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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분원 나눔입니다
+ 마르 6, 53-56(연중 5주 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 생긴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민수 15,37-41 참조)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 이영근 신부님 강론입니다.
2월10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마르코 6,53-56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은 아이처럼 희망하라
어렸을 때 들었던 뉴스인데 충격적이어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아내가 버스 추락사고로 죽었던 그곳에서 남편이 며칠 뒤에 투신하여 자살한 사건이었습니다.
자살은 죄라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여인이 없으면 못 살겠다는 순정남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어떤 이들은 그 잃은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끙끙 앓으며 평생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희망’한 것이 아니라 ‘욕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희망과 욕망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병자들과 그 가족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병이 낫기를 희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희망한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병이 치유되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망하지 않고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희망하는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해도 포기가 빠릅니다.
아이가 엄마 옷자락을 잡고 이것저것을 사달라고 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이것은 사 주고 저것은 사주지 않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금방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이렇게 희망하는 대상이 창조자가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이 욕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포기할 줄 모릅니다.
못내 갖지 못한 것을 아쉬워합니다.
희망은 바라기도 잘하지만,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곧 포기하고 다른 것을 희망합니다.
정약용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세종대왕, 이순신 다음으로 큰 인물이 될 수 있었고 사실 그렇게 큰
인물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정조의 아버지는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입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영조와 신하들의 등쌀 밑에서 자랐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고 그 방법으로 집현전이란 학문 연구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해 왕권을 굳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 정약용입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놀리기까지 하며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정조의 숙원사업인 수원성을 축조할 때 정약용이 짓게 맡긴 것은 그만큼 그를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조의 노력을 싫어했던 정치 세력들은 어떻게 하면 새로운 세력을 몰아낼까
궁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발견된 것이 천주교입니다.
정조가 키운 남인과 실학자들이 천주교에 엮인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정약용은 배교함으로써 간신히 죽음은 면했습니다.
그러나 관직을 떠나있어야 했습니다.
정조는 시간이 지나면 그를 다시 부르겠다고 조용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궁궐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들어가기 하루 전에 정조가 죽습니다.
절망할 수도 있는 정약용은 계속 살길을 모색하지만, 이번엔 더 큰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정작 그는 배교했음에도 그의 가문은 벼슬길이 막히는 폐족이 되고 정약용은 무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좌절했을까요? 그는 18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는 엄청난 책들을 씁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이 유배 생활하는 동안 이룬
것입니다.
그가 쓴 책이 몇 권인지 아십니까? 무려 500여 권에 달합니다.
약 2주에 한 권씩 책을 쓴 셈입니다.
그가 온종일 양반다리로 앉아 책만 썼기에 복숭아뼈가 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앉아서는 책을 쓸 수 없어서 일어서서 책을 썼습니다.
그의 가문에 폐족이 되었지만,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누명이 벗겨질 테니까 희망하며 공부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자녀들은 늦게나마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원나라에 항복하겠다고 고려의 세자가 황제를 찾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40년간 버틴 것도 대단하지만 황제에게 노쇠한 임금의 아들이 대신 간 것입니다.
이때 몽골의 황제는 죽고 두 인물이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해 힘을 겨루는 중이었습니다.
이때 고려의 세자는 많은 정보를 수집해 앞으로 황제가 될 한 인물을 선택하여 그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이는 황제가 되는 중요한 입지를 주는 항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자도 이것을 이용해 고려는 원나라의 변발과 같은 것을 따르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항복하는 중에도 협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잃은 것은 잃은 것이고 희망해야 할 것은 희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망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희망하는 자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것을 희망합니다.
희망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갖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파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모든 것을 다 줄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실제로 희망과 믿음을 지닌 신앙인이었다고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0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마르코 6,53-56
치유되기 위하여
여기저기 아파보면서 얻게 된 깨달음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질병, 예를 들면 피부병이라든지 타박상, 찰과상이라든지 골절상 같은 병은 꾸준히 치료하면 대체로 빨리 낫습니다.
빠르게는 한두 주일, 길게면 한 달 두 달 길어봐야 6개월, 1년입니다.
그런데 치료하기가 더 어려운 질병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질병입니다.
위장이나 대장 질환, 간이나 혈관질환 등등. 우선 잘 보이지 않기에 치료도 복잡하고 힘들뿐 아니라
질병이 만성질환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내부의 질병보다 더 치료가 어려운 질병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정신의 질환, 영혼의 질병입니다.
이 질병이 무서운 것이 사람에 따라서 자각증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질병의 상태가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본인이 잘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자는 자신 겪고 있는 영혼의 질환이 마치도 ‘말기 암 증상’과도 같은 데도 불구하고 우선 살아 숨쉬기에 그걸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치료를 위해서는 현재 병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 그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질병의 심각성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간 몰랐었는데 강렬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빛으로 인해
자신들의 어두움, 자신들이 앓고 있는 질병의 심각성을 낱낱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만사 제쳐두고 치유자이신 예수님께로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마르코 6장 54~55절)
예수님 앞으로 달려온 환자들은 앞 다투어 자신들의 깊은 상처를 가감 없이 그분께 보여드렸습니다.
마치 놀다가 다친 어린아이가 울면서 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가 기적적인 치유의 은총이었습니다.
기적적 치유에 이르기까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스스로 심각한 환자임을 솔직히 고백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환부를 예수님께 보여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자비하신 분, 우리를 향한 무한한 측은지심을 지니고 계신 분, 그래서 우리를 죽음의 질병에서 구원해주실 전지전능한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굳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런 저런 내과적 질환, 외과적 질환, 정신과적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은 아무래도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 최상책이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질병, 영혼의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우리 마음과 영혼의 주치의이신 예수님께로 달려가셔야겠습니다.
영혼의 질병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보물인 성경을 손에 드셔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5주간 월요일 강론>
(2025. 2. 10. 월)(마르 6,53-56)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예수님도 고치실 수 없는 병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1)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치유의 은총’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일이 아니라, 즉 복음 선포를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복음 선포였습니다.
사람들은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고,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믿고 희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을 ‘그 나라로 인도해 주시는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병의 치유로만 만족하고서 그냥 가버린 사람들도 많았고......
2) 질병의 고통은 인간이 겪는 고통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모든 처지를 가엾게 여기셨지만,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특별히 더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라면, 그냥 고치면 되는데,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병자들을 당신이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
당신의 말씀만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는 “열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니, 그 명령에 복종하고 열이 떠나갔다.”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이 말은 어떤 백인대장이 한 말인데, 그는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3)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신 분이지만, 예수님도 고치시지 못하는 병자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자기는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치료받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에 병을 고쳐 달라는 청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런 사람들은 고쳐 주시지 못합니다.
자기가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기가 병자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지 않는 사람들도 고쳐 주실 수가 없습니다.
원래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원하지도 않고 받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4) 자신의 병을 고통스러워하고, 치유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또 치유를 위해서 노력하긴 하는데, 몸의 건강만 생각하고 영혼의 건강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병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치유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8-9).
그런데 그는 안식일 규정에 관한 문제로 시비가 붙자,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신고했습니다(요한 5,15).
그것은 명백하게 ‘배은망덕’이고, 자기가 받은 은총을 스스로 ‘헛일’로 만들어버린 일입니다.
몸의 병은 고쳤지만, 영혼의 병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탓입니다.
5) 몸의 병을 고치는 것은, 또 몸의 건강을 되찾고 유지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만 건강하고 영혼은 병든 상태라면,
그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에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몸’이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지 말고 ‘영혼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더 나쁜 일’은 ‘구원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신고한 것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한 것이기 때문에, ‘더 나쁜 일’은 그가 예수님을 신고할 때 이미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