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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
딤전 4:1-5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 4:1-5 / [거짓 교사들] 그러나 성령께서 분명하게 일러주신대로 종말의 때가 되면 교회 안에도 그리스도를 떠나 악마의 가르침을 퍼뜨리는 교사들을 열심히 따라가는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 2) 그런 교사들은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어 천연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3) 그리고 결혼하는 것도 나쁘고 고기를 먹는 것도 나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니 믿음으로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4) 하나님께서 만든 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고 먹으면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5) 어떤 음식이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말세에 많은 사람들이 이단 사상과 거짓된 교훈에 미혹되어 바른 믿음을 저버리게 될 것과 혼인과 육식을 금하는 영지주의적 금욕주의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을 떠나(1-2) 영지주의 중 혼인을 금하는 자들과 육식을 금하는 유대적 금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보다 높은 믿음을 가진 자라고 주장하였지만, 그들은 믿음보다 지식을 더 높은 위치에 두고 그 지식을 추구하였습니다. 미혹의 영이란 마귀의 또 다른 이름으로(딤전 3:6, 7)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여 바른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영적 존재입니다(마 24:15; 요일 4:6; 계 12:9). 귀신은 마귀의 지배를 받는 악한 영입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다’라는 표현은 신약 성경 중 이곳에만 있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당시 노예들은 이마나 신체 일부를 불로 지져서 그 주인의 소유임을 표시하였는데 그 지진 부분은 감각이 없어지고 딱딱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화인 맞았다는 것은 사람의 양심이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어 양심의 기능이 굳어져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없게 되며,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엡 4:19). 외식이란 양심이 마비됨으로 본심에도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떠나게 하며 결국은 성령을 거스려 반역하게 됩니다.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3-5) 이런 사상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금욕주의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주장하며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혼인과 육식을 금하는 영지주의적 금욕주의와 유대주의적 금욕주의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였습니다. 그들은 금욕을 통해서만 영혼의 거룩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으며 육체에 대한 정죄와 결혼을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피조물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인간의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에 의해 왜곡될 수 없습니다.
적용: 이 시대의 이단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배격해야 할까요?
모든 시대의 교회가 이단과 싸웠습니다. 이 싸움의 무기는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가 선하며 우리를 위해 풍성히 허락하셨음을 증거하는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해와 이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구하는 기도가 약해질 때마다 어김없이 악하고 거짓되고 미혹하는 가르침들이 교회 안에 파고들어 옵니다. 이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늘 말씀과 믿음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 설 교 >
'달콤한 미혹의 영을 경계하라'
딤전 4:1-2 / 노경모 목사
요즈음 마약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대마초, 코카인, 헤로인, 양귀비 등 마약의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얼마전에 도심 공원에 대마초를 재배한 60대 남자가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마약이 아주 나쁜 것인줄 알면서도 한 번 마약을 맛들인 자가 마약을 못 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도박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박이 너무나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도박을 시작한 사람은 도박을 끊기가 아주 힘든 것입니다.
마약보다 더 무섭고 도박보다 더 나쁘면서도 마약보다도 도박보다도 더 달콤하게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미혹의 영입니다. 미혹의 영은 마귀와 사단을 말하지요. 미혹의 영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미혹의 영이 바로 이단입니다. 이단(異端)이라는 말의 뜻은 ‘끝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처음은 성경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다 같은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완전히 다릅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시작은 성경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구분이 잘 가지가 않습니다.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참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요즈음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중국에도 이단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이단들이 중국으로 진출하고 중국의 이단들이 한국으로 진출합니다. 우리는 이단을 비롯한 미혹의 영들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미혹의 영들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읽어 봅시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자, 그렇다면 미혹의 영을 구분하는 기준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 다른 예수입니다.
우리를 구원주가 되시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태어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예수님은 심판하러 재림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이를 통해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사도행전 4장 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단의 교주는 예수는 구원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구원을 완성한 구원주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세상을 심판하러 재림한 재림주요 구원주라고 합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예수 즉 거짓 예수요, 거짓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미리아시고 마태복음 24장 4-5절과 23-2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거짓 그리스도, 거짓 재림주, 거짓 선지자들 이들은 마귀의 압잪이요 마귀 자체입니다. 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결국 자기를 믿게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요, 자기가 예수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다른 영입니다.
다른 영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십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영을 다 믿어서는 안됩니다. 영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나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마귀의 영, 사단의 영, 거짓 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아닌 것은 다 거짓 영이고 어두움의 영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영들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들어 옵니까?
1. 거짓 영은 욕심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찹니다. 그래서 그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욕심을 통해서 마귀가 가룟 유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잘 2절을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 삼십은 오늘날로 말하면 한 200만원 되는 돈입니다. 200만원에 대한 돈 욕심 때문에 마귀 짓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돈 욕심, 이성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이런 욕심 때문에 성령이 아닌 다른 영, 어둠의 영, 마귀의 영이 들어오게 됩니다. 거짓말하고 죄를 짓고, 끔찍한 일을 행합니다. 이런 것들을 믿는 자들은 경계해야 합니다.
2. 거짓 영은 불순종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로마서 5장 1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순종이 거짓 영으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왕도 불순종의 마음이 생길 때 어둠이 영이 그 속에 들어와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거짓말하게 만듭니다. 드디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불순종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불순종하려는 마음이 솟구치려고 한다면 ‘아’ 거짓 영이 나에게 들어오려고 하는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재빨리 불순종의 마음을 순종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3. 거짓 영은 우리의 마음이 비어있을 때 들어옵니다.
마태복음 12장 43-45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우리의 마음은 성령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면 거짓 영으로 채움을 받게 됩니다. 빈 공간으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합니다.
4. 거짓 영은 무지할 때 들어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무지해서 거짓 선지자들, 거짓 교사들, 이단들이 가르치고 전파하는 집회나 모임에 가는 경우들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는 안됩니다. 거기 가서 가르침을 받거나, 부르짖거나 사모하거나 기도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거짓 영이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거짓 영을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를 싫어하고 귀찮아하면서 은혜받기만을 사모한다면 잘못된 것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래서 빠지는 것입니다. 나는 좀 안다고 자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배워야 합니다. 수준 있게 배워야 합니다. 매일 젖만 먹으려하면 안됩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5장 12-14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말씀도 좀 높은 수준의 내용을 배우는 것을 꺼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은 거짓 복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1. 성경의 복음은 인간은 죄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로마서 12장 3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은 죄를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죄를 말하면, ‘당신은 죄인입니다.’ 말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의 강단에서 죄에 대한 설교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죄가 얼마나 무섭고, 죄를 얼마나 하나님이 싫어하는 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말입니다.
그 대신 무엇을 강조하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가 믿게 됩니다.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결국 하나님의 사랑만을 말하고 당신은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은 달콤한 미혹의 말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2. 성경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만 구원받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복음을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종교다원주의(多元主義)를 주장합니다. 석가모니를 통해서, 마호메트를 통해서, 공자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단의 교주들은 예수가 아니라 자기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3. 성경의 복음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의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편하게 잘 살기만을 바랍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 말하는 다른 복음, 거짓 복음에 미혹되기 쉽습니다. 거기에선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축복, 형통, 평안만을 말합니다. 축복과 형통과 평안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우리의 삶의 주된 모습이어야 합니다. 축복과 형통과 평안은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역이지 내 영역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나를 통해서 예수님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님의 성품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혼탁하고 혼란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깨어서 기도하고 어두움의 영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을 우리를 삼키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사단은 광명한 천사처럼 우리를 미혹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의 선한 일꾼
딤전 4:1-10 / 피종진 목사
‘일꾼’이라는 이 말은 옛날 사람들이 사용했던 의미와 현대 사람들이 사용하는 의미의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사용했던 일꾼의 의미는 ‘머슴이나 종, 하인’ 등 아주 천박한 사람들의 노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꾼의 의미는 존경받을 대상이고, 보람되게 사는 사람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에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죄악된 일이 아닌 것은 다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에 보람과 기쁨이 있기를 바라고, 또 많은 열매가 맺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일꾼이 되되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선한 일꾼은
첫째, 믿음이 요동치 않는 자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1절) 여기에 보면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난 자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의 선한 일꾼은 절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요동치 않아야 합니다. 환경과 여건에 따라 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요동치 않는 자가 되려면 맡은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13) 우리는 제각기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 일에 전심전력을 다할 때에 거기에 따라 믿음이 견고해지고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가장 큰 사명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즉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교회와 성도는 그 믿음이 갈수록 견고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7,8에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둘째,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수용할 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4절) 선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철학자요 법학자인 힐티는 말하기를 ‘아침이면 아침마다, 눈을 뜨면 뜰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하면 착한 일을 할 기회가 날마다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 매일 매일처럼 하나님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불평을 자주 하면 악한 행동을 하게 되지만, 선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면 좋은 일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을 사귈 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사귀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시인 브레이크는 말하기를 ‘감사하며 받는 자는 풍부한 수확이 오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수용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라는 말은 ‘찬양’이라는 뜻도 되고, ‘복’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찬양이 넘치는 사람이고, 복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사 속에 찬양이 있게 하시고, 감사 속에 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5절) 디모데후서 3:16,17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도덕 윤리나 철학은 인간의 정서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온전케 하고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의 선한 일꾼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이기게 하는 검이고, 질병을 치료해주는 검이며, 여러분들을 보호해주는 무기이고, 생명입니다. 주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생명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씨앗은 겨자씨 같이 지극히 작은 씨앗이라 할지라도 자라서 열매를 맺고 큰 무성한 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죽은 씨앗은 아무리 큰 씨앗이라 할지라도 싹도 나지 않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심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살아서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이끌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형통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그리고 예수의 선한 일꾼된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고 세우신 모든 것들을 본래의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세상의 빛과 소금, 제사장과 성전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넷째,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는 자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10절)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능력의 창조주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둔 예수의 선한 일꾼은 그 어떠한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6:17에 보면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풀러는 ‘위대한 희망은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품고 산다는 것은 바로 성공을 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소망을 품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 응답을 보장 받고 사는 것입니다.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3에도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선한 일꾼은 믿음이 요동치 않는 자,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수용할 줄 아는 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있는 자,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는 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요동치 않고 맡은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키며,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수용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며,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는 예수의 선한 일꾼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1-11 / 마경훈 목사
어떤 신부님이 어두운 밤에 뉴욕 맨해튼의 거리를 걸어가다가 칼을 든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라고 위협하는데 신부님은 돈도 없었고 그날 따라 시계도 차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주머니에 있는 담뱃갑을 꺼내서 이거라도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강도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강도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이 "신부님은 사순절에도 담배를 피우십니까? 나는 사순절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하면서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순절이라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강도짓은 직업의식을 가지고 충실하게 하고 있는 강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된 경건, 왜곡된 경건을 가르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엄숙한 것을 경건함으로 착각하고 예배 시간에 부동자세로 눈동자도 굴리지 않는 것을 경건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식에 따라 화석화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취향이겠지만 성경적인 경건은 아닙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으로 가득하여 하나님다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한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다워지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보혜사 성령께서 오셨고, 이 일을 위하여 목회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엡 1:9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다워지는 경건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능력과 열매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들의 삶과 사역에 놀라운 능력과 기적이 나타났던 것처럼 지금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맺으시는 인격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갈 5:22, 23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람이 변화됩니다.
경건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7절을 보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말합니다. 연습해야 합니다. 여기서 연습한다는 말은 운동선수가 어떤 기능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단 훈련이 되어지면 무의식중에도 훈련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경건에 이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감사생활이 잘 훈련된 사람은 어떻습니까? 감사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입에서 감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다른 영적인 덕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 훈련을 통해서 저절로 되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까?
8절에서 답을 가르쳐 줍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건강한 것처럼 육체의 연습은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경건의 연습이 주는 유익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래서 약간의 유익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연습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가르쳐 줍니다. 육체의 연습은 이 땅에서만 유익이 되지만 경건의 연습은 살아서도 유익이며 죽어서도 유익입니다. 이 땅에서도 유익이지만 천국에서도 유익입니다. 가장 큰 투자가 경건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기는 누가 연습해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연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목회자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도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한다고 말합니다. 둘째는 사역의 초기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디모데서는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는 젊은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도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역초기부터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바빠져서 훈련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경건 없이 사역을 하게 되기 때문에 사역이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합니다. 9절에 보니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경건에 이르기는 어떻게 연습해야 합니까?
첫째, 성령의 인도를 받으므로 연습하십시오(1절).
사도 바울이 시대를 분별하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진리를 배우게 된 것은 성령이 밝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기도의 지성소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보혜사로 오셨습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돕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동차에 부착하는 길 안내 시스템이 있습니다. 두 가지 목적으로 부착합니다. 목적지에 안전하며 가장 빠른 길을 안내 받기 위한 목적과 또 하나는 과속방지용 카메라를 발견해서 단속을 피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한참 달리다보면 경보음이 나거나 음성으로 길을 안내해줍니다. 전방 몇 m 앞에 감시 카메라가 있는 것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들려주는 정보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길도 쉽게 찾을 수 있고 과속카메라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계획을 이루어 드리게 되며, 사단이 파놓은 함정도 잘 피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시대를 분별하므로 연습하십시오(1-3절).
1-3절에 보면 후일에 되어질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말세의 특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①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②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아갑니다. ③ 양심에 화인 맞아서 외식하므로 거짓말을 합니다. ④ 정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납니다. 지금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지금이 종말의 시대입니다. 말세지말이라는 말이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곧 오십니다. 마 25:13에서는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후 3:9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말씀에서 말하는 주의 약속은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말세지말입니다.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방학이 끝나 가면 아이들은 숙제하느라 바쁩니다. 지금이 그런 시기입니다.
셋째, 감사하므로 연습하십시오(3-4절).
식물을 폐하는 자들이 나 올 것인데, 무엇이든지 감사하므로 먹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 어떤 음식을 안 먹느냐로 경건을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고기를 먹으면 불경건하고 안 먹으면 경건하고 하는 식으로 보지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하므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없어서 감사를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지 않아서 그렇지 빈 마음으로 자신의 주변을 보면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운전을 하다가 자동차가 일곱 바퀴나 굴렀는데도 다치지도 않고 살았습니다. 그는 너무나 놀랍고 감사해서 그의 아버지에게 흥분된 어조로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일곱 바퀴를 돌았는데도 하나도 다치지 않았으니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나는 너 보다 더 감사하구나", "왜요? 아버지는 여덟 바퀴라도 굴렀나요?", "아니 나는 한 바퀴도 구르지 않았으니 감사한 일 아니니!". 감사를 연습하십시오. 더 많은 감사 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습하십시오(5-6절).
본문에서 말씀의 유익을 몇 가지 말합니다. ① 거룩해 집니다. ② 형제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③ 선한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④ 신자가 양육을 받습니다.
말씀을 생활의 표준으로 삼으십시오. 환경이나 감정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뱃사공은 망망대해에서 느낌으로 방향을 잡지 않습니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면 말씀으로 분별 해보세요. 사람 생각에 아무리 옳아보여도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에 아무리 틀린 것 같아도 말씀이 맞다면 맞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고, 힘써 설교를 들으십시오. 가능하면 많은 말씀을 암송하시고 말씀이 나의 생각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말씀이 풍성하면 풍성한 만큼 생각이 하나님다워지며 생활이 하나님다워지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기도로 연습하십시오(5절).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많이 하면 그 사람과 나의 사고가 비슷해지는 것처럼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한만큼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어 경건해지는 것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결 몇 가지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①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연약한 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자신을 능력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② 기도를 잘 하려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③ 건강한 가정생활을 유지하십시오. 벧전 3:7에 보면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④ 철저히 죄악을 처리하십시오. 기도의 내용이 좋고, 기도를 강하게 하더라도 죄가 처리되어야 하나님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⑤ 많이 해봐야 잘하게 됩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앉아있어야 합니다. 훈련해야 합니다.
여섯째,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는 것으로 연습하십시오(7절).
신앙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역시 우리들 생각에 잘못된 생각들을 집어넣어서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올바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을 떨어뜨리는 생각들을 버리는 훈련을 하십시오. 경건은 외모만이 아니라 생각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소망으로 연습하십시오(10절).
나의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살피십시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나의 소망이라면 경건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 6:17에 보면 그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사 주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내가 만약 돈이 있고 환경이 좋을 때는 소망이 있다가 돈이 사라지고 환경이 좋지 않을 때는 소망이 사라진다면 나의 소망은 돈이나 환경입니다. 하나님으로 소망을 삼는 사람은 돈이 없어도, 환경이 좋지 않아도 소망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환경이나 돈이나 감정이나 사람이 여러분의 소망을 흔들어 놓으려고 한다면 이렇게 외치십시오. "사단아 물러가라 나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여덟째, 예배로 연습하십시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을 집약시킨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능력이 공급되는 시간이며,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사랑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 사람의 진짜 신앙은 예배드림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믿고 지금도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믿는다면 어찌 예배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고 싶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배를 사모하게 됩니다. 예배드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 사랑은 증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배에 힘을 쓰십시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요 4:23). 이제 예배 보다 더 중요한 것, 예배보다 더 급한 것은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이 찾으시는 시간, 찾으시는 장소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교훈에 대한 경고
딤전 4:1-5 / 박조준 목사
사도 바울은 오늘 주신 말씀에서 디모데에게 거짓된 교훈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 고 떠나면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 에베소 교회에 이단자의 침투가 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성 도들이 미혹 당할 것이라는 점을 이미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이 사실 을 경고한바가 있었습니다. 오늘 생각하게 되는 말씀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언적 경고의 반복이고 그보다도 이미 이단 침투의 징조가 현실화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 20장 29절 이하에 보며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남아 있는 지도자들에 게 부탁하며 경고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29-32절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 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쫓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 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사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 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29-32) 이 말씀은 에베소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부탁이요 권명이요 경고였습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뒤를 이어 에베소 교회를 지도하고 말씀으 로 먹여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었던 디모데에게 꼭 같은 사실을 반복해서 경고하고 있습 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 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과거에 바울이 친히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경고했 던 그 경고를 다시 한번 회상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울로 이제 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 운 마귀의 계략, 다시 말하면 그릇된 교훈에서부터 사랑하는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목회자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항상 성도들의 심령을 바로 지도하고 돌보기 위해서 전념하고 있다는 사실 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 어떤 때는 우리 귀에 좀 거슬리는 말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잘못된 길로 나아 가지 않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마음에 두고 있으면 사랑으로 수용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의 표현을 보아도 어떤 때는 좀 심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 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중심에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랑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잘못된 가르침의 배후에는 어떤 세력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 다. 1절 말씀에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그릇된 가르침의 배후 세력 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건전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가르침의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했을 때는 그들 배후에 악한 영이 도사리고 있 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결국 영적인 싸움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6장에서 경고한 것처럼 우 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 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칠 때 그것은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저지르는 단 순한 지적인 실수가 아니라 바로 사단의 역사요 악한 영의 계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 리의 구원을 좌우할 수 있는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를 왜곡시키는 모든 가르침의 배후에 는 언제나 악한 영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두 가지 표준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인격이요 다른 하나는 그들의 가르침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인격, 다시 말해서 그들의 도적적인 삶의 모습을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이라 그 인격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이단에 끌려들어 가게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에 대한 문제입니다. 인격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이단은 가려내기가 쉽습니다. 분명하게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사 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쉽게 그들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집단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 니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것은 행동이나 인격이 아주 건전한 경우입니다 그런 경에는 우리는 그들 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쳐도 그것을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단은 때때로 천사를 가장하듯이 훌륭한 인격과 행위의 소유자를 이용해서 그들의 입술을 통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게 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잘못된 가르침이 진리로 위장 돌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런 경우는 아주 미묘하고 간교해서 아주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은 그 부인이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이 되어서 거기에 끌려가 있어 그 목사님이 당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에 따라 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을 어떤 일을 합니까? 몇가지 그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1.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1절 말씀에 후 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건설적인 호기심이 있고 파괴적인 호기심이 있습니다. 건 설적인 호기심은 위대한 원리를 발견하고 훌륭한 물건을 발명해서 사회와 인유를 위해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뉴톤은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호기심을 가져서 연구하고 연구한 결과 만유 인력의 법칙은 발견한 것 아닙니까? 주전자 물이 끓은 것을 보고 뚜껑이 움직이는데 호기 심을 가지고 연구할 결과 중기 기관을 발명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문명의 이기는 건설적인 호기 심에서부터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호기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을 망칠 뿐 아니라 사회에 큰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왜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 하시고,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까지 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류를 타락시켰습니까?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마귀는 이 호기심을 이용해서 인간을 타락시키는 술법을 사용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호기 심이 발동했고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것만 같아서 결국 따먹 은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결국 몸에 해로운 담배를 왜 피웁니까? 어떻게 배우게 되었어요? 호기심 때문입니다.
마약을 왜 하게 됩니까? 호기심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범죄가 근본은 호기심에서부터 생기게 됩니다. 마귀는 종종 이 호기심을 이용해 서 우리의 귀를 가볍게 만듭니다. 무슨 새로운 소리가 없을까? 좀 신기한 이야기나 없을까? 마 귀는 이러한 우리의 호기심을 이용해서 결정적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누가 와서 당신은 이런 것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고 접근하면 우리는 귀가 솔깃해 서 쉽게 따라가게 됩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마귀의 중요한 전략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기 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 다. 그것은 그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종교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교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일본 도쿄 지하철에 있었던 가스 사건이 오움진리교라는 이단 종교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 을 여러분이 아시지 않습니까? 혹 어떤 분은 왜 설교자의 마음이 그렇게 좁으냐고 비난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설 교자의 관용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문제이고 생명이 걸려있는 아주 중요 한 문제입니다. 진리에 관한 한 바울은 엄격했고 양보가 없고 독선적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10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실까요.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 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 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면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 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 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저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 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의미있는 말씀 입니다. 목사에게도 가장 큰 유혹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말하려 는 유혹입니다. 옛날 거짓 선지자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죄 지은 백성과 관리들을 향해서 형통 한다, 평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죄 지은 사람에게 망한다고 하면 싫어하니까 평안합니다, 하나님 이 축복하십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옛날만 그랬습니까? 군사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차지한 사람 앞에 가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귀한 자 리 차지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축복기도하고 했으니 옛날 거짓 선지자와 다른 것이 있습니까? 디모데후서 4장 4절에 뭐랬어요?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했습 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사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소리를 듣고 싶어합니다. 자기를 책망하는 진 리의 소리보다도 개인적인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럴듯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러한 소리에 더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사단은 이런 인간의 결정적인 약점을 이용해서 우리를 미혹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영생교 교주가 하는 말을 TV화면을 통해서 들어 보셨지요 여러분이 지금 100만원만 내시면 내가 그때 세단 자동차 주고 자가용 비행기도 줄테니까 그러면 아멘 아멘 하면서 발광을 합니다. 이런 잘못된 호기심을 마귀는 이용합니다. 2. 외식합니다.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한다 고 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의 말은 위선적이고 없다는 말입니다. 일관성이 없는 것이야말로 이단의 제일 가는 특성 중 에 하나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형편 따라 달라지고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책들은 개정되고 수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개정된 일이 있습니까? 오랜 역사 속에서 한번도 수정된 일이 없지마는 시대와 함께 영원히 살아서 변함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변 화시키고 있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이라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입니다. 3. 거짓말합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을 잡아 놓기 위해 서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마귀의 특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귀는 거짓 말이 본업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보아도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을 혹시 보게 되는데 이것은 마귀에게 영향을 받고 마귀의 지배하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에베소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대적하라고 하면 서 첫째 무기로 무엇을 말씀했어요?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지식 이 부족할 수 있고, 돈이 없을 수 있습니다. 권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진실하지 못하면 그것이 부끄러울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 당시에 어떤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기에 이런 강력한 권면과 경고를 하고 있 습니까? 그것이 바로 노스티시즘이라고 말하는 영지주의 입니다. 영지주의가 무엇인데요? 영지주의는 헬라의 철학과 교류하면서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금욕주의와 쾌락 주의의 극단적인 사상을 낳게 한 것입니다. 자기를 절제하면서 이러 이러한 일은 하지 않는 금 욕주의와 자기 음 내키는 대로 거의 모든 일을 해 가면서 인생을 즐기는 쾌락주의는 상반된 것 같지만 사실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원론의 주장이 무엇입니까? 물질이나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이 깨 끗하고 선하다는 것이 소위 이원론 사상의 뿌리입니다. 여기에서 금욕주의가 나왔는데 그들은 더러운 육체를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영혼은 깨끗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육체에 고통을 가 하면 가할수록 영혼이 더욱 깨끗해진다는 이 사상은 동양철학에도 많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쾌락주의는 영지주의와 어떤 연결이 있습니까? 영지주의자들은 이 더러운 육체는 아무 리 노력해도 선해지거나 거룩해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믿습니다.
육체는 그냥 내버려두어도 영혼은 절대로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에 한해서는 될대로 되 라는 식으로 쾌락을 즐기는 쾌락주의는 서로 모순된 사상 같지만 실제는 이렇게 같은 뿌리에서 부터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금욕주의도 아니고 쾌락주의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잘 못된 사상을 다 경계하기 위해서 디모데전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특별히 쾌락주의를 경계하는 메시지가 많이 나옵니다. 가령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 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여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 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1-5) 했습니다. 이 쾌락에 대한 경고는 그 당시 영지주의가 터뜨린 쾌락주의적 영향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됩 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에서는 영지주의의 한 형태인 금욕주의에 대해서 특별히 경계하고 있습니 다. 그러면 그 당시 거짓된 교사들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가르치고 있었던 거짓 교훈의 내 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십시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이것은 둘다 하나님의 창조 원칙에 대한 위반입니다. 혼인을 금하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날 사람인 남자를 창조하심으로 창 조의 절정을 이루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로 한 몸을 이룰 수 있 도록 계획하시고 그들의 결혼을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인데 결혼을 반대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 자체가 악하지 않은 것은 이 몸을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우리의 몸이 귀한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뿐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당시에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은 육체에 관한 모든 것들을 악하다고 말 했습니다. 더구나 어떤 사람들은 주님 오실 날도 멀지 않았는데 거룩하게 살아야지 무엇 때문에 결혼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것은 결혼을 했느냐 안 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 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람의 거룩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을 보세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 님이 심판하시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히 음행이나 간음을 경계했습 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혼을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혼인을 귀하게 여기라 고 말씀했습 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매우 귀한 것이기 때문에 잘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처럼 결혼의 문제에 관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진리를 선포하는 종교는 아마 없을 것입 니다.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에서는 식물을 폐하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식물이 무슨 음식인지는 자 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어떤 음식은 먹을 수 있고 어떤 음식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가리킨 것 같습니다. 금식은 귀한 것이고 때로는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금식한 예를 많이 기 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삶의 방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먹고 살게 되어 있습니 다. 그러므로 먹는 것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금식이 경우에 따라 필요하지만 그것이 영성의 척도가 될 때는 문제가 됩니다. 가령 금식하는 것이 그 사람이 거룩해지고 구원받는 사람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처럼 생각 한다면 그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경향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어떤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 하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식물을 폐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9절을 보세요. 여러가 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 할 것이 아니니 식물 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아름다워 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 운데 머물고 주님과 더불어 동행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영성과 관련시키고 그 것에 의해서 우리의 거룩함이 좌우되는 것처럼 강조된다고 하면 그리고 그것으로 구원의 정도를 측정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결 론을 내렸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고 했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마지막 5절에서 결론적으로 거룩함의 길이 무엇인가를 말 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문제는 동기와 목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태도로 무엇을 위해 먹느냐 하 는 동기와 목적에 따라서 그 사람이 세속적인지 영적인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 서 10장 31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단 한번의 삶의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합니까?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우리의 삶이 도구로 사용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우리가 이런 절실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 수 있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거룩한 일이 될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우리 마음 중심으로부터 아멘 할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
풍성한 삶을 위한 비결
딤전 4:!-5 / 박근호 목사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고 싶어서 밤낮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정성이 갸륵해서였는지 하루는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더니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어디어디에 가 있으면 도사가 그리로 지나갈 터인데 그에게 긴말할 것 없이 '그 보물을 나에게 주시오'하고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백발 노인이 꿈에 일러 준 장소에 서 있자니 과연 바랑을 짊어진 도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짜고짜 말하기를 '그 보물을 나에게 주시오' 했습니다. 그랬더니 도사는 말없이 바랑을 뒤져 주먹만한 다이아몬드를 꺼내 들고는 '이것 말이요? 그럽시다. 자, 가지시오'하고는 던지다시피 안겨주고 가던 길을 휘적휘적 걸어갔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를 얻었으니 이제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 그는 서둘러 도사가 가는 길의 반대쪽으로 내달렸습니다. 행여 처음 먹은 마음이 달라져서 도사가 보물을 돌려달랄까봐 겁이 나서 바삐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걷다보니 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이 두려워졌습니다. 혹여 내 보물을 빼앗아가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나절을 도망치듯 달려가던 이 사람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뭔가 꼴똘히 생각을 하더니만 급히 발길을 돌려 도사가 사라져 간 쪽으로 달려갑니다. 그 날 밤 수소문 끝에 도사가 묵고 있는 여관에 도착해서는 네 활개를 벌리고 자고 있는 도사를 깨웠습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도사는 눈을 부비며 일어납니다. '아니, 왜 그러시오? 보물을 가져가고선 왜 또 날 찾아온게요?' 그러자 그 사람은 품에서 다이아몬드를 꺼내 도사에게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것 소용없소. 당신이 도로 가지시오. 그 대신에...' '그 대신에, 뭐요?' '그 대신에 이런 보물을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내어 주고도 아무렇지 않은 당신의 그 부요함을 내게 좀 주시오. 나는 이것보다 그것을 더 갖고 싶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참으로 부요한 삶을 산다는 게 뭔가를 새삼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부요한 삶, 풍성한 삶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요? 물질의 풍성함일까요? 우리 세대가 불행한 것은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지고도 불안해하고 넘치는데도 불만족해 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요?...
믿음 안에 살면서 새삼 깨닫는 진리는 '행복이란 현실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생각 속에 있다'는 발견입니다. 일찌기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사람을 가리켜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 사람은 생각함으로 사람이요 또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겠습니다. 즉 사람은 누구든지 그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고 또 그 '갈대'라는 표현처럼 그 생각이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꾸 이리 저리 흔들리며 바뀌어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실 행복은 '생각 속에서 즐기는 것'입니다. 행복은 현실 속에 있지 않고 의식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좋은 물건을 받았다고 해서 다 기분이 좋은 건만은 아닙니다. 받고서 즐거울 수 있지만 또 찜찜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건네 준 선물이라면 그것으로 인해 기분이 썩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도를 깔고 반대급부를 요청하며 건네주는 뇌물로 인해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해 하기도 하며 사는 겁니다. 생각을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행, 불행을 경험하기에 생각이라는 것, 의식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인생의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풍성한 삶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재산이 많고 물질이 풍성하고 소유가 넉넉한데 행복이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으로, 어떤 의식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느냐에 행복이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겨지십니까?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적 권면의 성격을 띤 편지글 중의 일부입니다. 그는 3절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네가 목회하는 교회 안에 결혼을 금하고 금식을 명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교회 안에 금욕적인 가르침으로 다가오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영을 들먹이며 나온다는 것이고 그게 진리인양 주장하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 영은 속이는 영이요 저들의 교훈은 사탄의 가르침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음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아 먹으면 된다'고 권면합니다.
결혼과 음식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디모데가 목회하는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좋은 것이요 음식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좋은 것이라는 입장과 결혼은 악한 것이요 금식하지 아니하고 음식을 때마다 먹는 것은 영성생활에 합당하지 않다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 시각이요 하나는 긍정적 시각입니다. 이런 갈등과 마찰이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는 긍정적 사고에 손을 들어줍니다. '결혼도 좋은 것이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것이다. 결혼을 금할 필요가 없고 음식을 못먹게 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무엇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펴느냐 하는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 사도는 '그것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남녀가 하나되는 결혼도 창조시에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이요 음식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먹고 취하여 더욱 번성하고 창대케 되라고 주신 선물로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수용'이 풍성한 삶의 전망을 여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숙한 신앙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무엇으로 '성숙한 신앙이다 아니다'를 가름하십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이요 복받을 신앙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범사에 감사하고 긍정하는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할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 유익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악까지도 선용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믿는 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입니다. 신앙을 빙자하여 자기 주장이나 자기 경험을 절대시하는 것은 병든 신앙이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버릴 것이 없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돌아보면 우리들은 옛날에 참 많은 것을 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다 재활용해서 쓰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옛날 버린 것들 중에 보물이 참 많았습니다. 저희도 도자기, 고가구 등이 꽤 있었는데 그거 다 거저주다시피 팔았습니다. 강냉이 장수한테 강냉이 몇 바구니 받고 다 줘버렸습니다. 그 귀한 유기그릇을 닦을 필요 없다는 이유만으로 스텐그릇과 1:1로 바꾸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인생에 버릴 것이 없다는 의식,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의식을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고난과 아픔까지도 내팽개쳐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게 다 복의 씨앗입니다. 우리가 때로 시련을 겪습니다. 시련 중에 가장 힘든 시련은 자식으로 인한 시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자식으로 시험하셨겠습니까? 그게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요 견디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가장 약한 아킬레스건이 바로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과 아픔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거기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통전적인 가족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처럼 내 신앙이 우뚝 서는 걸 발견합니다. 내 마지막 우상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기에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시인은 노래한 게 아니겠습니까?
힘들다고 버려서는 안됩니다. 버겁다고 떨쳐버려서도 안됩니다. 그걸 알처럼 품고 계속해서 굴리면 거기서 놀라운 새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기 보다 자기중심의 자리에서 생각하려 들기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계속해서 불평과 원망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전기, 전축, 전화라는 큰 공헌을 인류에게 남겼습니다. '빛과 소리의 발명'은 참으로 가장 위대한 발명입니다. 이것은 눈과 귀의 확대로 문명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을 아주 싫어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싫어했을까요? 그건 바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에디슨을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저들은 잔업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기가 없을 때는 해만 지면 작업 끝이었는데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 해가 져도 불을 켜고 작업을 하게 되니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에디슨을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을 미워한 노동자들의 태도가 합당한 것입니까? 전기로 인해서 얻는 유익이 얼마나 많은데... 죽어가는 사람을 살립니다. 반딧불 아래서 책을 읽던 학생이 환한 불빛 아래서 더 많은 책을 잃고 지식을 쌓아 인류역사에 공헌합니다. 전기로 인해 얻는 유익이 너무도 많지만 나에게 이런 불편을 주니 미워한다는 저들의 태도가 합당한 것입니까?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사람이 자기중심에 갇혀버리면 불평과 원망에 익숙해지게 되고 자기중심을 벗어버리면 감사와 긍정에 익숙해지게 되는 겁니다. 감사함으로 받질 못함으로서 우리는 풍성한 삶을 놓치고 사는 겁니다.
미국 교계에 유명한 오르가니스트로 해피니스 조운스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미국 LA의 가든 글로브 처치에서 목회하는 로버트 슐러 목사는 100만불이 넘는 세계적인 오르간을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그 처녀 연주를 이 해피니스 조운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이런 간증이 따라다닙니다.
조운스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잘해서 16세에 음악대학에 조기입학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피아노를 잘쳐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열심히 실력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중도에 그만 팔목이 상했습니다. 피아노는 팔목에 힘을 주고 쳐야하는 것이기에 팔목이 상하면 제대로 칠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낙심했고 또 한편으론 그것을 극복하느라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상한 팔목으로는 연주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제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중 그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손은 그렇지만 발은 성하지 않느냐?...'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발로 하는 음악이 무엇일까?... 발로 연주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는 오르간을 시작했습니다. 오르간 건반은 피아노처럼 그렇게 힘을 주어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타건이 피아노처럼 힘이 드는 게 아닙니다. 이미 기교는 피아노를 통해 다 습득이 되었기에 그녀는 발을 연습해서 아주 훌륭한 오르가니스트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손목을 꺾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오르가니스트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역경을 딛고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때에 하나님은 그녀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자기중심을 벗고 감사와 긍정에 익숙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게 풍성한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입니다. 이게 안되면 그는 결코 풍성한 삶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감사와 긍정에 익숙한 삶이 가능하게 될까요?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사도는 4절과 5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여기 그리스도인이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한 네 가지 공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의식을 갖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신 세상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두 번째 풍성한 삶을 위해 가져야할 의식은 '감사'입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즉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지만 그러나 그 선의 세계 속에 악한 것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속임수의 귀재인 사탄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을 분별과 선택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살전5:20절에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또 롬12: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ㅇ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양약만 있는 게 아니라 독약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잘 분별해야 하는 겁니다.
정말 요즈음 우리들이 얼마나 선택과 분별이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옛날에는 영화관만 하나 정하면 되었습니다. 내가 보고자 하는 프로를 상영하는 극장을 선택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릇습니다. 구미에도 하루에 다섯 프로를 상영하는 곳이 있더군요. 서울엔 수십개를 상영하는 영화관이 있고 미국엔 스튜디어 28이라고 해서 스물 여덟 개의 영화를 상영하는 곳도 있습니다. TV 채널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4개 채널이었던 TV가 요즘엔 수십개 채널이 되었습니다. 커피는 또 어떻습니까? 옛날엔 그냥 '커피 주세요'하면 되었는데 요즘에는 '카프치노, 비엔나, 모카, 헤이즐럿, 에스프레소, 카페 라떼 등등' 부지기수입니다.
이렇게 선택거리가 많다는 것은 분명 기쁨과 만족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와 함께 주어지는 것이 바로 책임입니다. 얼마 전에 김천제일교회 헌신예배에 갔다가 예배 후 목양실에서 조목사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안수집사회장이 들어와서는 '목사님, 저희에게 맡겨주신 구제 건 말인데요. 우리끼리 잘 안되네요. 좀 오셔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그럽니다. 선택이란 게 쉬운 게 아닙니다.
이런 세상을 올바른 선택 속에 살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두 가지 필수적인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는 것은 풍성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필수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풍성한 삶을 사는 세 번째 비결이요 기도가 또한 네 번째 비결입니다. 일반적 지식은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충만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과 습관과 운명과 가치를 개혁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생활, 신앙생활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사회학적 통계를 보면 넉달만 교회에 안나오면 완전히 안믿는 사람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세상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알아듣든 못알아듣든, 기분이 좋든 나쁘든, 내키든 안내키든 하늘나라 백성은 교회엘 나와야 합니다. 사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다 은혜받는 건 아니지요. 어쩌다 공치는 날도 있고 졸다 가는 날도 있지만 그래도 나와야 합니다. 그게 다 어우러져서 은혜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한 가지 좋아하는 것만 먹고 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때로는 신 것, 쓴 것, 단 것 등등 여러 가지를 다 맛봅니다. 그 모두가 어우러져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겁니다. 감기 걸려 입맛이 없다 해도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맛이 있건 없건 먹어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도 우리 귀에 쉽게 들려올 때가 있고 잘 이해가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프리즘을 통해 무한한 세계를 바라보게 되고 평소에 보지 못하던 깊은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의 맛들인 사람치고 건강하지 않은 신앙인이 없습니다. 또 말씀의 맛을 알지 못하는 사람치고 건강한 신앙인이 없습니다. 시1편에 보면 복있는 자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악인의 꾀에 빠지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잘 보십시오.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악인의 꾀에 빠지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가 복있는 자가 아니라 복있는 자가 거기에 물들지 않는 겁니다.
그 복이란 게 뭡니까?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복입니다. 말씀이 즐거운 겁니다. 말씀이 행복의 원천인 겁니다. 그게 내 보물입니다. 내가 넉넉한 것, 좋은 것을 손에 쥐고 있어 스스로 행복하면 남의 것 기웃거릴 일 없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곳에 왜 오셨습니까? 모처럼의 쉼의 날에 가고 싶은 데 많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보다 여기가 더 행복하기에, 그곳보다 이곳이 더 중요하기에 여기 나온 겁니다.
말씀을 우리의 풍성한 삶을 가리키는 지도요 나침판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잘 살펴야 하는 겁니다. '한번 여행을 하려면 적어도 3개월은 준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도 미리 공부하고 간 것과 그냥 간 것과는 얻는 것이 다릅니다. 공부 안하고 온 사람들은 그저 '더워서 못살겠다', '음식은 왜 이러냐', '요단강이 뭐 이러냐' 투덜거리고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공부하고 가면 그 의미가 새롭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받아들이는 건 다른 겁니다.
지난 주간에 1박2일 일정으로 전반기 신앙테마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이 일을 계획할 때 망설임이 많았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다 여유없이 바삐 사는데 괜히 위화감느끼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우리 교우들만큼 여행과 쉼을 갖기 어려운 분들도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망설임 속에 첫 번째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의외로 설악산엘 못가보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한편으론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비행기타고 동남아다, 유럽이다, 카나다다, 호주다 하며 다니는 때인데 우리 땅마저 밟아보지 못할 정도로 현실에 매어 산다면...
이번에 가신 분들이 모두 다 좋아하셨습니다. 주일 지난 월요일이라 출발할 때는 모두들 몸이 안좋으셨는데 오실 때는 모두 다 아픈 몸들이 거뜬해지셨습니다. 일정을 좀 빡빡하게 잡았지만 그래도 뭐 그렇게 타이트하게 진행되지 않고 비교적 여유롭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건 이번 여행의 가이드가 3개월을 준비한 가이드가 아니라 50년을 준비한 가이드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그곳에서 살았으니 뭐 그쪽은 훤합니다. 그러니 뭐 그리 헤맬 것이 없었던 것이지요.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그 인생을 결정짓습니다. 가장 좋은 일을 생각하고 가장 아름다운 일을 생각하며 사십시다. 말씀과 기도의 세계에서 우리는 가장 좋은 일, 아름다운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못보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다른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보다 먼 미래를 바라보고 보다 더 깊은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믿는 것이요 그 결과로 믿는 바를 보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감사가 넘치는 긍정적이고도 풍성한 삶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골사는 한 엄마와 아들이 모처럼 시내 백화점엘 갔습니다. 너무도 화려한 시설과 장식 그리고 즐비하게 진열된 물건들을 보면서 엄마는 모처럼 신이 났습니다. 그 넓은 매장을 이리저리 다니느라 시간가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와는 달리 자꾸 징징대면서 울기만 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너 왜 엄마가 좋은 곳엘 데려왔는데 자꾸 징징대니?'하고 물었더니 아이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엄마, 내 눈에는 지금 아줌마들 엉덩이밖에 안보여요...' 키가 작아서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 좋을 것도 없고 즐길 것도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 아무 것도 못보니깐 징징대는 겁니다. 주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니깐 불평과 원망 속에 사는 겁니다. 눈을 열어 주님의 선한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 평화가 있고 자유함이 있고 여유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져서 깊고 높고 넓고 긴 그 세계를 바라보며 사십시오. 거기에 바로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미혹 당하지 말라
딤전 4:1-5 / 박찬길 목사
여러분 짝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가짜인데 진짜 같은 것을 짝퉁이라고 말합니다. 모조품이지요. 세계에서 제일 많은 짝퉁이 만들어지는 지역이 아시아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도 한 몫 감당한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요. 짝퉁의 강국은 어디일까요? 중국이랍니다. 얼마 전에 비즈니스 위크지에 따르면 전 세계에 돌아다니는 짝퉁의 60% 이상이 중국에서 만들어진답니다. 5천억 달러 어치 이상이라고 하니까 엄청난 겁니다.
세계적인 제약회사인 화이자의 CEO인 '헨리 맥키널'이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중국 내의 위조 공장이 화이자의 본사 공장보다 크다" 상상이 안 갑니다. 짝퉁의 종류도 다양하답니다. 장난감을 비롯해서 가방, 신발, 옷, 전자제품, 셀폰, 식품, 자동차까지 없는 것이 없답니다. 요즘은 퀄리티도 좋아져서 보통 사람들은 어떤 것이 진짜인지, 어떤 것이 가짜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짝퉁에 대하여 중국의 젊은이들을 풍자적으로 빗댄 말이 있습니다. '아디도스'(Adidas) 트레이닝복을 입고 'HIKE'(Nike) 운동화를 신고, '애미콜'(Anicall) 휴대폰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피자허'(Pizza Hut)에 갈까 '못데리아'(Lotteria)에 갈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McDuck'(Mc Donald's)에 가서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 햄버거를 먹고 난 뒤에는 '돌체앤바나나'(Dolce & Gabbana)에서 썬 글라스를 하나 샀다.
짝퉁은 물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계에도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짝퉁이 있어요. 기독교의 짝퉁은 무엇일까요? 이단과 사이비입니다. 이단(異端)은 한자로 다를 이(異)자에 끝 단(端)자를 쓰지요. 기독교인 것 같은 데 끝이 다르다는 말이에요. 사이비(似而非)는 한자로 같을 사(似)자에 말 이을 이(而)자와 아닐 비(非)자를 쓰지요. 겉으로는 비슷한데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여러분, 짝퉁이 왜 문제가 되지요? 상거래 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품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정품의 이미지를 떨어뜨리지요. 정품 회사의 신뢰를 훼손시킵니다. 기업의 매출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져다줍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짝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들의 교리를 만들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킵니다. 교인들에게 파당을 짓게 해서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교회를 빙자해서 기독교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비판합니다. 그 비판 위에 자기들의 교리를 정당화합니다. 나중에는 교인들을 미혹해서 끌고 나갑니다. 교회를 무너지게 합니다.
사실 이단이나 사이비는 최근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워지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단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많은 도전과 방해를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유난히 심했던 것 같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단과 거짓교사들로 인해서 아주 골치가 아팠습니다. 디모데전서 전체나 오늘 본문 말씀을 가만히 읽어보면 에베소교회가 이단이나 사이비로 인해서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의 이단 중에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영지주의(靈智主義)였습니다. 당시 영지주의는 교회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은 귀하고 육체는 경멸했습니다. 이원론적인 이론을 강조하는 집단이지요. 그래서 영적인 것은 엄청나게 강조하면서도 육적인 것은 죄악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정했습니다. 육체가 악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오늘 3절에 보면 결혼을 금한다고 말하지요. 고기를 먹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하지요. 결혼은 육적인 쾌락을 좇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금한 것이고, 고기는 육체를 강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한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금식을 강조하고 고행을 강조했습니다.
자, 교회에 이러한 잘못된 교리가 들어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어요. 디모데의 목회가 되겠어요? 교인들의 신앙이 예수님 중심으로 건강하게 자라겠어요. 에베소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겠어요? 어림도 없지요. 그래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고기를 먹지 말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된다.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먹어라. 이러한 것을 교인들에게 잘 가르치라고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요즘에도 교회에 잘못된 교리가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단이나 사이비와 같은 집단이 들어와서 교인들을 현혹시킬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신앙으로 교인들의 신앙을 흔들 수가 있습니다. 가정을 파탄시킬 수가 있습니다. 교회를 어지럽힐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그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를 대표적으로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신천지'이잖아요. 신천지는 이만희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 주장합니다. 자신이 보혜사라고 주장하고, 재림주라고 주장하고, 자신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직통하는 자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요. 처음에는 성경을 가지고 하다가 점차적으로 끌고 들어가는 거예요. 기독교와 끝이 다르지요.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어서 빠지는지 모릅니다. 북가주에도 상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들어와 있는지 모르지요.
여러분,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할까요?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혹이라는 말은 무엇에 홀려서 속는 것을 말하지요. 본질에서 이탈하는 것이 미혹입니다. 누구 말을 들으니까 저렇게 하면 돈을 번다고 해서 했어요. 그런데 안 되는 거예요. 미혹 당한 겁니다. 이렇게 다이어트 하면 한 달에 10파운드가 빠진다고 해서 했는데 안 빠지는 거예요. 미혹 당한 겁니다. 저기 가면 은사도 받고 성령 충만해진다고 해서 갔는데 안 되는 거예요. 미혹 당한 겁니다. 성도는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에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성도는 왜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할까요? 미혹하는 것은 마귀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이 믿음 가운데 서지 못하도록 부단히 미혹합니다. 마귀의 사명은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어서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거든요.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를 멀리하려고 합니다. 마귀는 신앙생활을 게으르게 해서 주일을 빼 먹게 하려고 미혹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서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게 하고, 성도들 사이에 불신을 만들어서 미워하도록 미혹합니다. 이단의 그럴듯한 말로 미혹합니다.
보세요. 이단들이 접근해 올 때에 성경공부하자고 말합니다. 저기 가면 성경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데 함께 가서 공부합시다. 많은 교인들이 성경공부하자고 하니까 저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인가보다 하고는 따라갑니다. 이거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이단들이 처음에는 우리와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공부시킵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자기들이 내세우는 교리가 나옵니다. 성도들이 그것도 성경말씀인 줄로 알고 그냥 넘어갑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신앙도 잘못되고 가정도 잘못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미혹 당해서 그런 거예요.
성경공부는 자신이 섬기는 제단에서 하는 것이 옳은 겁니다. 성도는 다른 단체나 교회에서 성경을 아무리 잘 가르치고 쪼갠다고 해도 가면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성도가 성경공부하자고 말해도 따라가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교인을 데리고 성경공부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닙니까? 교회 안에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잖아요. 흑심이 있으니까 데려다가 하겠지요.
신앙이 건강한 목사님은 자기 교회의 성경 공부에 절대로 다른 교인을 데려오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제자훈련에 다른 교인을 데려오는 것 보셨어요. 7월부터 15기 제자훈련이 시작되지만 다른 교인은 받지 않습니다. 또 믿음이 좋은 교인도 자기가 교인들을 데려다가 성경공부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한 클래스를 담당해서 가르치라고 하기 이전에, 자신이 나서서 우리 성경공부 합시다. 이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성경 공부를 잘 가르치는 데가 있다고 해도 솔깃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성경공부하자고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미혹하지도 말고 미혹 당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직장에서는 부지런히 일해야지요. 학교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야지요. 가정에서는 행복하게 살아야지요. 괜히 미혹 당해서 신앙생활을 혼란스럽게 하고, 미혹 당해서 직장이나 학교 소홀히 하고, 미혹 당해서 가정을 파괴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건강한 신앙생활이 아니잖아요.
사실 우리를 미혹하는 것은 사람이지요. 마태복음 24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지요.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4절에서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누구에게도 어떤 사람에게도 속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사람은 사람에게 미혹 받습니다. 사람이 동물에게 미혹 받지는 않잖아요. 사람이 사람에게 속아요.
그렇다면 사람이 왜 사람에게 미혹 받을까요? 지식이나 지혜가 부족해서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미혹하는 사람 뒤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미혹하는 사람에게 시켜서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혹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거지요. 1절 말씀에서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는다는 말이 나오는데, 새번역 성경으로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을 따른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영적입니다. 에베소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잖아요.
여러분, 우리는 사람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영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신앙생활에서만큼은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은데 행동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사람이 있지요.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하고 직분도 있다는데 예수 믿는 사람의 향기가 나지 않은 사람이 있지요.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말로는 성경 이야기를 하는데 행동은 자기 중심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도 있지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미혹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럴듯한 말을 해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미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말을 잘합니까? 성경을 모르는 것이 없잖아요. 구약이면 구약, 신약이면 신약, 뭐든지 물어보면 척척박사입니다. 또 교회에 얼마나 비판적입니까? 교회도 오래 다녔고 직분도 있으니 교회 사정을 너무나 잘 알지요. 그래서 이것은 이렇게 해야 하는데 저렇게 한다고 말하고, 저것은 저렇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한다고 말하고..., 그런데 본인은 하지도 않지요. 늘 말로만 합니다.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고는 자신은 기도하지 않아요. 은혜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는 정작 본인은 예배 시간에 딴 곳에 가 있어요. 헌금해야 한다고 말하고는 생색만 내요. 우리는 여기에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도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미혹 당하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하도 많이 자신에게 미혹 당해서 미혹 당하는지도 모르고 미혹 당합니다. 자연스러워졌어요. 보세요? 자신이 쌓은 성경 지식에 미혹 당해서 성령을 자신이 제한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미혹 당해서 교회 안에서도 세상 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나 인본주의적 신학에 미혹 당해서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능력이 없어서 무능에 미혹 당해 놓고는 다른 소리를 한단 말입니다.
그뿐인가요? 예배 드릴 시간에 밖에 서성이면서 좀 늦게 들어가도 괜찮아 합니다. 스스로에게 미혹 당한 겁니다. 속회 시간에 커피 마시면서 환담하는 것도 자신에게 미혹 당한 겁니다. 기도할 시간에 운동하는 것도 미혹 당한 겁니다. 오늘은 바쁜 일이 있으니까 교회에 빠지자. 바쁜 일에 스스로 미혹 당하는 겁니다. 내 신앙생활에 방해하는 모든 것은 나를 미혹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생활에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별의 영을 받아서 미혹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주로 미혹을 당할까요? 마귀는 어떤 사람을 미혹시킬까요? 본질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미혹 당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지요. 말씀과 기도지요. 초대교회에 보면 사도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구제를 담당하는 집사를 세우면서 사도들은 본질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6장 4절에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교회나 교인의 본질은 기도와 말씀, 말씀과 기도입니다. 오늘 5절에서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했잖아요.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면 미혹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교인들이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면 미혹 당합니까? 본질에 충실하면 미혹 당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는데 누구에게 미혹을 당합니까?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영력을 얻는데 어떻게 미혹 당합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지 않고 다른 것에 충실하니까 미혹 당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충실합니까?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에 충실합니다. 학문에 충실하고, 이론에 충실하고, 논쟁에 충실하고, 남 흉보는 데에 충실하고, 연속극에 충실하고, 인터넷에 충실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충실해야 할 부분에 충실하지 않고 여기에 충실하니까 미혹 당하는 겁니다. 이것을 마귀가 노리는 거예요.
요즘 저에게 없는 능력이 하나 생겼습니다. 예배 시간에 교인을 졸게(?) 하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설교 시간에 졸거나 묵상하는 교인이 한 두 사람 생긴 것 같아요. 목사가 교인을 졸게 하는 능력은 안 받아도 되는데 받았나봐요. 그래 졸게 하는 능력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데 잘 안 돼요. 물론 눈은 감았어도 듣기는 다 들어요. 설교 끝 부분에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아멘하고 눈을 뜨거든요. 자면 아멘 하겠어요. 다 듣고 있으니까 아멘하겠지요.
여러분, 예배 시간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예배에 충실해야 합니다. 다른 것에 정신을 빼앗길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가 뭐예요?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잖아요. 하나님을 만나서 죄를 용서받고 은혜를 받는 자리가 예배잖아요. 세상에 이처럼 중요한 자리가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영적인 힘을 얻고, 죄를 용서받아야 심령이 평안하고, 은혜를 받아야 승리할 수가 있는 거예요.
은혜를 받는 통로가 설교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설교에 집중해야 합니다. 설교가 시원찮아도 잘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집에 반찬이 시원찮아도 먹어야 힘을 내서 일하는 것처럼, 설교를 잘 못해도 잘 들어야 영적인 힘이 생겨서 일주일을 힘있고 능력있게 지내게 되는 거예요.
영국의 유명한 부흥전도자인 로랜드 힐 목사님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여러 마리의 돼지가 한눈도 팔지 않고 어떤 사람을 졸졸 쫓아가고 있는 거예요. 마치 양이 목자를 따라가듯 말이지요. 호기심이 생긴 목사님이 돼지들의 뒤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농부가 도살장으로 인도하는데도 돼지들이 아무런 반항 없이 따라서 들어가는 거예요.
신기하게 생각한 힐 목사님이 그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어떻게 해서 당신이 돼지들을 이곳까지 쉽게 몰고 올 수 있었습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겁니다. "나에게 비결이 있지요. 나는 완두콩 바구니를 들고 오면서 계속 몇 알씩 흘려주었지요. 우리 집 돼지는 완두콩을 좋아하거든요."
힐 목사님은 큰 깨달음을 받고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바로 이것이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이다. 마귀는 쾌락의 콩, 욕망의 콩, 우매의 콩, 죄의 콩, 돈의 콩 등, 사람들이 좋아하는 콩알을 계속 뿌리고 간다. 많은 사람들이 그 콩을 주워먹으면서 생각 없이 계속 따라가다가 영혼의 도살장인 지옥으로 가게 된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어떤 콩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마귀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관심사에 유혹의 콩을 계속 뿌리면서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인은 자신이 무엇에 약한지를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나의 관심사는 내가 알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쉽게 미혹 당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어떤 사람은 거짓에 쉽게 미혹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에 미혹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땀 흘리지 않고 쉽게 돈 버는 것에 미혹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을 흉보는 말에 미혹 당해서 자신이 더 흉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동차에 미혹 당해서 새 차만 나오면 은혜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집에 미혹 당하는 사람도 있고, 자녀 교육에 미혹 당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미리 알고 있으면 예방이 되어서 마귀가 미혹해도 따라가지 않겠지요.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세에는 세상이 자꾸만 혼란스러워집니다. 악한 영들이 활개를 치며 미혹합니다. 이 세상에서 미혹 당하지 않으려면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충실해야 합니다. 예배에 충실해야 합니다. 성경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인들은 성경에 있느냐 없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미혹 당하지 않는 겁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느니 안 했느니, 나를 어떻게 대했느니 안 했느니, 다른 사람들이 인사를 하니 안 하니, 나와 맞느니 틀리니...,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경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성경만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면 틀림없습니다. 미혹 당하지 않습니다. 성경과 틀리면 No 할 줄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두 기둥에 충실하셔서 미혹 당하지 않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못된 교리나 신앙으로 예수 믿는 데에 지장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서 세상에 미혹 당하지 않게 하시고, 무릎을 꿇지 않게 하시고, 타협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 나타내서 주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모든 교인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