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지난해 개인파산은 21만6348건. 전년도의 16만457건에 비해 25.8%나 증가했다. 일본의 파산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재일교포 김경득 변호사는 “장기불황으로 일본에도 다중채무나 과다채무가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우리처럼 심각하지 않다. 임주재 금융감독원 신용감독국장은 “일본은 30년 전 고리대금업인 사라킹(샐러리맨의 일본식 발음 ‘사라리만’에 돈을 뜻하는 ‘킹(金)’을 합성한 조어)이 기승을 부려 자살이 늘어나는 등 사회문제가 되자 최근 우리가 도입하려는 개인회생제도 등의 법적절차를 마련했다”며 “작년과 재작년에는 법을 더욱 세분화해 채무자 급증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산을 비롯해 갱생을 돕는 그물망처럼 짜여진 법적절차는 일본의 특징. 채무액과 상환능력, 직업에 따라 선택폭이 넓다.
이런 절차를 통해 다중채무자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등 사회악이 될 소지를 그때그때 잘라 버리는 식이다.
◆민간기구를 통한 갱생=지난달 30일 도쿄 신주쿠에 도심에 있는 일본크레디트카운셀링협회(JCCA)를 찾았다. 우리보다 먼저 민간 신용갱생제도를 도입해 사무실도 크고 많은 사람이 일하리란 예상을 깨고 의외로 규모가 작다. 상담원 6명이 전화상담을 하고 있고 그 옆에 변호사 2명이 일을 본다.
오후 3시. 협회 사람 말로는 한창 바쁜 시간이라 하지만 직접 찾아 오는 사람 하나없다. 걸려 오는 전화에 응답하는 정도. 한국의 신용회복지원위원회처럼 신용불량자들이 줄지어 상담받는 모습은 볼 수 없다.
JCCA의 야마기시 전무(61)는 “한국 신불자는 350만명에 달한다고 들었다”며 “일본은 비슷한 기준으로 보면 약 160만명이 해당된다”고 말했다. 일본에는 신용불량 등록제가 없어 추정만 할 뿐이다. 어쨌든 일본인구가 우리의 3배임을 감안하면 그리 많지 않은 편. 지난해 JCCA에 상담은 8811건으로 전년도 1만117건에 비해 오히려 줄었다. 파산은 늘어난 데 비해 JCCA의 상담이 준 것은 민간기구보다는 법적절차가 갱생제도의 중심이란 얘기다.
JCCA에서는 변호사 1명과 소비전략을 짜 주는 상담자 1명이 2인 1조로 상담한다.
JCCA를 찾는 사람들은 대개 대부업체나 신용카드 차입을 갚지 못해 오는 경우. 대부업체들의 금리는 대개 출자법 상의 금리 상한선인 29.2% 선. JCCA는 이 금리를 18% 내지 그 이하로 낮추는 채무재조정을 주로 한다.
김경득 변호사는 “JCCA의 경우 금리 조정만으로 채무상환이 가능한 비교적 우량한 채무자가 대상”이라고 말했다.
◆자기(自己)파산제도=일본의 갱생제도는 JCCA와 같은 민간기구보다는 법적절차 내지 변호사가 채무조정을 대신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채무자의 갱생을 돕기 위한 방식은 크게 세 가지. 우선 파산법에 근거한 자기파산(개인파산)이 있다.
일본은 자기파산이 연 20만건에 달할 정도로 보편화돼 있다. 파산제도중 하나인 ‘동시폐지’는 5년간 분할변제해도 돈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가 대상. 청산에 시간이 걸리지 않고 법원의 판단에 따라 신청과 동시에 바로 파산폐지가 된다 해서 동시폐지란 이름이 붙었다.
‘관재사건’은 파산과 대상은 비슷하나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사람이 해당된다. 파산관재인이 선임돼 수개월간 정리할 재산을 채권자에게 나눠 준다. 관재 신청을 하고 2, 3개월이 지나 신청자의 재산 규모와 정리방식이 정해지면 채권자집회를 열어 자산정리방식에 동의를 구한다. 채권자가 승인하면 면책이 결정이 된다. 채무의 족쇄로부터 완전 벗어나 새출발하는 것이다.
숨긴 재산이 발각되면 ‘사기파산’으로 중형을 내려 모럴해저드의 소지를 줄인다.
◆법원을 통한 신용재생=최근 활용도가 커지는 갱생제도가 ‘민사재생’이다. 우리나라에서 도입하려는 개인회생과 유사하다. 민사재생은 ‘소규모개인재생’과 ‘급여소득자재생’으로 나뉜다. 소규모민사재생은 자영업자, 급여소득자재생은 봉급생활자가 대상. 2001년 시작된 이 제도는 지난해 월간 신청 1000건을 넘은 데 이어 올4월에는 사상최고치인 1912건이 신청됐다. 올해엔 5월까지 총 6338건을기록, 지난해 1만3495건을 능가할 전망이다.
민사재생은 채무자들이 기존의 사업 등을 유지하며 돈을 갚아 신용을 회복하는 방식. 채무총액이 3000만엔 미만이면서 3년 내 100만~300만엔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이 해당된다. 채권자의 절반 이상 동의가 있어야 한다.
특정조정법에 근거한‘특정조정’은 민사재생과 비슷하나 3년 내 채무를 모두 갚을 수 있는 경우에 적용된다. 법원 주재로 채무자 채권자가 합의를 도출하는 방식.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아 이용자가 많다. 지난 2001년에 29만4426건의 신청이 있었다.
이 외에 법원이 개입하지 않는 방식을 ‘임의조정’이라 통칭한다. 여기에 JCCA를 활용한 방법이 포함돼 있다. 채무자가 직접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선임, 채권자와 채무협의를 하는 것도 포함된다. 변호사 비용이30만엔 가량 들지만 일본 현행법상 변호사가 대리인이면 채권자가 채무자에 직접 채권추심을 못하도록 하고 있어 이 방식도 자주 애용된다.
법적절차에 따른 변호사 비용은 채무자 부담을 덜기 위해 변호사협회가 제시한 표준가격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