경받을 만한 권사는 무엇보다 남을 헐뜯고 비난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존경받기 위해서는 남자든 여자든 할 말 안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들었다고 돌아서서 바로 옮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안다고 해서 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구별을 해야 합니다. 그 어떤 면보다 이 면에서 신뢰할만한 사람이어야 집사든 권사든 맡아야 합니다.
특히 존경할만한 권사는 말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반창고 붙이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말로서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참여할 일들이 많습니다. 위해서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위해서 전도하는 일도 모두 말로서 섬기는 일입니다.
다만 남을 모함하거나 헐뜯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합니다. 어쩌면 ‘권사’라는 명칭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직분을 맡은 사람은 봉사의 일을 해야 하고, 일할 수 없는 사람은 휴무를 해야 옳습니다. 권사는 손자를 보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권사의 직분을 교회가 주는 것은 공동체와 구역 내의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권사의 연령기준이 이전에 50세에서 45세로 낮추어진 것을 아직도 잘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그 어느 것도 명예직이 아닙니다. 모두 봉사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일할 기력이 있고 여건이 될 때 직분을 맡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권사의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무 수행을 할 수 있고 하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너는 교회 오래 다녔는데 아직 권사도 못 되었냐?”하는 핀잔 방어용 직책은 아닙니다.
두 번째로 존경받은 만한 여 성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절제하며”라고 설명합니다. 남자인 경우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며”라는 자리에 여자에게는 “절제하며”라고 합니다. 남자인 경우는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는 반면 여자인 경우는 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절제하며”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밝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절제해야 하는지 구체적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자의 경우 술 문제와 관련한 자리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둡시다.
우선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에 “절제운동”하면 잊히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주축이 되어서 절제운동을 벌렸습니다. 그 주요항목이 금주금연 운동이요 외채상환 운동, 물산(국산품) 장려운동입니다.
아마 육십 대를 넘은 분들은 어릴 때 여름성경학교 때 금주금연가를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술 하면 남자들만 조심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술만 문제가 아니라 담배도 문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중독성 오락이나 취미생활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절제하며”라고 여성들에게 말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여성 전용 카페가 등장한 지 오래 되었고 호텔 로비에 가면 담배 피우는 여성들이 오히려 많은 느낌도 듭니다.
그러므로 절제하고 조심하는 일에도 가히 남녀평등 시대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특히 여 성도들 가운데 새잡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화투로 Q. T. 하는 분들이 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분들이 우리 교회 권사 후보에도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합니다.
하여간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통제해야지 다른 어떤 것이 우리를 통제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생활 훈련이 되신 분들이 선택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주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고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뛰고 있는 분들을 골라도 후보군 259명 가운데 오십 명은 넘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존경받을 만한 여성도가 되기 위해서 세 번째 요건은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이 항목에서도 남자에 비해서 예리한 지적이 없습니다. 남자의 경우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충성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하겠습니다만 우선 남자 집사와 평행을 이루는 측면을 먼저 고찰해 봅시다.
여자 성도에게 기대할 경제적인 측면에서 충성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잘 생각해보면 남자가 부정직한 수입을 탐하는 일은 여자와 전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 남편의 사회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아내가 끼친다는 것은 누구는 인정할 것입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월급을 생각하지 않고 지출을 한다면 남편은 그 적자를 매우기 위해 무슨 돈이든지 호주머니에 넣을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가정의 살림 사는 일을 맡아 있는 여자 성도들은 경제운용에 있어서 성실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외국을 다녀 본 사람들이나 살아본 사람들이 지적을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우리 씀씀이가 너무 헤프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아끼지를 않습니다. 청소년 수련장에 수련회 끝나면 옷가지며 신발이며 시계며 찾아가지 않는 물건이 지천입니다.
어디 수련장뿐이겠습니까? 형편은 초등학교 중학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잊어버리고 왔다고 회초리 드는 부모가 요새는 실종되었습니다. 이렇게 생활훈련이 되어서는 세계를 상대로 앞서갈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부모가, 특히 어머니가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자 성도들의 성실한 삶의 자세는 매우 귀중합니다. 사실 아이들은 보고 배웁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의 삶의 자세가 아이들의 삶의 지표가 됩니다.
남자 집사, 여자 권사 할 것 없이 공동체의 직분을 맡아 섬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삶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비록 여자들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규정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영적인 자격이나 가정적인 자격이 무시되어도 좋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성급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만 영적인, 신앙적인 자격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앞에서 언급되었기에 중복을 피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그 정도는 상상력이 있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여자들도”라는 표현 속에는 여자들도 역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라”는 규정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서 우리의 양심이 새로워지고 거기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해야 함을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권사의 직분 역시 신앙공동체의 직분이므로 믿음의 비밀을 맛본 사람이 맡아야 함은 너무 당연합니다. 믿음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 믿음의 권속들을 돌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이 여자들도”라는 표현 속에는 남자 집사에게 물었던 가정적인 규정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대신 “한 남편의 아내가 되며”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 남편의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의미합니까? 조금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은 너그러워야 한다면 여성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사람이 좋은 아내입니다. 모든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기대하는 것은 맛있는 식탁일 것입니다. 거기서 가정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새날을 위한 재충전이 되어야 합니다.
아내가 자기보다 말을 잘하는 것을 우리 남편들은 인정하지만 아내 혼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의외로 적습니다. 일방적인 선전보다 대화를 사람들은 누구나 선호합니다.
단둘이서 있을 때나 남들 앞에서나 남편을 인정하고 세워주십시오. 중요한 집안 일에는 남편의 결정을 따르는 아내가 아름답습니다. 남편에게 할 말이 있거나 따질 일이 있을 때에 남편의 기분을 참작하십시오.
또한 남자들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남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가?”라는 책을 읽고 남편 연구를 좀 하십시오. 서로를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책으로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추천합니다.
이제 장로, 집사, 권사, 이 세 가지 직분자의 자격을 살펴보는 설교의 마지막 결론으로 13절을 살펴봅시다.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형식은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에 대한 보상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이것 역시 모든 직분자들을 향해서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감독 즉 장로의 직분을 잘 한 자들도, 그리고 권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도 기대할 수 있는 복된 약속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읽어도 무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두 가지 영역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약속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선 “아름다운 지위”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는 말은 오해되기 쉽습니다. 마치 안수 집사로서 직분을 잘 감당하면 더 아름다운 지위인 감독, 장로의 직분을 얻는다는 말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구절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교권체계가 갖추어진 후부터 이런 잘못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 말은 바른 의미는 직분을 잘 감당한 사람들은 그 직분에 어울리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집사의 직분에 뽑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직분에 충성하면 모든 성도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말하자면 장로라도 다 같은 장로가 아닙니다. 집사라고 다 같은 집사가 아닙니다. 권사라고 다 같은 권사로 성도들이 인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로부터 존경받는 직분자는 따로 있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의 지도를 받기를 원하고 문제를 함께 나누고 함께 기도를 드리고 싶은 장로, 집사, 권사는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보에 이름이 나란히 기재된다고 꼭 같은 직분자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람에 이름이 나란히 기재되어 있고 꼭 같은 크기의 사진이 실렸다고 성도들이 동일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13절에 나오는 아름다운 지위라는 말은 직분을 잘 감당하면 우선 땅 위에서 성도들로부터 그 직분에 어울리는 존경과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의 약속은 무슨 의미입니까?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본래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에게 직분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직분을 잘 감당하므로 받게 되는 축복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믿음의 비밀을 맛본 정도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믿음의 담력에 관해서 약속합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행사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믿음이 있는 자가 직분을 맡습니다. 그러나 직분을 잘 감당하게 되면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는다는 것은 믿음의 비밀을 소유한 정도가 아니라 믿음의 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믿음의 큰 담력을 가진 분들은 그 행사가 다릅니다. 신앙생활에 활기가 넘칩니다. 겨우 주일 한 번 나오는 예배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일 주 일 세 번 공적 예배뿐만 아니라 매일 기도의 자리를 사모합니다. 무슨 사역을 해도 열매가 있습니다.
특히 여기 “담력”이라는 말은 성령 충만과 관련해서 신약에는 자주 나옵니다. 마음속에서 넘치는 확신 가운데 자유롭게 터져 나오는 말을 일차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를 해도 틀립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힘이 있습니다. 폭포수와 같습니다. 많은 물소리와 같이 힘이 넘칩니다.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전도를 해도 다릅니다. 듣는 사람이 감화를 받습니다. “아줌마 이야기는 다르네요”라고 듣는 사람이 그 힘 있는 증거에 감동을 받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도 제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라고 다 같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다고 다 같지는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분자들에게 허락하신 약속은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주님을 따르면 한 날 여러분도 이와 같이 귀한 직분을 받게 될 것이고 직분을 잘 감당한 자에게 약속하신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몸된 교회에서 직분자로 세움을 입는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집사나 장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일은 신중히 처리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기준을 살펴보면서 한 사람씩 세워나갈 때 교회가 주님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권사, 어떤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까? 먼저 그 삶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존경받습니까? 첫째 언어생활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대신 격려하고 칭찬하고 세워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모든 삶에 절제가 되어야 합니다. 연속극 보다 성경 묵상을 매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존경받기 위해서 세 번째로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합니다. 근검절약하며 남편을 더러운 이익을 탐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권사, 어떤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까?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서 사죄함을 경험한 자이야 합니다. 믿음의 비밀을 간직했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탁월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백성을 돌보고 격려하고 권면하는 직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권사, 어떤 사람이 선출되어야 합니까? 집안에서 남편과 자식, 그리고 함께하는 식솔들을 잘 돌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오십 명 골라보십시오. 45세에서 65세 안에 드는 분 가운데 그 정도는 충분히 있습니다. 미리 답안을 준비해 오셔서 투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뿐만 아니라 혹 이번에 권사 피택 후보군에 들지 못했다 하더라도 여자 성도로서 여러분도 이 정도 목표를 세우시고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직분자의 축복
딤전 3:13 / 김남수 목사
제직회를 지난 주간에 가졌습니다. 제직이 몇 명인지 아시는지요? 1,388명, 주보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를 고갈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식량의 고갈, 물의 고갈, 자원의 고갈입니다. 이것들이 없다, 모자란다,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양식도 부족하고 물도 부족하고 자원도 부족하고 이런 수많은 부족을 느끼며 삽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부족은 인물의 빈곤입니다. 교회도 기둥처럼 무거운 짐을 지는 인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꾼, 훌륭한 사역자 또 귀한 제직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많은데 쓸 사람은 적기 때문에 인물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참 귀한 일꾼, 좋은 일꾼, 기둥 같은 일꾼들이 교회에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집사, 장로, 권사, 교역자, 목사, 전도사 이런 직분을 주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며 하나님의 일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제직들이 임명되고 임직되어 새 회기를 시작하면서 저희들은 다시 한 번 제직이 무엇을 하는 것이며 어떤 qualification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아울러 제직을 잘 감당하면 어떤 축복을 받는가 하는 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물론 이 제목이 평범하고 우리가 다 아는 것이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재확인하고 확실하게 분명하게 우리 스스로를 검토하고 분석해 보면서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선 제직의 qualification, 자격입니다. 집사, 장로, 교역자의 자격이 물론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몇 가지가 있는데, 이 네댓 가지의 기본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집사라는 직분을 받지 않고 그냥 신앙생활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잘 들으시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직분자가 되는구나 하는 것도 깨닫고 그렇게 봉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래 사역장로님들, 교구장님들이 교구에서 선정해서 교회에 추천을 합니다. 그러면 행정장로님들과 담임목사가 심사를 하고 filtering process를 거쳐서 교회가 저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참 존귀한 것입니다. 목사가 세우는 것도 아니고, 장로님이나 교구장님이 세우는 것이 아니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임직되는 직분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서 주신 존귀한 직분인 것입니다. 마치 교회는 세상에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세상의 기관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지만 하늘의 기관이고, 사람이 운영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운영하시고,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머리가 주님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반드시 주님의 기관이고 주님의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하면 주님께서도 저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충성하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친히 보호하시고, 존귀한 직분과 존귀한 책임과 영광스러운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사를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구장님 위해서 집사님이 일한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교회는 땅에 있지만 하늘의 기관이고, 사람이 모였지만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기관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잘못 알면 잘못됩니다. 교회관이 바르고야 교회생활이 바릅니다. 교회관이 바로 서야 교회신앙이 바로 되고, 봉사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의 기관, 사람의 모임, 땅의 기관으로 생각하면, 이 직분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내가 언제 집사하겠다고 그랬습니까? 자기들이 주어놓고 왜 그러느냐고,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언제 내가 달라고 했느냐, 자기들이 주고서, 왜 제직회 안 나오느냐, 제직이 뭐하느냐, 그렇게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Qualification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성도라면 말할 것도 없고, 제직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직분자라면 더 말할 것이 없이, 그 기본이 구원의 확신인 것입니다. 신자의 기본이 구원이므로, 예수 믿기로 고백한 개인의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게 확실해져야 제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는 비슷한 게 많습니다. 첫째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직책을 맡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라고 captain 조장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팀장이고, 유다는 전체 팀의 재정위원장이었습니다. 늘 재정을 맡아서 돈을 관리합니다. 둘 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실수도 잘합니다. 가롯 유다는 오히려 실수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도 실수했고, 베드로는 드러나게 실수했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늘 드러나게 되고, 성격이 조용한 사람은 속으로 실수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늘 화내고, 엉뚱한 대답하고, 난리를 쳐서 혼나기도 하고, 회개도 빨리하고 그래요, 그런데 가롯 유다는 그런 실수는 안 해도 가끔 돈을 훔치고, 떼어먹고, 팔아먹는 그런 실수를 합니다. 주님이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향유를 붓고 주님의 발을 씻었더니, 유다는 화가 나서 그걸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으면 얼마나 유용하게 쓸 수 있었을 텐데 이럴 수 있느냐고 소리 질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나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낭비할 수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두어라. 나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롯 유다가 가난한 사람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취하려는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예수님이 아시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배신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가롯 유다는 한 번밖에 안 했습니다. 그렇지만 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는, 도대체 예수님이 언제 왕으로 오시겠는가 하다가 안 되겠으니까 예수님 팔았는데, 딱 한 번 배반이 큰 실수가 된 것입니다. 유다는 은 30에 팔았고, 베드로는 세 번씩 부인했습니다. 두 사람이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사람은 자살을 하고 회개하지 못하고 영원한 형벌로 빠지게 되고, 한사람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는데도 통곡을 하고 다시 구원을 받고 다시 회복이 되고 다시 사용되어서 위대한 사도로 마침내 순교까지 하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다르냐, 똑같이 제자이고, 똑같이 중직을 맡고, 똑같이 실수하고, 똑같이 배신했는데 뭐가 이 두 사람에게서 다르냐는 것입니다. 한사람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했고, 한사람은 '랍비여, 선생이여, 선생님.'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이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주'라는 표현은 '당신은 나의 인생의 주인이시며, 당신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뜻으로,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랍비'라는 것은 종교적인 지도자라는 말도 되고, 선생이라는 말도 되고, 유명한 분도 되고, 대단한 분이시라는 뜻으로 주관적이지 않은 표현입니다. '주'라는 것은 그 분과 나와의 관계를 말하고, 랍비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선생이라는 말이니, 유익하면 듣고 유익하지 않으면 안 들어도 되는 객관적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르기 때문에 똑같이 실수했지만 마침내 한사람은 회개하고 돌아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고, 한사람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범하고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 '주여'라는 단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통성기도 합시다. 주여 3창 합시다." 그러지요. 사실 주여 3창은 성경에 없습니다. 만세3창은 있었어요. 그래서 만세를 세 번씩 한 습관이 있어서 주여 세 번씩 그러는 것입니다. 주님이 못 들으실까봐 크게 '주여'를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기도하라고 하면 어떤 분은 묵상하고, 또 어떤 분은 망상하고 딴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주여'라는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서울에서는 1창이 늘어서 이제 4창이 되었답니다. 3창은 부족하답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주인이시고, 왕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당신의 종이요, 당신의 피조물이요, 당신의 소유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사람과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같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구원을 받고, 자녀가 되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장경동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니 아주 재미있습니다. 여행 다닐 때 들으면 아주 좋겠습니다. 그 분은 말씀의 은사를 받은 분입니다. 어느 설교를 들어보니 얼마나 재미있던지, 비행기 안에서 듣고 한참 킬킬대고 웃으니까 다른 사람이 나보고 돌았나보다고 그래요. 어떤 예배의 앞자리에 스님이 오셨었답니다. 그래 장목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가서 악수를 하면서, '교회에까지 스님이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하니, '예 제가 TV를 보고 하도 은혜스러워서 목사님 만나보고 싶어 교회로 왔습니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그 스님에게 '그러면 저를 한번 따라 하시지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습니다 이렇게 해보세요' 그러니까, 스님이 '예수님도 믿고, 부처님도 믿습니다, 남무아미타불', 그러더래요. 그래서 '절에 계신 것보다 교회에 오시니 더 좋지요' 그랬더니, '목사님 그렇게 비교하지 마십시오, 하여튼 목사님 재미있게 잘 듣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가셨답니다. 여러분, 주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주여'라는 말은 부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만 믿는 것입니다. 옛날에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처녀에게 혼사가 두 군데 열렸는데, 하나는 아주 똑똑한데 가난한 게 흠이고, 하나는 부자집인데 좀 멍청한 게 흠이었답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여자가 고민을 하다가 시집보내려는 아버지에게, 저는 '잠은 똑똑한 총각에게 가서 동쪽에서 자고, 밥은 서쪽에 가서 먹겠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동가숙 서가식'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은 동가숙 서가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나의 주님이시고, 주님만이 나의 왕이십니다, 오직 당신만이 나를 지으시고, 나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나를 살리시고, 나를 사망과 저주에서 해방시키신 유일하시고 무이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확실한 고백이 '주여'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여'라는 말을 자주 써도 됩니다. 어떤 분은 그릇을 닦다가 깨뜨리거나, 아주 급한 일을 당하면 '에구머니나' 그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버지' 그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어머니' 그러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분제가 생기면 '주여' 그렇게 부릅니다. 자동차 운전하다 위험하면 '주여' 그러면 주님이 천사를 보내서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아버지는 도울 수 없지만, 어머니는 도울 수 없지만, '아이고 아주머니'는 도울 수 없지만, 주님은 도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급하다고 아무 이름이나 부르시지 말고 '주님'을 부르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했으면 구원받은 사람인 줄 믿습니다. 이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나만의 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나만의 구원의 경험이 있을 때 이것을 구원이 확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예화가 세 개가 나오는데, 하나는 잃은 양의 비유, 하나는 드라크마의 비유, 하나는 아들의 비유입니다. 하나는 100개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렸고, 그 다음은 열 개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렸고, 나중에는 두 아들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모두 잃어버렸다가 찾는 얘기입니다. 하나는 양이고, 하나는 드라크마이고, 하나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앞의 두 가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양은 무리에서 떨어져서 헤매다가 숲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으니 목자가 찾아와서 구해주어야 되고, 드라크마도 숨어있으니 주인이 찾아와야 되는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세 번째 비유는 다릅니다. 탕자는 상속을 미리 받아서 부모를 떠나 돈을 다 탕진하고 나서는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남의 돼지 키우는 종으로 들어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허기를 채우고자 하나 그것도 풍족하지 못해 배고픔을 면치 못합니다. 그런데 이 탕자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 하며 집으로 돌아가,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할지라도 품군으로라도 들어가리라 생각하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비유의 말씀인데, 어떤 때는 우리가 낙심하고 곤경에 처해있을 때,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목자 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건져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탕자의 경우처럼 하나님 품으로 예수님께로 스스로 돌아올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품을 떠나 세상길로 들어가서 죄에 찌들고 사망과 저주에 눌려있고 마귀에게 찢기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가서, 이제는 구원 받을 수도 소리 지를 수도 살려 달라고 말할 힘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목자 되신 주님께서 찾아가셔서 거기서 저를 건져주실 뿐만 아니라, 힘이 있을 때는 탕자처럼 자기 스스로 turn back 돌아서서 아버지께 손들고 자존심 버리고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여 이제 이대로 죽습니다. 죽을 수 없어서 돌아갑니다. 아버지 집에는 품군이 많으니 나를 품군이 하나로 받아주소서' 하며 손들고 돌아가니까 아버지가 저를 받아서 잔치를 하고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며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는 약할지라도 주님이 오셔서 건져주실 뿐 아니라 힘이 있을 때에는 주님께 나가서 '주님 내가 돌아왔습니다.' 하고 예수님께 내 생애 신앙을 맡기고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믿었으니 교회생활하고, 교회 다녔으니 구원받고,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가 되었으니 봉사하고, 그렇게 해서 qualification이 생기지만, 어떤 때 보면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인데 제가 보니 참 이상해요. 그래서 한번 만났습니다. 교회 몇 년 다니셨습니까? 꽤 오래 다녔습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예,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믿냐구요? 그랬더니 '예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예, 하나님은 믿어도 예수님은 안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지만 예수님은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을 믿습니까? 본적이 없습니다. 아아 이분은 구원 안 받고 받은 줄 아는 사람이구나. 위험한 사람입니다. 교회생활 오래 하고도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고 주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모르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기초적인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반복합니다. 한 번 따라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가 이만큼 중요한데 주는 그리스도시오, 이 고백이 있어야 신자도 되고 제직도 되고, 사역자도 되고, 하나님의 사람도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세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application 신청서를 낼 때 '구원 받았습니까?' 두 번째 '세례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세례는 어디서 누구에게 언제 받았습니까? 이것이 확실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난 다음에는 세례를 통하여 이전의 나는 죽고 새 생명을 얻었으며, 죄사함을 받았으며,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을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확인하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 어느 날 갑자기 어떤 형제와 자매가 너무 다정하게 붙어 다니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불러 교회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했더니 약혼한 사이라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한 것이니 내가 어찌 알겠어요. 그러다 어느 날 결혼식을 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두 사람이 부부됨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도무지 나눌 수 없을 지어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그 부부가 붙어 다녀야지 떨어져 다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 보면 신부는 하나인데 총각이 두세 명이 쫓아다니는 겁니다. 이미 이 신부는 다른 남자하고 결혼날짜까지 받았는데, 자기는 하나님에게서 이 여자와 결혼하라고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총각 처녀가 와서 결혼날짜를 잡으려고 상담하고 있는데, 밖에 손님이 왔다고 해서 나가 잠깐 만나니까 중요한 상담을 할 것이 있다고 그래요. 뭐냐고 그러니까 결혼상담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먼저 상담하던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얘기를 듣는데, 이 자매 얘기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계시를 주셨는데 아무개 집사님하고 결혼하라고 그러셨답니다. 기도하는데 그 남자 사진이 보이고 환상이 나타나며 이 남자와 결혼하라고 하셨으니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분이 누구냐면 방금 전 결혼날짜 잡으려고 상담하던 그 남자입니다. 참으로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를 잘 달랬습니다. 당신이 너무 사모하고 생각을 많이 하니까 그런 착각이 올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으니 가서 좀 더 기도해 보라고 그랬습니다. 그 남자는 다른 여성과 곧 결혼할 예정인 것 같더라고 타이르니, 아니라고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다. 이 자매는 반드시 그 남자하고 결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까스로 등을 밀어서 내보내고 결혼날짜를 정했는데요, 그 분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 자매는 다시 그 교회에 안 나왔습니다. 결혼식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만인 앞에 부부된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개인적으로 내적으로 영적으로 만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public하게 사람 앞에 하나님 앞에 마귀 앞에 확실하게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례 받았으면 아멘 하십시다. 세례 받으신 분 축하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마귀가 손댈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는 세상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주초문제를 해결하였는가? Qualification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술을 먹어도 되는 데도 있고, 또 카톨릭에서는 술 담배 이런 것은 구원과 상관 없다고 여기고 별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술과 담배와 노름과 이런 것들을 삼가고 금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몸이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께 바쳐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 생명 만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이나 우리의 몸까지도 주님의 소유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단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사업상 포도주 한잔 마시는 것이라든지, 혹은 어떤 이유 때문에 술을 한잔 하게 되는데, 이런 걸 가지고 집사임명이나 장로임명하고 직분을 주는데 문제가 생기니, 세상도 변하고 우리도 이 법을 좀 바꿨으면 좋겠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토론하고 투표를 하고 했습니다. 이번 John George라고 하는 목사님이 이 이슈가 나오니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제가 나이가 많습니다. 제가 아들이 셋인데 훌륭한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 다닙니다. 다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어렸을 때 학교 다니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도 사랑하고 교회도 사랑하고 주님도 사랑하고 다 좋은데 하나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게 술입니다. 결국 결혼하고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는데 그가 술 때문이지 다른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저는 이 아이를 사랑하고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지만 술이 이 아이를 망쳤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술을 교회에서는 반드시 금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확실하게 믿습니다." 울면서 그 얘기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숙연했습니다. 정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침내 먹어서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이번에 최진실이라는 분도 술을 밤새도록 먹고 술에게 생명을 빼앗겼습니다. 교회장으로 한 것을 보면 이 분도 교회를 다닌 모양입니다. 집사님은 아직 안 됐나 봅니다. 다행입니다. 집사님이나 권사님이 술 먹고 자살했다 그러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까. 길게 말씀 안 드려도 다 아실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구별되어서 옛날친구, 옛날사람, 옛날습관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확실한 증거가 확실한 표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물질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시고 받을 것도 없으시지만 주시기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도 가진 것도 별로 없고 드릴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없어도 하나님께 바칠 것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나는 십일조를 드릴까 말까 그런 선택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 일생동안 먹고 사는 것과 입는 것과 쓰는 것과 모든 물질은 다 하나님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직인 것입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일꾼들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헌금은 안 해도 됩니다. 왜 감사하지 않은데 어떻게 합니까. 생일감사헌금, 사업감사헌금, 심방감사헌금, 무슨 감사헌금 해서 이런 것들은 감사하지 않으면 안 해도 됩니다. 감사하면 해도 됩니다. 입이 이만큼 나와서 감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할 일이 일어날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Thank advanced. 미리 감사하는 것이예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의 하나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mandatory이고, 이것은 의무이고, 하나님의 명령이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유를 인정해 드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며 그것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경기가 어려운데 김목사가 딴소리 하고 있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I know that. 그런데 그런 것과 상관없는 거예요. 이것은 세상 경기와 상관없고 내 형편과 사정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관계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돈 남아 본적이 있습니까. 맨날 모자라고 언제 경기 좋은 때 있지만 대부분 나쁘고 남는다는 생각 쉽지 않습니다. 다 쓰고 남은 거 드리려고 하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 못 드리고, 그래서 첫 번째 곡식과 첫 번째 자녀와 첫 번째 짐승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권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정하고 확실하게 하나님 앞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말씀 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하라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도 책임지시게 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시험해 봐라. 십분의 일을 드리므로 하나님의 창고에 쌓을 곳이 넉넉하면 너희 집에도 쌓을 곳이 넉넉하게 붓지 아니 하시는가 시험해보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책임지고 해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에는 십일조를 잘 드렸는데 요즈음은 아주 힘들어요 그래요. 돈이 없거나 아까워서 그렇지요. 사실 그게 힘든 게 아니고 그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병들면 숨을 잘 못 쉽니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 보면 아주 숨을 힘들게 쉬고 자꾸 눈을 감습니다. 기운이 없어서 눈이 안 떠져요. 눈 안 뜨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기운이 없어서 못 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신앙적으로도 전에 힘 있을 때에는 아깝지 않고 감사하고 열심히 했는데 기운이 빠지니까 힘이 없어집니다. 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멀다 그렇게 얘기 하는데, 교회는 옛날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자기가 이사 가놓고, 처음에 이사 갈 때는 '아 목사님 괜찮습니다, 왔다 갔다 하면서 테이프 듣고 찬송하고 그러면 더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처음 몇 달은 그렇게 합니다. 몇 달 지나고 나니까 '아이구 목사님 멀어져요' 그래요. 새벽기도 못 나오지요, 금요예배 못 나오지요, 그 다음에 모게지 많이 얻어 썼으니까 모게지 붓느라고 스트레스 받지요, 그러니까 기도할 시간 줄고 말씀 못보고, 세상이 급하니까 믿음은 점점 내려가고 그러니까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돈의 문제도 아니고, 이것은 거리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으면, 하나님 사랑하면 무엇이든지 바칠 수 있고, 주님이 함께 하시는 확신을 가지면 무엇이라도 드릴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 집사님들, 제직들 보면 십일조를 적당히 하는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 적당히 한다는 것은 작은 것은 잘하는데, 큰 것은 안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낙타는? 봉급 타서는 십일조하고, 계 타서는 안 하고. 매월 수입에서는 하고, 집 팔아서는 안하고. 작은 것은 하는데, 큰 것은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작은 것은 안 하면서, 큰 것만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10불이면 1불, 100불이면 10불, 이거 적어서 봉투값도 안된다고 해서 나중에 많이 주시면 크게 한번 하겠다고 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많고 적고, 크고 작고, 선택의 여지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selection, choose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너희의 수입의 십일조를 드려라, 그러면 내가 너를 축복하마. 내가 너를 복 주시나 안 주시나 시험하여 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돈이 들어왔는데 그것을 그냥 다 헌금으로 드린다 그러면 십일조를 따질게 없지요. 그러나 내가 정말 쓰는 돈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이 정직하게 그 일을 행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씀 드리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다 기초적인 것이지만 다시 한 번 다지는 게 좋습니다. 새로 임직되신 집사님이 수백 명입니다. 또 이미 제직 되셔서 여러 해 동안 집사님이시고 장로님이시니 그냥 나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 생각을 버리십시오. 또 앞으로 교회생활을 할 때에 제직이 되시려고 준비를 하시는 분들은 하나님 앞에 잘 배워서 똑바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과 행실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본을 보여야 됩니다. 이것은 사실 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느냐, 이 사람이 함부로 화를 내느냐, 함부로 다른 사람하고 시비를 거느냐, 다른 사람을 부정적으로 말해서 신앙 있는 사람을 상처를 주고 교회 오는 사람을 내쫓는 사람이냐,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구원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을 모셨으니 예수의 편지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이고, 우리가 작은 그리스도로서 세상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은 조심해야 됩니다. 말과 행실에 조심해야 됩니다. 제가 늘 얘기하지만 식당에 가서 식사만 잡수시고 오지, 욕까지 처먹고 오진 마십시오. 목사, 장로, 집사 그러면서 음식 투정이나 하고 그러면 절대로 그리스도의 본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으면, 음식이 좀 짜거나 싱거워도 불평하지 말고,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대하고, 고맙다고 예의를 표하고, 팁도 후하게 놓고, 일어설 때는 의자도 잘 정리하고 그래야 합니다. 그러면 뒤에서 역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르다, 다른 종교와는 다르다, 기독교가 좋다, 그런 소리를 합니다. 나도 다음에 저 사람들이 믿는 예수를 믿겠다 그렇게 됩니다. 집사님이 되는데 그런 것을 본다는 겁니다. 제직이 되면 당연히 그런 일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이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일꾼을 세우셨으니, 모든 제직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Qualification을 잘 갖추어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골로새서 1장에 보면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라고 했는데, 소망은 무엇이냐 복음을 들었다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13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리니 그 안에 지혜와 모든 보화가 있느니라. 골로새서 2장3절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우리가 믿은 예수 안에 온갖 지혜와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 할렐루야! 그래서 3장에 가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사람 보지 말고 주님을 보라는 거예요. 너무 세상 보니까 안 돼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제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요, 없는 사람이요, 다 죽었습니다. 예수 안에 감추어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너희가 전에 그 가운데 살 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일꾼을 세우시고 기둥처럼 여러분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이제 이 Qualification, 이 기둥의 재목이 되고, 난 아직 부족하다 그러시면 그 재목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준비하시고 노력하시면 하나님이 받으실 줄 믿습니다. 성경에 보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여 우리 모두 이러한 지위와 담력을 얻는 제직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주의 말씀을 상고하고 제직임명을 받고 새 회기를 출발하며 새 역사를 시작합니다. 주님 이 아침에 저희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받히고 세계선교의 위대한 사명을 이루어갈 중대한 직분을 맡았습니다. 주님,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하시고 마음속에 이 직분을 잘 감당할 결단을 하락해 주옵소서.
오늘 제직으로 임명되고 선출되고 또 임직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직분자로 세우셨습니다. 충성되게 그 일을 잘 감당하므로 하나님의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하시고 천국의 위대한 일꾼으로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 하나님 앞에 존귀한 직책, 영광스러운 직분, 그리고 믿음의 담력과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신앙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디모데전서 3:14~15 / 이필재 목사
오늘은 갈보리교회 창립 2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27년 전에 박조준 목사님과 그 당시 교우님들이 갈보리교회를 창립하여 박조준 목사님께서 17년 6개월 동안 목회를 하셨고 후임으로 제가 와서 10년째 목회를 하여 27년이 되었습니다. 갈보리교회 창립 신앙 고백은 매주일 주보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갈보리교회는 1985년 6월 첫 주일 박조준 목사님을 중심으로 초교파 독립교회로 시작한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제도와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로 선교, 교육, 봉사로 하나님의 뜻을 펴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로 구성된 목양회와 평신도로 구성된 목양협력기구에서 목양회를 돕고 있으며, 청지기회가 예배를 돕고 있습니다. 그 밖에 선교와 봉사 단체가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창립 정신에 의해서 27년 전에 갈보리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갈보리교회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헌법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교회 수첩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제가 10년 전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할 때 이 교회와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갈보리 교회 창립 이념과 교회 헌법을 그대로 준수할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마 지금쯤은 갈보리교회 헌법도 보완 작업이 좀 필요합니다. 이유는 창립 당시와 지금은 많은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도 폐지하는 헌법이 있고 수정하는 헌법이 있도록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저는 보완이 필요한 어느 헌법도 일부러 하나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보완을 잘못하면 큰 오해를 살 수가 있기 때문에 저는 처음에 약속한 대로 헌법의 수정 없이 그대로 해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독립 교회이기 때문에 어느 교단에 계신 목사님도 이 교회 목사가 될 수 있는 문을 열어놓고 있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만약에 제가 은퇴하고 후임목사가 와서 “나는 독립교회를 싫어합니다. 교단에 가입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목사는 자연히 자신이 과거에 몸담았던 교단으로 가입추진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순복음 교단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아마 과거 순복음 교회 교우들은 환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감리교나 장로교, 성결교 출신 교인들은 절대 반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끝없는 분쟁의 요소가 만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갈보리교회 오기 전까지는 주일학교 때부터 평생 장로교 출신입니다. 그러나 제가 갈보리 교회를 장로교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장로교의 제 친구들이 총회장, 사무총장을 모두 합니다. 나만 보면 “왜 이 목사는 장로교 출신이 갈보리교회를 장로교회에 가입하지 않느냐?” 날마다 저에게 요청합니다. 그럴 때마다 “김 목사가 이리로 와!” 항상 그러면서 반대했습니다. 벌써 27년이니까 30년 가까이 이 갈보리 교회는 전통이 생겨졌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아무 말이 없습니다. 후임 목사님을 위해서 여러분이 지금부터 기도를 많이 하셔야 합니다. 갈보리교회 창립 정신의 첫째가 선교이고 둘째가 교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세계 선교에 그렇게 힘을 많이 써왔고, 본 교회 교육부 발전에 중점적 노력을 해온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십시오. “다음 목사도 이필재 목사 같은 목사가 오게 해주십시오.” 이런 생각의 정리가 필요합니다.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이든지 100퍼센트 만족이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항상 부정적 요소가 있고 긍정적 요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맞추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목사 마음에도 맞추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가는 길을 같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반대파 때문에 끌려가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고 바울 사도 같은 사람도 극단적 반대파가 그렇게 많아서 고생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각자의 차이의 관계성을 잘 지혜롭게 신앙과 겸손을 가지고 훌륭하게 해 나가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의 형태와 역사를 이런 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1인 감독 제도입니다. 이 교회는 최고의 감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독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제도의 교회인데 정교회라든가 가톨릭교회가 다 그런 교회들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전 세계 교회가 하나의 구심점을 만들어놓습니다. 교황청이라고 하는 구심점을 만들어놓고 거기 교황이라고 하는 절대 권위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 교회가 교황의 명령에 절대 순종합니다. 우리나라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 모두 교황이 임명한 사람들입니다. 한국에 있는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투표해서 뽑은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금요일을 대단히 중요시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그 날은 고기도 안 먹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고기를 먹을 수 없다.”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황이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고기를 안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다 지키는데 한국은 그 법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왜 제외되었느냐 하면 1950년대 6·25전쟁 이후 한국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습니다. “그런 굶주린 백성들이 어쩌다가 금요일에 잔칫집에 와서 그 귀중한 고기 한 점을 먹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그것을 못 먹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인은 먹어라.” 그렇게 교황이 특명을 내렸기 때문에 한국 가톨릭 신자들은 거기에 해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황의 말 한마디가 한 국가 전체 교인들의 생활을 결정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절대 순종입니다.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제도에서는 이 목회를 하는 목사도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결정하거나 교인들의 마음대로 목사님을 결정하는 것이 없습니다. 위에서 결정지어주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필재 목사! 10년 동안 갈보리교회 목회하느라고 수고했다. 다음달 7월 1일에 소록도교회로 가라.”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무 소리 못하고 그대로 해야 합니다. 제가 “나는 거기 가기 싫습니다. 안가겠습니다.” 하거나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 다른 데로 가지 못합니다. 안 됩니다. 새로 오시는 분도 우리는 환영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이게 1인 감독제도의 교회입니다. 이런 제도를 가진 교회들의 장점이 있습니다. 절대 싸우고 분열하지 않습니다. 분열해봤자 상부에서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그만입니다. 절대 순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떤 장로라는 분이 저에게 찾아오셔서 자기 딸 약혼 주례를 해달라고 요청을 하셨습니다. “장로라는 분이면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이 계신데 왜 저에게 해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랬더니 “저는 지금 나가는 교회가 없습니다.” “아니, 장로가 나가는 교회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랬더니 “제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목사님이 제 딸 좀 축복해주시고 약혼 주례 좀 해주십시오. 그리고 결혼 주례도 부탁드립니다.” 목사가 약혼 주례 축복해 달라고 하는데 끝까지 거절할 수 없어서 약혼 주례를 잘하고 나중에 원탁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목사님! 제가 본래는 장로교 장로입니다. 그런데 제가 우리 교회 목사님과 싸움을 하고 나왔습니다.” “왜 싸웠습니까?” “나는 재정부장을 맡고 있는데 교회 헌금을 목사님을 마음대로 지출하는 거 같아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더니 자꾸 다툼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목사와 장로는 아주 성격이 분명합니다. 목사들은 교회 헌금 들어오면 빨리 선교비 보내고 구제비 보내서 묻어두지 않고 빨리 빨리 사용하려 합니다. 그런데 장로들은 제가 경험한 분들은 모두 움켜잡고 안 쓰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마찰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목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장로님은 결재 권한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총회에서 다 결정했고 항목별로 다 결재 승인이 난 것인데 거기 지출하려고 하면 그냥 지출 관리만 하면 되지 왜 자꾸 결재를 하려 하십니까? 장로님은 결재 권한자가 아닙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그래서 목사와 자꾸 마찰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화가 나서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개신교 안 나가고 가톨릭교회를 나가겠다 개종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 나갔는데 거기서도 열심히 하니까 또 그런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책임을 맡고 보니까 신부는 목사보다 더한 겁니다. 왜 구제비를 움켜쥐고 안 보내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안 되겠다 생각하고 신부 마음대로 재정을 지출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교구청에 투서를 써서 시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곧바로 왔습니다. 하얀 백지에 타이프를 간단하게 찍어서 나에게 답장이 왔는데 ‘본당 신부의 권한이요. 당신은 누구요?’ 그런데 그게 소문이 나서 우리 교회 교인 가운데 신부님을 교구청에 고소한 마귀가 있다면서 막 찾는 바람에 제가 거기서도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가는 교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대답했느냐 하면 “우리 교회 오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분은 가톨릭교회 제도를 모른 것입니다. 거기는 다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교황청의 명령에 전 세계가 다 똑같이 100퍼센트 순종합니다. 이게 1인 감독 제도의 교회입니다.
그 다음에는 집단 감독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 감독입니다. 교인들도 감독이고 목사도 감독이고 교회, 노회, 대회, 총회가 있는데 총회가 교회를 감독하지만 교회가 또 총회도 감독합니다. 총회가 잘못하면 교회에서 막 가서 항의하고 뒤집어엎고 법을 만들어서 새로 발표하고 얼마든지 서로 감독을 합니다. 이러한 집단 감독 제도의 교회들이 세상의 개신교에는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들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와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의견을 다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의견도 무시하지 않고 어느 조그만 교회 의견도 무시하지 않고 의견을 내면 총회에서 그것을 다 봅니다. 그래서 일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은 계속 싸웁니다. 누구든지 다 의견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내 의견에 안 맞으면 계속 싸웁니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날마다 싸우고 분열하는 것을 계속합니다. 가톨릭교회가 갈라지고 분열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100년에 하나도 없습니다. 제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개신교회는 분열하고 나간 교회도 교회로 인정한단 말입니다. 어느 교단에 들어가든지 다 환영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집단 감독 안에서는 날마다 싸우고 분열합니다. 특별히 싸움을 좋아하는 한국 교회는 이것이 굉장한 장점과 단점을 가져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감독 제도입니다. 독립교회, 회중교회가 여기에 속합니다. 갈보리교회도 여기에 속합니다. 여기 갈보리교회 헌법 제4조에 보시면 “본 교회는 개혁교회와 회중교회 정치의 장점을 선택적으로 채택, 보완한 정치 제도를 취한다.”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대로 한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교회가 만든 헌법에 의해서 운영해 나갑니다. 헌법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문제도 교회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상부 기관이 없습니다. 이 교회 자체가 모든 문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독립 교회들이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 이후 최고로 영향력 있는 목사가 조엘 오스틴 목사입니다.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만 해도 4만 명의 성도가 나오고 집회를 하면 빌리 그래함 다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다니고 있습니다. 그 목사는 독립교회 출신입니다. 신학교 가본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일반교단에서는 그런 사람을 절대 목사 안수 안줍니다. 첫째 조건이 인정한 신학교를 졸업하고 M. Div 출신이어야 목사 고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니까 절대 목사가 못됩니다. 그러나 독립교회에서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목사 밑에서 가정의 훈련을 받은 것을 가지고 나와서 목회를 하는데 빌리 그래함 다음으로 지금 미국 내에서 영향력이 크고 사람이 많이 모입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장점이 더 많다고 자기 기준의 판단에 따라 제도 선택을 하면 됩니다. 어느 제도도 완벽한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다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최초의 기독교회를 설립하고 공동체 구성을 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천년 동안 온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 전달을 위해서 노력했는데 1054년에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제도적으로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는 정교회, 하나는 로마 가톨릭교회로 나누어졌습니다. 지금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은 다 정교회이며, 유럽일대 중남미 모두 가톨릭국가입니다. 그러다가 약 500년이 지난 후 1500년대에 와서 개신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제도가 생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개신교회는 수백 가지 헌법을 자기들 신앙 고백에 따라서 만들어서 성장해 왔고 이름이 수백 가지입니다.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이게 다 개신교회의 이름입니다. 개신교회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개신교회가 아주 잘한 것 하나가 분명해졌습니다. 세계 선교에 개신교가 가장 열정적입니다. 개신교회가 제일 발달한 나라가 한국과 미국입니다. 선교 열정이 아주 좋습니다. 지금 세계 선교는 한국과 미국을 빼놓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언더우드, 아펜젤러, 토마스 목사가 다 개신교 목사들입니다. 그들이 와서 복음을 전해서 대한민국에 이렇게 교회가 많아지고 선교가 잘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 공식적으로는 미국 파송 선교사가 6만 명이고, 한국 파송 선교사가 2만4천명으로 두 나라에 의해서 지금 세계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두 나라가 하지 않으면 세계 선교는 이제 희망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같은 날 이렇게 2천년 동안 교회 제도가 여러 가지 바뀌면서 교회가 절대적으로 이 사회에 잘못한 내용들을 살펴봐야, 또 인정을 해야 앞으로 교회 갈 길이 훌륭하게 정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2011년 현재 교황인 베네딕트 16세는 세계 종교 지도자 대회에 참석해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습니다. 제목은 기독교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폭력에 대해서 사과했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흘러온 역사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이 행해졌던 것이 사실임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큰 수치감을 갖고 모든 사건을 인정한다. 이는 분명히 기독교 신앙의 남용이며 기독교의 진정한 성격이 명백히 위배되는 사건이었음을 인정한다.” 이렇게 말했고 다섯 가지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첫째가 바로 갈릴레오 재판입니다. 확실한 과학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종교 재판에 회부해서 강제적으로 지동설을 부인하게 한 진리를 왜곡시킨 교회의 죄입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까? 교회가 잘못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명령으로 결성이 되어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는 이슬람교도들과 200년이나 무고한 전쟁을 함으로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을 죽게 했습니다. 결국은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의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지금까지 기독교와 이슬람은 원수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녀 사냥입니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니까 교황청은 불행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원망하고 신앙에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12세기 말에서 18세기 초까지 약 400년 동안 마녀사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공연히 마귀가 씌었다고 트집을 잡아서 죽였는데 수없이 죽였습니다. 가톨릭교회가 한 것입니다. 여자들이 더 많이 실행되었기 때문에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을 쓴 것인데 남자도 수없이 많이 죽었습니다. “저 사람 마귀가 들은 것 같아.” 그러면 괜히 잡아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게 마녀 사냥이었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괜히 교회가 잡아다 죽였습니다. 그게 한두 명이 아니고 수천, 수만 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제일 무서워했던 것이 마녀 사냥에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잘못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입니다. 여러분이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남미 숲속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놓고 “이들은 영혼이 있는 인간이냐, 아니면 짐승이냐?” 교황청에서 그것을 토론하지 않습니까? 결국은 다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한 마을에 모든 인구가 처참하게 다 죽고 살아남은 벌거벗은 소년 하나가 나룻배를 지어서 자기 살 길을 찾아 길을 외로이 떠나는 것으로 그 영화가 끝나지 않습니까? 중남미 지금 30여 개국은 언어가 하나입니다. 스페인이 기독교 이름을 가지고 들어와서 모두 다 학살하고 여자들은 강간하고 종족 혼합을 시켰고 스페인어만 하게 해서 지금 그렇게 언어를 하나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 죄를 가톨릭교회가 지었습니다. 그것을 인정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니까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잘못된 진리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개신교회라고 하는 것이 탄생되니까 1500년대에 개신교회가 또 마귀라고 죽이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교회 교황청에 의해서 수백만이 죽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프라하에 갔을 때 거기 제일 유명한 니콜라스 성당을 구경했더니 십자가 위에 동상이 있는데 가톨릭 주교가 어떤 사람 한 명을 발로 밟고 창으로 목을 찌르는 동상입니다. “저게 뭐냐?” 거기에 깔려서 지금 목이 찔려 죽는 사람이 개신교 신자입니다. 마귀는 이렇게 죽여야 된다고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유럽 전역에서 수백만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에 의해서 살해당했습니다. 무참하게 죽었습니다. 그 내용들을 교황청이 이제 와서 인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했다고 인정했습니다. 교회가 진리에서 떠날 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들입니다.
오늘 말씀에 “교회가 무엇인가?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진리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희망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진리가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십자가의 사건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지 않았습니까? 지나간 27년 동안 온 세계에 이 구원의 진리의 빛을 밝혀온 갈보리교회는 앞으로도 영원히 진리의 빛이 되어서 어둠의 영혼을 인도하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쓰시는 그런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
딤전 3:14-15 / 양향모 목사
19세기의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를 잘 아실 것입니다. 20세기에 와서 이분의 그림은 너무나 유명한 그림이 되었으나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아무도 그의 그림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때까지 보아왔던 그림과는 아주 다른 그림이었기 때문에 그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림 한 점도 제대로 팔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37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그림을 그렸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제가 볼 때는 고흐보다 더 이상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그림은 사람들이 알아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비싼 값에 사주었기 때문에 부귀영화를 누리며 92세까지 잘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를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고흐가 피카소보다 좀 빠른 시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직 그런 그림을 몰라보고 인정을 하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두 사람의 차이가 인맥 관계에 있다고 했습니다. 피카소의 곁에는 그림을 보고 알아주고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고 고흐의 곁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고흐 곁에는 그의 천재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정신병자로 보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좋은 눈으로 보아주고 그의 그림의 의미를 알아보고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후일 돈 맥클린(Don McLean)이라는 가수가 고흐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빈센트(Vincent)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팝송을 좋아하는 옛날 사람들 한두 번 흥얼거렸던 귀에 익은 노래입니다. “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으로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 중간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이 내게 하려 했던 말/ 맑은 영혼을 가지려 얼마나 당신이 고통스러웠는지 그것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죠 어떻게 듣는 줄 몰랐었죠 아마 이제는 들을 거에요”
저의 설교를 처음 들으시는 분들은 이 사람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십자가의 복음이나 천국 복음을 설교하느냐고 속으로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성경의 핵심이고 교회가 전해야 할 복음의 핵심입니다. 세월이 지나 말세가 되고 사람들이 고통받는 시대가 되면 또 우리가 천국에 가서 보면 십자가의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가치를 안다는 것, 진리를 안다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엄청난 가치를 가진 것을 몰라보고 무시해버린다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막심한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진리에 의하면 오늘 우리가 다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아주 특별한 신분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고 각각 특별한 달란트와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자녀 중에, 우리가 가르친 학생 중에, 우리의 전도를 받은 사람 중에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위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여러분의 삶이 멋있게 보람되게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 곳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진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이 진리를 통하여 우리가 받은 신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고 사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평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기쁘게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귀한 것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평생을 불평 속에서 자신을 비관하면서 살다가 비참하게 인생을 끝내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이 에베소에 빨리 가고 싶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 서신을 보내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우선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교회인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살펴보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본문 14절에서 15절 상반 절에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 지방에 머물러서 목회하게 하고 서둘러서 다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른 지방으로 갔습니다. 다른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가 늘 걱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는 아직 어렸고 성격상으로도 좀 소심한 면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복음에 대해서 바울처럼 많이 알지 못했고 목회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 때라서 혹시 다른 길로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조심해야 할 사항들을 서신으로 기록해서 보내주고 있습니다. 같이 있을 때 구두로 다 말한 것이었지만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게 하기 위함일 것이고 특별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장에서 말씀한 대로 다른 교훈 즉 잘못된 교훈이나 거짓 교훈을 가르치지 않고 바른 교훈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교훈 바른 교훈은 1장 11절의 말씀대로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라서 그 복음에 의해서 나온 교훈이 바른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2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였고, 그리고 교회 안에 주를 이루고 있는 여성도들의 미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감독이나 집사와 같은 교회의 일꾼들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일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는 교회의 일꾼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라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지도하고 돌보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집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집이나 교회 하면 우선 교회당 같은 건물을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 건물을 교회당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집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집은 그런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집이란 구약시대의 성소나 성전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성소나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모셔놓은 신당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들을 모신 신당이 신의 집이듯이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세운 건물을 말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중세시대 때도 성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고 그것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큰 교회당을 짓고 거기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 혹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집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집”이라는 단어는 가정 혹은 가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가정 혹은 하나님의 가족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이 모여 있는 그 모임을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가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말도 교회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그 모임을 교회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비롯한 모든 교회의 지도자나 봉사자들이 그들이 지도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그것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면서 그런 외형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신분인지를 모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런 외형적인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가정이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자녀들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것이 일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옛날 종교에 관한 선입견이 있어서 하나님의 집이나 교회당 하면 신전과 같은 건물을 연상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이라고 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어떻게 충성하고 어떻게 선한 일을 하여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앞서서 살펴본 대로 교회의 직분자들 뿐만 아니라 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가 지키며 행하여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라면 마땅히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더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번역대로 하나님의 집인 성도들이 어떻게 행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바르게 사는 법 선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런 정도로 끝나는 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로 하여금”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가정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행하다”라는 단어는 “마땅히 필요한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도 알아야 하겠지만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말씀하기를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을 행하는가 하는 것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통해 주신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무엇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더 소중함을 가르쳐서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5절 하반 절에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집이나 교회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모임을 말하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교회라는 말에는 하나님 자녀들의 모임이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불러서 모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헬라어 단어는 엑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인데 이 단어의 뜻은 “무엇으로부터 불러 모으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교회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으로부터 특별히 불러 모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사탄의 종으로 살다가 갈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여기 모여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우리가 누구냐 하면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터 위에 기둥과 같이 세워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로 닦아진 터이며 그 위에 세워진 기둥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진리이지만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란 그 성경 말씀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 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렇게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라는 말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조금 쉽게 번역했습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조금 더 쉽게 하면 “우리는(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집이며 예수님의(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예수님의 기둥과 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닦아주신 터 위에 세워진 기둥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로 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만들어주신 기초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기둥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권세를 기둥처럼 세워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닦아주신 터나 세워주신 기둥은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를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도 사탄의 권세도 그 무엇도 우리를 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신분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하여서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것은 쉽게 무너지고 흔들리고 빼앗겨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닦아주시고 세워주신 터와 기둥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고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알고 기쁘게 살면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여러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려주고 깨닫게 하고 누리고 살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귀한 신분을 가지게 되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우리들을 특별히 불러주셔서 이렇게 거룩한 무리 성도가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닦아주신 터 위에 기둥처럼 세워주신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이 귀한 신분을 빼앗아갈 수 없는 견고한 터 위에 튼튼한 기둥처럼 세워진 사람들입니다.
이 귀한 진리를 더 잘 배우고 기쁘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 귀한 신분 이 귀한 믿음을 잘 몰라서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비참하게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믿음의 반석
딤전 3:15 / 김명혁 목사
교회는 어떤 곳인가? "믿음의 반석" 모스크바 미르교회 헌당예배
오늘 미르교회의 헌당을 축하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서울에 있는 강변교회 성도들의 사랑과 축하의 문안을 전합니다. 그동안 허충강 이미화 선교사님과 미르교회 성도 여러분들의 많은 수고와 많은 고통과 많은 헌신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미르교회를 도와주신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동료 선교사 (강정수, 정광섭, 정득수, 조동석, 김영곤, 이영근, 박진열, 석균태, 김낙웅, 김정희 선교사님과 사모님등) 여러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다라가) 곳이 어떤 곳입니까? 미국의 백악관입니까? 러시아의 크레물린입니까? 한국의 청와대입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곳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백악관은 부시 대통령의 집이고 크레물린은 푸틴 대통령의 집이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딤전3:15). 교회는 또한 예수님의 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또한 성령의 전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바로 성령의 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곳입니다. 강변교회도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곳이고 미르교회도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곳입니다.
이제 "교회는 어떤 곳인가?" 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말씀하신 세 가지 내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첫째, 교회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집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반석 위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여기 반석은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를 가리키지만 또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보다도 믿음이고 지식보다도 믿음이고 권력보다도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모든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교회의 기초가 되고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목사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윤경이와 윤희를 예뻐하고 사랑하는 것은 윤경이와 윤희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귀한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믿음은 교회의 반석이요 씨앗이요 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저들의 믿음을 떠 보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때 시몬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면서 시몬을 칭찬했습니다. "내가 누구인 것을 네가 바로 고백했다. 그렇다, 나는 그리스도요 죄인들을 구원하는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가 참으로 복이 있는 자로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지금부터는 네 이름을 시몬이라고 하지 않고 베드로 즉 반석이라고 하리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가이사랴 교회는 고넬료의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사마리아 교회는 수가성 여인의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미르교회는 허충강 이미화 선교사님과 여러 성도들의 믿음의 반석위에 세워졌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바로 고백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미르교회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 가려면 여러분들이 믿음을 분명히 하고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께서 예수님이 누구이신 것을 다시 한 번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면 여러분들은 미르교회의 기초가 되고 미르교회를 세우는 재료들이 됩니다.
2. 둘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집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죽음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도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지옥의 권세,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도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마귀는 때로 테러나 죽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교회를 위협하고 공격하지만 테러나 죽음의 위협도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죽음의 위협이 주기철 목사님이나 한국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했습니다. 일본 나라가 한국교회를 무너트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한국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가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무너뜨리지 못했습닌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 정부가 예루살렘 교회와 소 아시아 교회와 마게도냐 교회를 무너트리려고 했지만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사탄의 세력이 스데반과 야고보와 베드로와 바울과 폴리캅을 잡아서 죽였지만 초대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했습니다. 사탄의 세력이 미르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할지라고 결코 무너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의 권력은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이 세상의 권력은 보기에는 강해 보이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로마 제국도 무너졌고 일본의 권력도 무너졌고, 구 소련의 권력도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돈이 많고 지식이 많고 권력이 많아서 무너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실 세상적인 힘은 없습니다. 교회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오늘 까지 건재합니다. 교회가 오히려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고 교회의 기초와 재료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탄과 지옥의 세력도 무너트리는 힘을 발휘합니다. 교회가 세상적으로 약해질 때 오히려 영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음부의 세력이나 지옥의 세력이나 죽음의 세력이 절대로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여러분들, 테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시지 마십시오. 여러분들, 사탄의 세력 앞에서 떨지 마십시오. 우리의 주인이 사탄의 머리를 때려 부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사탄을 무너트리고도 남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여러분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셋째,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집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열쇠는 문을 열고 닫는 일을 합니다.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교회에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열쇠는 예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열쇠입니다. 계1:18을 읽습니다. "볼 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3:7을 읽겠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는 너무나 엄청난 것인데 어떻게 이 열쇠를 교회에게 주셨다는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입니다. 그래서 캐톨릭 주석가들은 물론 많은 개신교 주석자들도 이 열쇠는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고 일반 교회에게 주신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세 번째 말씀도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교회는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너무나 엄청난 사명과 특권을 부여 받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와 설교의 두 가지 열쇠로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므로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스데반이 사울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사죄의 은총을 선포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면, 그들에게 천국의 문이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마16:19을 읽습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베드로가 10일 동안 기도한 후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했을 때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때 3천명에게 천국 문이 열렸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베드로가 시몬을 향해서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선언했을 때 시몬에게 천국 문이 닫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에게 주신 이 천국의 열쇠를 귀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최선을 다해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첫째, 교회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집입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하고 튼튼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집입니다. 여러분들, 믿음으로 사탄과 음부의 세력을 짓밟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집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천국에 들어 가실 뿐 아니라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즉 기도와 전도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미르교회의 헌당을 다시 축하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슬라바 보구! 다 불라고 슬로비뜨 바스 고스포지! 여러분들을 모두 사랑합니다. 야 바스 루불류!
교회는 어떤 곳인가.? “믿음의 반석” -모스크바 미르교회 헌당예배- 2004.5.30
오늘 미르 교회의 헌당을 축하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강변교회 성도들의 사랑을 전합니다. 그동안 허충강 이미화 선교사님과 미르교회 성도 여러분들의 많은 수고와 고통과 헌신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곳은 백악관도 크레믈린도 아니고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한 예수님의 몸이고 성령의 전입니다. 이제 “교회는 어떤 곳인가” 라는 제목으로 세가지 내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교회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집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반석 위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여기 반석은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를 가리키지만 또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신자를 가리킵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돈보다도 지식보다도 권력보다도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미르교회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가려면 여러분들이 믿음을 분명히 하고 튼튼히 해야합니다.
둘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집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죽음과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세상의 어떤 권세도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지옥의 권세,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도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마귀는 테러나 죽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교회를 위협하고 공격하지만 테러나 죽음의 위협도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반대로 이세상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가 돈이 많고 지식이 많고 권력이 많아서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고 교회의 기초와 재료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가진 집입니다.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예수님께서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교회에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열쇠는 예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열쇠입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계3:7).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는 너무나 엄청난 것인데 이 열쇠를 교회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기도와 설교의 두가지 열쇠로 천국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사죄의 은총을 선포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면 그들에게 천국 문이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미르교회가 천국 열쇠를 가지고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미르 교회의 헌당을 다시 축하 드립니다. 슬라바 보구! 다 불라고 슬로비뜨 바스 고스포지! 야 바스 루불류!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딤전 3:15 / 석원태 목사
역사 속의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성전’이요, ‘성령이 거하는 전’이요, 또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중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또한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였습니다(딤전 3:15). 여기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기둥’과 ‘터’란 말은 교회의 견고성, 불변성, 영원성 등 교회의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Ⅰ. 역사 속의 교회는 구속사의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교회는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존재하였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역사의 초점이 되고, 중심이 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역사 위에서 그리고 역사 안에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역사의 주인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의 역사’(History ; B.C.-A.D.)이고, 역사의 참된 의미는 그 분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역사, 그 분의 의미는 역사 속에서 ‘교회’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역사의 중심입니다. 그 구속사의 중심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역사 속에서 그의 교회운동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인류타락과 함께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계시하고(창 3:15, 21), 그 구속역사와 함께 교회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창세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교회는 돌단 교회였습니다. 이른바 족장 이전 시대의 번제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주었습니다. 그 후에 출애굽의 교회, 이른바 광야교회는 성막(성소)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주시고, 구원의 계시(sign)를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약속된 땅, 예루살렘 교회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솔로몬 성전 운동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에스겔서의 회복된 성전으로 이어지고, 예수 당시에는 헤롯이 복원한 가시적인 성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때가 찼을 때, 예수님 자신의 화육 성전이 역사 속에 직접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자기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붙어 지체로서 하나를 이룬 신약의 성도 개인과, 그 개인들이 모이는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 다시 말하기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고전 6:16, 엡 2:21). 이것은 구약의 성전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운동은 마침내 영화된 새 하늘, 새 땅의 천상 교회로 이어져 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로 그 교회, 곧 천상 교회는 영원무궁한 무죄세계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이 세상역사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담고 있는 큰 질그릇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특수한 보배를 담고 있는 잠정적 질그릇이 됩니다. 14만 4천인(계 7:4, 9, 14:1, 2, 롬 11:12, 25, 26)의 이상적 구원인을 채우는 집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야말로 역사 중의 역사요, 역사의 알맹이요, 역사의 구심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본질적 성경의 계시에서 볼 때 역사 속의 교회는 구속사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Ⅱ. 역사 속의 교회는 이 세상 중에, 오는 세상의 임함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1장 12~17절 중에서 이른바 예수님의 성전 정결 운동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 보면, 제일 먼저 예수께서 성전 안에 들어가시는 장면입니다(마 21:12). 두 번째 예수께서 성전에서 제물을 매매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는 장면입니다(마 21:12). 세 번째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어 버리시는 장면입니다(마 21:12). 네 번째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심하게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셨습니다(마 21:13). 다섯 번째는 성전에서 눈멀고 다리 저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마 21:14). 여섯 번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는 정반대로 성전 안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의 찬미를 용납하시는 장면입니다(마 21:15~16). 일곱 번째는 성전에서 찬미하는 아이들에게 분노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지도자)을 질책하신 일입니다(마 21:16b).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쫓아내시고’, ‘엎으시고’, ‘꾸짖으시고’, ‘고쳐주시고’, ‘용납하시고’, ‘대적(질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사 베다니에서 유숙하셨다고 하였습니다(마 21:17).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신 이 행동과 말을 듣고 ‘이상한 일’로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또 ‘분노’했다고 하였습니다(마 21:15).
우리는 이러한 성경 본문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운동의 참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오신 것(마 21:12)은 이 세상에(this Age), 오는 세상의(Age to come) 임함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메시야의 도래를 알려주는 행동적 계시입니다. 그것은 몇 가지 중대한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도래는 새 것의 진입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새 주인의 도래를 알려줍니다. 병든 자(죄인)를 고쳐주고, 새 아이들의 세계가 도래함은 메시야 시대의 특색입니다(마 18:3, 사 11:6, 8).
둘째로, 그것은 구원과 심판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메시야의 임함은 육적 이스라엘의 파멸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매매되는 제물과 사람들과 기구들을 쫓아내고 엎어버리시고 책망하시고 대적(질책)하신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다리 저는 자들을 고쳐주시고, 찬미하는 어린아이들의 노래를 온전케 하심은 새 구원의 도래를 나타내시는 사건이 됩니다.
예수께서 이를 친히 행하셨습니다. 이유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예수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아 죽으심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은 또한 새 언약을 세우는 영원한 희생제사가 되어 구원의 빙거가 됨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파괴되는 반면(헐어버림),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주의 백성들에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요 2:19, 고전 15:23).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옛 성전의 파괴이자 새 성전의 건축이라고 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것은 신령과 진리라고 하는 교회의 본질을 나타내는 예수의 행동적 계시였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행하신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 가운데서 토해내신 중대한 내용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3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내 집」이라고 하신 사실입니다. 그는 어릴 때 요셉과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태복음 21장 13절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음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막 11:17)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딤전 3:15). 그리고 「큰 집」이라고 하였습니다(딤후 2:20).
이러한 성경 계시의 주장은 하나님의 교회의 신령성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주인이요, 아버지요, 그의 백성은 그 교회의 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신령한 집, 신령한 젖, 신령한 제시장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2~5). 예수님은 신령(성령)과 진정(진리)의 예배라고 하였습니다(요 4:23). 바울은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성령) 예배라고 하였습니다(롬 12:1). 그러므로 교회는 메시야시대 곧 새 시대, 오는 시대의 임함이요, 구원과 심판의 표적이요, 신령한 영의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대하고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계시하는 바른 인생관, 우주관, 역사관입니다. 확실히 성경은, 존재하는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무대요 현장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는 맹목이 아니고 목적이며,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고, 무의미의 반복이 아니고 의미의 진행이며, 진화가 아닌 하나님의 위대하신 자기통치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역사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담고 있는 복음선교의 무대요, 현장이라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보배(구원사)를 담은 질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귀중한 보배가 바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요, 교회운동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토하는 신앙고백의 공동체입니다. 그 교회는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족속들로부터 이루 셀 수 없는 큰 무리들로 이룩된 세기적이요 우주적인 공동체입니다. 바로 구원받기로 작정된 14만 4천인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중(this Age)에, 오는 세상(Age to come)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화육강세요, 그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심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지고 오신 오는 세상의 표적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요, 구원과 심판이요, 신령한 오늘의 교회운동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실로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산성, 구원의 산성, 영생운동의 보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없는 세상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없는 인류역사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운동이 존재하는 역사의 차원적 본질이요, 내용이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this Age)에서, 오는 세상(Age to come)을 알려주고 나타내는 역사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죽었는가? 함은 바로 교회가 살아있는 진리의 기둥과 터냐, 아니냐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 오는 세상, 곧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대답은 교회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집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만유의 충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엡 1:22~23)?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지 않았는가(딤전 3:15)?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지 않았는가(딤전 3:15)?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생존 그 자체입니다(엡 2:20~22). 그래서 교회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개혁자들의 말은 우리에게 축복의 유산이 됩니다. - 아 멘 -
경건의 비밀
디모데전서 3:16~4:11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3:16의 말씀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경건의 비밀”이라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합니다. 계시란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시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계시입니다. 그러기에 비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과 함께 계시의 영을 주신 이들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건의 비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드러났고 우리가 알게 된 그 비밀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여섯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들 가운데 오셨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쓰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한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것, 이것은 아무도 알지도 못하고 예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도 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으며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비밀입니다. 오직 믿는 이들만 알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 관계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의 황제나 제국에 대한 반란과 같이 가장 중한 죄인들을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형벌입니다. 그런 형벌을 받는 사람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에로 정죄되셨지만 영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살리는 죽음이었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기에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계시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수긍할 수 있는 사실이기에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3-4에서 쓰기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면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3:18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2:6-11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라 한 데서 “하늘에 있는 자들”에 속하는 것이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천사들이 무릎을 꿇고 그를 주라고 시인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의 비밀이 온전히 밝혀지는 것입니다. 즉 본래 사람이 아니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과 같이 되셔서 세상에 내려오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것은 본래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에 빠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 비밀한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실현되고 드러난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이들 즉 경건한 이들만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인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국에서 전파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밝히 드러난 이 구원의 비밀이 온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명령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하셨으며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그 구원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도로 주님에 의해 부르심과 세우심을 받았으며 복음의 전도자로서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15장에서 쓰기를 자기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롬15:16) 하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롬15:18)이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15:19) 합니다. 그는 골1:23에서도 쓰기를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합니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믿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하루에 새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해지는(행2:41) 놀라운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에까지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이 도처에서 일어나기에 이른 것입니다.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다”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려지신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막16:19). 그의 영원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신비입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엄청난 신비입니다. 큰 믿음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래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한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신비이며 확실히 믿고 따라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이 경건의 비밀은 모든 교인에게 믿고 따라야 할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떠나고 나면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침투하여 교인들을 유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일이 일어날 것임을 성령께서 자기에게 일러주셨다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알립니다. 본문 4:1-2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바울이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부른 것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4:3-4에서 그는 말하기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합니다.
여기서 거짓 교사들은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 중요하다고 여기며 창조의 신과 물질세계가 선하다고 믿기를 거부하는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반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자이시고 그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며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는 다 선한 것이고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함으로써 자기연단을 잘 하며 의로운 자들로 보이려 할 것이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합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사람이 진리와 거룩함에 이르고 구원을 받는 것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대로 혼인하지 않고 이런 저런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열심히 기도하는 경건의 삶을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인들을 주님의 좋은 일꾼 되게 하고 바르게 양육하는 길이라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르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이어서 디모데에게 교인들을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먼저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본문 7-8절을 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 그들에게 영향을 준 철학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일 뿐이라고 잘라 말하며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는 경건의 훈련을 권면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신체적인 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 4:3 상반절에서 말한 대로 혼인을 하지 않고 특정한 음식들을 먹지 않는 등의 금욕훈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훈련으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히 복된 삶을 약속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의 훈련의 요체는 5절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날마다 더욱 거룩해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사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것은 성경공부 열심히 하고 기도 많이 하면 저절로 거룩하여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를 늘 성령께 구하며 그를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를 세상과 구별되며 거룩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며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라고 디모데에게 명하는 것입니다. 본문 9-11절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오늘 본문 3:16은 우리가 예배 때마다 암송하며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압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을 확고히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믿음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 배우기와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시기를 늘 구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의 훈련이고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는 크나큰 경건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깨달아 안 그 진리대로 거룩한 삶을 살며 금생과 내생에서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누리는 우리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