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한국기독교연구소 정연복 편집위원 ⓒ 박지훈/에큐메니안 | |
4. 구원은 사랑 나는 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가? 나는 예수의 그 무엇에 반해 내 삶에서 예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가슴앓이하며 살아야 하는가? 저 옛날 팔레스타인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예수의 그 무엇에 그리도 감격해서 어찌 보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린 그를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고백했을까?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독일의 여성 정치신학자 도로테 죌레의 말에서 찾고 싶다. 그녀는 말한다. “신앙의 참된 근거는 나사렛의 가난한 청년이 배고픈 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고 눈먼 자들을 보게 하고 정의를 위하여 살다가 죽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 예수는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예수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과는 태어날 때부터 질적으로 다른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예수는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문제를 안고 씨름하며 사람답게 살려고 애쓰다가 세상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역사상의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돋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비록 보잘것없는 떡 한 조각이라도 가난한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따스한 인정(人情)이었다. 그것은 정의였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가시적이며 비가시적인 모든 것에 목숨 걸고 맞서는 불타는 정의감이었다. 예수의 33년 짧았던 생애가 그리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의 생애가 사랑과 정의로 수놓아졌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초기 교회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또 그리스도라고 불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이 실제로 그러하셨기 때문에 초기 공동체는 그분을 그렇게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레오나르도 보프) “우리는 기독교가 신비주의에 빠져 자기 역할을 못하는 것에 비판해야 한다” 예수는 신성과 인간성을 겸비한 신비한 본질 때문에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으로 고백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진실로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신격화함으로써 우리 인간들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되게 하는 것을 배격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가 신비주의에 빠져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꼭 해야 한다”(한국 노동자들의 복음대화) 예수가 제자들에게 원했던 것은 그들도 자기처럼 사랑과 정의로 충만한 삶을 사는 일이었다. 예수가 꿈꾸었던 것은 하늘 저편 어딘가에 있을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다. 이 땅에 실현되는 따뜻한 인간의 나라였다. 예수의 화두는 인간이었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이었다. 예수의 믿음은 생명이 존중받는 그 나라가 인간의 역사적 실천의 지평 내에 있다는 믿음이었다. 예수의 그 믿음은 생명 살림의 예수운동으로 꽃을 피웠다. 하지만 예수운동은 현재진행형의 운동이다. 이 세상에 신음하는 생명이 단 하나라도 있는 한, 예수운동은 아직은 미완성이다. 하물며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마당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신학적 진술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든 예수의 생명사랑․민중 사랑을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계승하는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는 신앙고백은, 나는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힘이 들더라도 예수처럼 내 주변의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한평생을 살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보 2:14) 무슨 뜻인가? 구원은 생활이다. 구원은 사랑이다. 사랑 없이는 구원도 없다. 사랑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있다. 믿음도, 목회도, 신앙생활도, 예배도, 신학도 사랑 없이는 부질없는 짓이다. ‘배고픈 자들에게 떡을’ 주는 그런 사랑이 없이는. 5. 생활신앙의 구원론 - 야고보 2:14-17 한국교회의 으뜸가는 단골 메뉴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교리는 믿음을 몹시 강조하는 바울서신의 여러 본문들, 특히 로마서에 기초한다. 그러나 탁월한 복음 변증가인 바울에게 있어서는 믿음과 행함, 신앙과 윤리, 복음과 율법이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사실을 전통신학과 교리에서는 간과하거나 고의적으로 무시해온 게 아닐까. 율법 수호에 목숨을 걸었던 열렬한 바리새인 바울은 극적인 예수체험 이후에도 율법을 전혀 무가치하다고 여겨 내팽개치지 않았다. 바울은 예수체험으로 율법 주의적 삶의 한계를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그러면서도 율법이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소중한 위치를 계속해서 인정했다.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외친 것은 다분히 전술적이다. 그것은 추상적․무시간적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받은 선민이기에 구원 또한 자신들만의 몫이라는 착각과 교만에 빠져 있는 유대 기독교인들에 맞서 ‘율법 없는’ 이방인들의 인간적 권리를 주장하는 이방선교 상황에서 나온 ‘전투적’ 구호였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마치 바울신학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정통’ 구원론인 양 주장하는 것은 몹시 위험하다. 바울서신도 복음서처럼 믿음은 행함의 뿌리로서만 가치가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구원에서 하나님의 신비한 은총만을 강조할 뿐 정작 구원의 당사자인 인간의 주체적 노력은 무시하는 ‘정통’ 신학과 교리보다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협동을 말하는 소위 ‘신인 협동설’이 바울서신과 복음서를 아우르는 성서적 구원론에 훨씬 더 가깝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서와 인간의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구원론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 하나만으로 구원론의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율법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좀 더 유연하고 폭넓은 구원론에 눈뜰 필요가 있다. 인간의 선한 잠재력을 꽃피우는 인간화(人間化)로서의 구원이라는 실천적 맥락에서, 인간구원에서 인간의 주체적 참여의 폭을 넓히는 방향으로 설교와 예배와 신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단순한 진리를 교리와 신학을 덧씌워 헷갈리게 하면 안 된다 사실 복음서와 바울서신이 전하는 근본 메시지는 단순 명료하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갈라 5:6). 바로 사랑이다. 이렇듯 단순 소박한 것을 교리와 신학으로 자꾸 헷갈리게 하면 안 된다. 물론 교리와 신학도 교회 공동체의 건전한 유지와 신앙생활에서 그 나름대로 역할을 하겠지만, 잘못된 교리와 신학 때문에 믿음의 본질이 훼손될 수는 없다. 신학은 복잡하고 난해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오늘 본문은 시사한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바울의 신학이 어딘지 모르게 지적(知的) 냄새를 풍긴다면, 야고보서의 신학은 ‘신학’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대중적이다. 복음서들보다 수십 년 앞서 신학의 기초를 닦은 바울의 업적도 크지만, 무식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평범한 생활언어로 풀어가는 야고보서의 신학도 바울신학 못지않게 기독교의 소중한 전통이다. 일상생활의 구체적 예를 들어, 야고보서 기자는 말로만 이웃사랑을 외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생활신학이요 생활신앙의 구원론이다. 오늘 본문은 굳이 구구절절 주석을 달 필요도 없다. 꽃을 보고 그 꽃의 향기에 흠뻑 취하면 그만이듯,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삶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면서 우리의 삶과 믿음을 겸손히 반성하는 걸로 족하다. 오늘 우리 주변을 둘러보라.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할 것인가? 나눔을 실천할 것인가.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6. 세속사와 구원사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분법적 사고에 잘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매사에 둘로 나누기를 좋아한다.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이고 타종교는 모두 거짓 종교이다,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행이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행이다, 이것은 정통 교리이고 저것은 이단 교리이다, 하나님은 선하고 전능하시며 인간은 악하고 무기력하다, 정치와 종교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등 늘 이런 식이다. 얼마 전 어느 목회자의 글을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젊은이들일수록 정작 사회생활을 할 때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것은 교회가 매사를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깊이 심어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세상일이라는 게 복잡하게 얽혀 있어 두부 자르듯이 반듯하게 둘로 자를 수 없는 법인데, 유연한 개방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틀에 박힌 폐쇄적 사고에 익숙하다보니 사회생활을 하는 데 쓸데없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스무 해 가까이 신학을 공부하면서 어느새 좁은 사고틀에 갇혀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문득 발견하곤 서글퍼진다. 신문을 볼 때도 정치나 경제 기사보다는 종교 기사에 관심이 쏠리게 되고, 시내 서점에 나가 책 구경을 할 때도 대개는 신학 관련 서적들을 뒤적이게 된다. 그러니 현실 인식이 날로 뒤떨어질 수밖에. 문제는, 사고가 그냥 사고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과 행동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편협한 사고는 편협한 행동을 낳는다. 교리 중심의 사고는 신자들의 삶을 독선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목회자와 신자들의 현실 인식이 뒤떨어져서는 교회가 사회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기는커녕 사회 변화를 뒤따르기에도 힘겹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언젠가 교회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그저 죄로 얼룩져 있기만 한 걸까? 신체험(神體驗)은 기도와 금식과 성서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걸까? 기독교 밖의, 교회 밖의 구원을 말하는 것은 이단인가? 세상을 외면한 열심 있는 신앙생활이란 혹시 종교적 이기심의 발로는 아닐까? 세상을 외면한 열심 있는 신앙생활, 종교적 이기심 발로는 아닐까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공관복음서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마태복음에만 겨우 두 번 언급된 까닭은 뭘까? 복음서 저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전하기에는 교회라는 틀이 너무 좁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혹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벌써 교회는 제도화되어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복음서 저자들은 교회에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예수의 활동 무대는 세상 한복판이었다. 소용돌이치는 인간 역사였다. 예수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고 역사의 숨결을 감지했다. 예수가 꿈꾸었던 것은 교회라는 종교제도의 창설이 아니라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였다. 예수가 원했던 것은 자기 추종자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소박한 행복이었다. 예수는 유별나게 성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지극히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밀착된 삶을 살았다. 예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였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세속사를 통과하지 않는 구원사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창조 이래로 ‘하나의 역사’만이 있다. 하나는 성스럽고 하나는 이교적이거나 혹은 세속적인 역사는 없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역사가 인간의 역사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이 역사 안에서다.”(미구에즈 보니노) 성속(聖俗), 구원사와 세속사, 교회 안과 교회 밖, 기독교와 타종교, 믿음과 행함,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영육(靈肉) 이분법은 이제 종말을 고해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와 신자들은 교회에 관심을 갖는 그 이상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닫힌 이분법적 사고에서 상호 연관의 변증법적 사고로의 전환, 이것은 구원의 한 표지다.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읽는 성서》 《함께하는 예배》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신 예수》 등의 저서를 비롯하여, 《트로츠키》 《신비주의 신학》 《냉전과 대학》 《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등의 번역서가 있으며, 《한국의 기독교 명시》 《세계의 기독교 명시》 등을 엮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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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체적으로 세상의 학부를 나오고 원부를 산대원만 나온 사람들이 신학적뿌리가 약합니다.
인본주의적인 면에 호소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인간의 인본주의적인 면에 호소하셨습니까? 물론 성경을 그렇게 읽는 사람들이 많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인간 너희들은 스스로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선한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순수한 사람들이었지요
교황의 정체는 행복십계명에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다 허용하지만 개종전도는 금지합니다 즉 전도는 하지말라는 것이지요.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에 정면 위배될뿐 아니라 바울이 고백했던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욕보이는 망언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