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깨어난 것은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여 책 읽는 나라로 만들었다
위대한 대한민국은 부활의 날에
깨달음의 빛이 비추어
인류의 빛으로 거듭난 날이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인류애의 지혜가 빛을 비춘 날이다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교회에서는 달걀을 나눠 먹고 선물을 하며 부활의 기쁨을 나눈다.
부활절에 달걀을 먹는 전통에 대해 십자군 전쟁 당시 징병 된 남편을 기다리던
여인이 마을 사람들의 친절에 보답하고자 달걀에 색을 칠하고 가훈을 적어 나눠준 데서 시작됐다
달걀의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다.
“너희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사랑으로 행한다는 것은 오래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다.
서로 문안하고,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문안하는 일은 참 귀한 일이고, 사랑으로 행할 일이다.
함께 나눌 작지만 정성 가득한 간식과 선물을 직접 준비해 보면 어떨까.
내가 손수 준비한 간식과 함께 부활절이 모두에게 설레고 행복한 기쁨의 날로 기념되길 바란다.
부활의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위로와 회복의 증거가 되길 소망한다. 샬롬.
한국은
1866 제너럴 서먼호, 영국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하다
1875 로쓰 선교사와 이응찬 만남
1876 로쓰 선교사와 서상윤 만나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번역하다
1883 일본서 이수정 누가, 마가복음(조지 녹스)을 번역하다
1884 호레스 알렌 의료 선교사
1885.4.5. 부활절 날 언더우드(장로교) 아펜젤러(감리교) 한국을 깨우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로, 부활의 날 아침에 사랑의 메시지가 선포 되다
빛으로 깨어나는 나라
세계를 가슴에 품은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깨운다.
복 받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좋아한다
불교의 전파 고구려 소수림왕 372~ 이차돈의 순교 527(약 200)
유교의 전파 안향(주자 1130~1200) 1270~조선조 이언적, 퇴계, 남명, 율곡(1570 약 200년)
천주교의 전파 이승훈(1783~ 초대 신부 김대건), 김수환 추기경(약 200년)
기독교의 전파 언더우드(1885, 4,5 부활절 때) 한국 현대화의 시작 한경직목사(약 100년)
한국의정신 : 홍익인간-화랑정신-호국정신-선비정신-애국정신-새마을정신-문화융합
한국인은 복 받기 위해
종교를 쉽게 받아 들었다
교회를 세워 전파하다
한글을 깨어나게 한 성경 번역
근대 한글은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재발견되고 재창제 된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도착하기 시작했을 때 한글은 용도 폐기된 상태였다.
세종대왕에 의해서 1446년 창제 되었지만
이후 조선의 지도층에 의해서 완전히 외면당하였기에
한글로 축적된 학문도, 문학도 없었다.
그러나 아녀자, 평민이 소통을 하고자 서간문을 쓰다
한글 문학 사씨남정기, 홍길동전, 춘향전, 류충렬전 등이 한글을 지켜왔다
미국의 목사이자 당대의 유명했던 동양학자인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1843.9.17.~1928.2.5.)도 이를 지적한다.
처음 사람을 만나게 하였다
1872년 로쓰와 이응찬의 만남
중국-조선 국경 만주 고려문에서
조선인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이성하를 만나다
로쓰는 1875년부터 이응찬의 도움으로 동료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7~1905)와 함께 누가복음을 조선어로 번역하였다
1878년 한자에 능한 서상륜을 만나다. 1879년 세례를 받다
일본에는 이수정은 1882년 9월 29일 박영효가 이끄는 수신사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간다.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기독교의 거물로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교, 도시샤 대학교 등
설립에 앞장 섰던 츠다 센(津田仙, 1837.8.6.~1908.4.24.)을 찾는다.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츠다 센에게 근대 농법을 배워온
안종수(安宗洙, 1849~1896)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수정 역시 근대 농법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수정은 츠다 센의 집에서 한문으로 된 산상수훈 족자를 읽고
감명 받아 츠다로부터 기독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문 성경을 받는다.
책을 만든다
성경 번역
1878년에는 서상윤(徐相, 1848~1926), 서상우(서경조, 徐景祚, 1852~1938) 형제가
만주에 장사를 하러 간다.
그러나 돈이 다 떨어진 서상윤은 장티푸스에 걸려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로쓰와 매킨타이어는 서상윤을 잉커우의 선교 병원에 데려가 치료해 준다.
1879년 로스에게 세례를 받다. 조선 선교를 위해 성경 번역을 하다
권서인 서상윤은 개혁교회 신앙에 입교한 최초의 조선인 개종자이다.
1882년 3월 24일에 "누가 복음" 3천부가 발간되고,
5월 12일에 "요한 복음" 3천부가 발간된다.
로쓰는 1882년 가을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예수성교 누가복음 전서』와 『예수성교 요한복음 전서』를 출판한다.
이 과정에서 로쓰는 한글의 탁월함을 깨닫는다.
"조선의 글자는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서는 가장 완전한 문자다." 격찬한다
로쓰는 이어서 서상윤, 김진기, 이응찬, 백홍준 등의 도움을 받아
1883년에는 『제자행적』과 『예수 성교 전서 말코 복음』,
1884년에는 『예수 성교 전서 마대복음』을 발간한다.
이때까지 로쓰, 서상윤 등이 번역한 한글 성서는 1만 5천부 넘게 팔린다.
1887년에는 신약성서 전부를 『예수 성교 전서』라는 제목 하에 출판한다.
1883년 서상륜은 성경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인의 마음에 북음을 심었다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최초교회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
1882년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한 이수정은 회심 체험을 하고
회중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한다.
그리고 1883년 4월 29일 도쿄 로게츠쵸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조지 녹스(George W. Knox, 1853~1912)에게 세례를 받는다.
세례 후 이수정은 1883년 6월 한문 신약성서에 조선어 토를 단 『현도 한한 신약성서』,
그리고 국한문 혼용체로 「신약마가복음서언해』를 번역하여
1885년 2월 요쿄하마에서 미국 성서공회를 통해 출판한다.
이어서 『누가복음서』를 번역하고 매클레이 목사의 요청으로
『감리교교리문답서』를 번역한다.
1884년에는 조선어 토를 단 한문복음서 일부분과 『사도행전』 1천부가 출판되고,
1885년 초에는 한글 번역『마가복음』이 인쇄된다.
병원, 학교를 세우다
미국 선교사 1884년 호레스 알렌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5년 이수정에게서 2개월간 조선말을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한국으로 부임하였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다.
언더우드(장로교) 아펜젤러(감리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한글 성경 번역
조선에 정착한 개신교 선교사들 역시 곧바로 성서 번역 작업에 돌입한다.
한글 성서 번역에 동참했던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이눌서, 李訥瑞, 1867.12.11.~1951)는
로쓰역과 이수정역은 원문과 조선어에 조예가 깊은 외국인의 적절한 수정이 없이
조선인 학자들만이 중국어와 일본어 성경에서 번역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이들 선구적 번역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언더우드는 아펜셀러와 함께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재 번역,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고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각처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각종 교육기관을 세우고 관여하였으며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고,
제중원은 1900년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시에 거주하는
세브란스(L. H. Severance) 씨가 거액을 기부하여 병원을 세웠다.
고아원은 후일 경신학교가 되게 하였으며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으로 영신(永信)학당(후일 협성학교가 됨)을 세웠다.
그는 또한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1900년대에는 두개의 신학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서울 소재 감리교의 피어슨 성경학원과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였다.
언더우드는 신학교의 설립 초기부터 평양에 내려가 교수하였다.
1902년부터 길선주, 송인서, 서경조,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방기창
1907년 평양신학 1회 졸업생이 목사안수를 받는다
1912년에는 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다.
중국 산둥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여 해외 선교의 시작이다
1901년 감리교는 김창식(1857~1929), 김기범(1868~1920) 목사 안수
1905년 침례교의 신명균 목사 안수
언더우드는 고등교육 실시를 위하여 대학의 설립을 구상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를 교장으로 하여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경신학교 대학부'가 연희전문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교회를 세우다
1883년 5월16일 서상윤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최초교회 <소래교회>를 설립하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들어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만주에서 로스(John Ross)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윤 등의 인도로 신자이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와 서상윤 등 초기 조선 신자들과의
공동 노력으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새문안교회는 스스로 전도하고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조선인 신자의 첫 교회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목사
동생 서경조는 1887년 한양에서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장로교는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1902년부터 길선주, 송인서, 서경조,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방기창
1907년 평양신학 1회 졸업생이 목사안수를 받는다
1912년에는 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다.
중국 산둥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여 해외 선교의 시작이다
1901년 감리교는 김창식(1857~1929), 김기범(1868~1920) 목사 안수
1905년 침례교의 신명균 목사 안수
로쓰는 한글의 탁월함을 깨닫고
"조선의 글자는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서는 가장 완전한 문자다." 격찬한다
1919.3.1. 독립 선언문 대표(기독교 16, 천도교 15, 불교 2명)
일제 강정기 말 신사 참배 반대 운동
1907 평양대부흥회
1973 빌리그레함 서울 광장 100만 부흥회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여 책을 읽게 하고
교육으로 한국을 깨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