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운데 토막
"부처님 가운데 토막" 마음이 어진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드물긴 하지만 우리는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난다.
공자가 말하는 그야말로 생이지지한 사람이리라.
공자는 《논어》에서 "태어날 때부터 그것을 아는 사람
(생이지지자, 生而知之者)이 으뜸이고, 배워서 그것을 아는 사람
(학이지지자, 學而知之者)은 그 다음이다."라고 말하면서,
"나는 생이지지한 사람이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영리하게 그것을 구하는 사람이다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을 학문적 지식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공자님 생각에 '그것'은 우리 마음의 궁극을 의미하였으리라.
부처님께서는 생이지지한 분이셨다.
태어날 때부터 그 마음이 그 감성이 마음의 궁극에 닿아있는 분이셨다.
부처님께서는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 있으셨고,
모든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이 가득한 분이셨다.
12세 어린나이에 농경제에서 새에게 벌레가 쪼아 먹히는 장면을 목격하고서
비감에 젖으신 일화를 통해 우리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알 수 있고,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구도의 길을 떠나셨다는 점은 부처님의 염리심을 대변한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생이지지든, 학이지지든 일거수일투족 너무나 선(善)하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대승보살의 육바라밀행에 다름 아니다.
그냥 선한 게 아니라. 선행을 하고도 자신이 선한 줄 모른다.
그의 몸과 마음이 선 그 자체이기 대문이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여섯 가지 덕목에
공성의 통찰과 대자비의 마음이 결합한 것을 육바라밀이라고 부른다.
남에게 베푸는 보시이되, 남에게 베푼다는 티를 내지 앟는
무주상(無住相)의 보시,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통찰이 함께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시이어야 보시바라밀이다.
내가 남에게 베풀었다는 사실을 남만 모르는 게 아니라 나 자신도 모른다.
단순한 보시도 참으로 선한 행동인데,
그에 덧붙여 보시했다는 자각조차 없어야 보시바라밀인 것이다.
《대반열반경》에서는 이런 베풂을
'다치거나 병든 외아들을 보살피는 어머니의 베풂'에 비유한다.
병든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가 착한 일을 한다는 생각을 떠올릴 리가 없다.
무주상의 베품이고 동체대비의 베품이다.
자신의 혈육이 아니라, 남에 대해서도 이렇게 베풀고 있다면
그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과 같은 사람이리라.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삿된 음행 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욕하지 말라. 이간질 하지 말라. 꾸밈말 하지 말라. 탐욕 내지 말라. 화 내지 말라.
삿된 종교에 빠지지 말라." 재가불자의 윤리 덕목인 십선계의 조항들이다.
이런 계목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지계행이라고 부른다.
이를 잘 지키는 것 역시 착한 삶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착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런 제목을 지킨다는 자각조차 없어야 한다.
이를 지계바라밀 또는 무상계(無相戒)라고 부른다.
뼛속까지 착해서 착하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없다.
마음을 다 열어 보여주어도 부끄러울 게 없다.
공자님이 70세가 되어서야 겨우 체득한신 종샘(從心)의 경지다.
"마음에서 욕구하는 바가 세속의 잣대를 넘어가지 않는(從心所欲不踰矩)"
경지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의 경지다.
속담 속에 담은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