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죄송합니다
황해도가 고향이신 우리 아버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많은 토지와 가족을
모두 북에 두고 맨몸으로 피난 오신 슬픈 실향민이셨습니다. 남쪽에서 다시
가정을 꾸리시긴 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가 계셨습니다. 경제적 기반도 없
고 장사 수완도 없는 아버지가 걸핏하면 술에 취해 이북에 두고온 가족을 부
르며 울었습니다.우리 집은 불화가 잦고 가난에 찌들었습니다. 남한에서도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았지만 아버지에겐 북한에 있는 자녀들이 진짜였고,
길만 뚫리면 언제든지 달려갈 태세였습니다. 그러던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제 삶에 변화를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비관
적이고 염세적이던 제가 삶의 기쁨과 희망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너무 갈급했던 저는 밤 낮없이 기도하고, 말씀도 읽고, 은혜가 있는 곳은 어
디든 찾아갔습니다. 성경공부, 철야기도, 금식기도, 산상기도, 부흥집회 등
그런 저를 식구들은 미쳤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미친 것이
맞습니다. 덕분에 저는 동생들과 어머니는 교회로 인도하였는데,아버지에겐
감히 예수님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제 눈에는 아버지가 골리앗보다 더 크고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기습적으로 덜컥 병석에 누우셨습니다.저는
부랴부랴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받기를 권했습니다. 아버지는 의외
로 순순히 세례를 받으시고, 수줍은 얼굴로 본인이 좋아하는 찬송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저는 아버지 입에서 이 찬송이 흘러나올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프신 아버지를 두고 저는 남편의 유학길에 동행하여 미국으로갔습니다.제
가 미국에 간 지 반년 쯤 지난 1985년 3월에 아버지는 65세를 일기로 세상
을 떠나셨습니다. 생전에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것이 제일
마음에 걸렸습니다.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오래도록 저를 괴롭혔
습니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아버지, 사랑해요.아버지,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여태껏 한 번도 아버지께 직접 해드리지 못했던 말들
이 눈물과 함께 계속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눈물콧물을 다 쏟으며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실컷 하고나니 속이 후련하고 평안해졌습니다. 한국 현
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어내느라 아버지의 겉모습은 완악하고 강퍅하게
변했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도 자상하고 따스한 분이셨음도 성령께서 기도
중에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 그 마음 알아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김희재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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