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이 우승한 뒤에 가진 연주회에서 1점을 줬던 필립 앙트르몽을 찾아가 인사하고 있다.>
- 지난달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21세의 잘생긴 조성진이
우리나라 피아니스트로는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틀에 걸쳐 그의 연주를 들어봤는데, 단
한 음도 소홀하지 않은 섬세하면서도 열정적인 터치가 그렇게 완벽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대가였다. 그런데 심사위원 중 프랑스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필립 앙트르몽(82살)이 결
선에서 10점 만점에 1점을 줬다. 다른 15명의 심사위원들이 워낙 높은 점수를 줘서 전혀 영향
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자칫하면 순위가 바뀔 수도 있는 채점이었다. 심보가 고약하거나 판단
력이 떨어졌기 때문일 터. 어느 경우든 그는 더 이상 국제대회 심사위원 자격이 없다. 다행히
조성진 군은 그럴 수도 있다며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역시 스물한살의 어린 청년, 우리
나라 기자와 가진 인터뷰 내용이 천진하기만 하다.
“우승한 뒤 뭐가 제일 좋던가요?”
“이제 그 힘든 콩쿠르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가장 좋아요.” -
도담삼봉은 워낙 아담하고 정겹게 생겨 예로부터 단양팔경 가운데 일반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단양의 수문장이자 방문객을 맞이하는 영접사다. 남한강이 크게 휘돌아가면서 물이 호수처럼 고여 있다고 하여 도담(嶋潭), 봉우리가 세 개라고 해서 삼봉이라 불린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임할 때 지은 이름이다. 도담삼봉은 석회암 지형이 만들어낸 세 개의 원추형 기암이다. 가운데 가장 높은 장군봉(높이 6m)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바짝 붙어 있는 봉우리를 첩봉(妾蜂), 왼쪽에 약간 떨어져서 등을 돌린 채 토라져 앉아 있는 봉우리를 처봉(妻峰)이라고 작명한 선현들의 위트가 익살스럽다. 도담삼봉은 충주댐 건설로 3분의 1 가량이 물에 잠겨 있다. 수운이 활발하던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각종 장사꾼들이 몰려들어 강 양안에 나루가 번창했다.
도담삼봉은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절시(絶詩)와 명화를 남겼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띠뱃노래>를 비롯하여 숱한 명곡으로 구현되기도 했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1342~1398)이 도담삼봉에서 ‘삼봉’이라는 호를 따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단양군 측의 아전인수다. 정도전은 외가인 단양에서 태어났으되 경상도 순안현(지금의 영주)과 경기도 양주에서 성장했다. 그가 ‘삼봉’이라는 호를 지은 것은 개경에서 벼슬을 할 때로서, 양주에 있는 삼각산(지금의 서울 북한산)에서 따왔다. 장군봉에는 삼도정이라는 육각 정자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장군봉에 정자를 지은 사람은 영조 42년(1776) 단양군수로 재임 중이던 조정세로서 처음 이름은 능영정이라 했다. 이후 홍수로 수차 떠내려가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다가, 1976년 다시는 떠내려가지 못하게 아예 콘크리트로 정자를 짓고 이름을 삼도정이라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배를 타야 건너갈 수 있기 때문에 찾는 이들이 드물어 봉우리도 정자도 잘 보존되고 있다.
조선조 말기부터 외국인들이 이땅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그들도 혹은 안내를 받아, 혹은 소문을 듣고 도담삼봉을 찾아왔다. 영국의 유명한 여성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은 영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1897년 간행)에서 도담삼봉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한강의 아름다움은 도담에서 절정을 이룬다. 낮게 깔린 강변과 우뚝 솟은 석회암 절벽, 그 건너편 푸른 언덕배기에 서 있는 처마가 낮고 갈색 지붕을 한 초가집들이 그림처럼 정답다. 도담 주변은 내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절경이었다.’
답사팀을 태운 버스가 멀리 도담삼봉을 바라보며 지나갈 때, 유홍준은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지질학자 기근도 교수에게 물었다.
“지질학에서는 저런 절경이 어떻게 생겨났다고 설명하나요?”
“카르스트 지형이 낳은 특징적인 형태죠. 중국의 장가계나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같은 태생인데, 화강암이 발달한 우리나라는 노년기 지형이다 보니 깎여나갈 건 다 깎여나가고 저처럼 엑기스만 남았지요. 장구한 세월이 만들어낸 정원석이라고나 할까요?”
대자연의 정원석, 전문가의 해석은 언제나 명쾌하다.
워낙 절경이다 보니 이름난 화가 치고 도담삼봉을 화제(畵題)로 담아내지 않은 이가 없었다. 도담삼봉을 그리지 않은 화가는 그야말로 간첩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겸재 정선을 필두로 호생관 최북, 진재 김윤겸, 단원 김홍도 등 조선을 주름잡던 유명 화가들은 너도나도 도담삼봉을 찾아 명화를 남겼다. 유홍준은 그 가운데 단연 압권은 김홍도의 『병진년 화첩』에 실려 있는 <도담삼봉도>라고 했다. 마치 헬리콥터를 타고 상공을 날면서 그린 듯하다는 평가다. 『병진년 화첩』에는 다른 단양팔경과 함께 한양에서 단양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까지 쉬지 않고 그린 수많은 경관들이 수록되어 있다.
정도전이 단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의 ‘믿거나 말거나’ 한 에피소드 한 토막. 그때까지 단양군에서는 ‘정선에 있던 도담삼봉이 홍수 때 단양으로 떠내려 왔다’는 고사(古事)에 따라 해마다 정선현에 세금을 바치고 있었다. 그해에도 가을이 되자 어김없이 정선의 아전들이 세금을 받으러 왔다. 일행이 동헌에서 군수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 웬 아이가 불쑥 끼어들어 세금을 줘선 안 된다고 소리쳤다. 군수가 놀라 연유를 물으니 소년 왈, ‘삼봉은 단양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굴러왔으니 우리가 도로 보관료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했다. 어린 정도전의 기막힌 지적을 좇아 단양군에서는 그해부터 세금을 바치지 않았다나? 비슷한 일화는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구암공원의 구암(龜庵)이라는 바위에도 얽혀 있다.
첫댓글 도담삼봉을 두어번 찾아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 왔지만 도담삼봉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비로소 남작가의 글을 대함이로세.
또한 첩봉과 처봉이라는 지적도 마찬가지고,
요즘은 나름데로 바쁘다는 핑게로 홈피에 잘 들리지를 않네만 들려서
남작가의 구수하고고 예리한 필취에 언제나 흠벅 젖어 간다네. 고마우이, 친구.
그를 심사위원으로 뽑히게 한 조직이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