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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_연산군의禁標碑
이 비석에 하나에
연산군 폭정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자신의 사냥과 유흥을 위해
도성밖 100리의 민가들을 모조리 철거해서 경계를 삼는 금표를 세우고
범입자는 참수형에 처한다는 끔직한 내용입니다.
실록에만 존재해 왔던 '禁標碑'가
1994년
실제로 고양시 대자동에서 500년만에 땅속에 묻힌채 발견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기훼제서율이 1504년 연산군이 공표한 한글사용 금지법입니다.
언문으로 임금을 비난하는 글이 난무하자 아예 한글을 금지한 법률입니다.
대자동에서 발견된 이 비석은 금표구역 침입범을 이 한글사용 금지법 위반자와 동일하게 처벌한다는 내용입니다
<처참(處斬)은 목을 벤다>는 것입니다
폭군__연산군 금표비,폭정의 흔적이 발견된다__고양시 대자동
.#영월__청령포금표비(淸冷浦禁標碑)
청령포 금표비 (淸冷浦禁標碑)
비운의 왕 단종의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에 세위진 비석입니다.
1726년 영조 2년 (단종 사후 270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금표를 기준으로
동서 300척 남북 490척 이내는 백성들이 출입해 벌채를 하거나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출입을 禁한다는 내용입니다.
#은언군묘역,사패,금표비
은평구 한옥역사박물관 마당에 있습니다
바로 "은언군 묘역 사패 금표비"입니다.
이름 그대로 은언군 묘역에 있었으나 여러 경로를 거쳐
현재 위치에 있게 되었답니다.
그럼 은언군은 누구이고,
이 비석은 어떤 뜻을 담고 있을까요?
<은언군은 누구>?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1801)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철종의 할아버지입니다.
왕의 동생이라는 입장 때문에 그는 생전에 많은 정치적 위협과 견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786년(정조 10)에 홍국영이 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을 정조의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려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 보내집니다. 관료들은 은언군의 사형을 주장했지만, 정조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801년(순조1)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신씨가 중국인 천주교 신부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은 일이 발각되어 결국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합니다.
철종 어진 ⓒ문화재청
이후 손자인 덕완군 이원범이 조선 25대 임금인 철종(哲宗)으로 즉위하면서 은언군 일가는 복권됩니다. 그러면서 이말산에 은언군의 묘역이 크게 마련됩니다. 은언군의 무덤에는 신도비와 묘표, 다양한 석물들이 새워지고, 묘역 주변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각(祭閣)이라는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현재에도 은평구에는 제각말이라는 지명이 남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은언군 묘역 추정터 ⓒ서울역사박물관
하지만 은언군의 묘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현재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은언군의 묘역임을 알려주는 석물들도 다른 장소로 이전되었다고 합니다.
은언군 묘역 사패 금표비 탁본
비석에는
"은언군묘소자내사패금표 동삼□□(恩彦君墓所字內賜牌禁標 東三□□)"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자내(字內)는 도성 안팎에서 군인들이 경호나 순찰하는 구역을 의미합니다.
사패(賜牌)는 사패지(賜牌地)라고 하여 왕이 직접 하사한 땅을 의미합니다.
금표(禁標)는 출입이나 접근을 금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볼 때 은언군 묘역은 왕이 하사한, 그리고 군인들이 순찰하던 중요한 지역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특별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글씨로 동삼□□(東三□□)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마지막 두 글자는 마모가 심해 확인할 수 없으나
동삼천동(東三川洞)로 추정되며
곧, 묘역의 동쪽 경계가 삼천동이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비석은 은언군 묘역 주변이 중요 지역이므로
함부로 출입이나 접근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은평한옥역사박물관 참조)
感辭합니다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