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놀이 외 2편
유종
제 엄마 그림자 좇는 아이
엄마 몸속에서 쑥 고개 내밀었다
다시 들어가는 아이
'그림자는 어디서 왔어?'
몸속을 빠져나와 묻는 아이
'그림자는 왜 까매?'
제 옷 쳐다보는 아이
그림자에게 푸른 옷 입히고 싶은 아이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색칠하고 싶은 아이
그림자를 발로 차는 아이
내 손 툭툭 차고 뱃속에서 놀았던 아이
나를 운동장 밖으로 차버리고 싶은 아이
'왜 그림자는 밤에 없어져?'
숨어 우는 울음소리가 궁금한 아이
고독한 영혼을 벌써 배우고 싶은 아이
그림자를 나보다 길게 늘일 줄 아는 아이
너무 빨리 크는 아이
푸른 독을 품는 시간
부족한 시간 보충하려
시간 밖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지요
기름밥 땀나게 먹던 시절은
사실 푸른 독 데쳐 먹던 날들을 이어 붙인 것 같았지요
시간 밖에서 시간을 끼니처럼 때우던 푸른 시절은
우리밖에 부를 수 없는 흘러간 유행가 같아
늘어진 빨랫줄에 매달린 낡은 작업복 같아
곰곰이 되짚었어요 결함을 찾을 때까지
몇 번을 되짚어가다 꼬박 날 샜던 것처럼
어떤 겨울날은 시간 위에 시간을 껴입었어도
원인불명으로 기록되었지요
그런 날은 차라리 냉정하게 모든 원인을 짓이기고 싶었어요
시간 밖에서 공복을 달래는 술병이 적금
깨서 탕진한 눈물 같았어요
인과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흐르더군요
지금은 한 시절 철로 위를 걷던 동지들에게
손 내밀어야 해요
푸르게 눈 뜨던 시간 푸르게 빛나던 출발신호기와
푸른 작업복과 시간 밖 푸른 청춘에게
알맞게 데쳐져 입맛 다시던 푸른 독들에게
이제 안녕 작별의 손 내밀어야 해요
이제 안녕
절명
나락에 떨어져도 기어오르지 않으리라
바닥을 몇 번 헛짚었는가
13층에서 12층으로 11층으로
끊임없는 허공의 비웃음
초점 잃은 눈들이 벗어 놓은 희망 다시 잡고 싶지 않아
타인의 피로 덤처럼 얹히는 며칠 치 삶 구역질해서
토하고 싶어
눈알도 심장도 똥구멍도 연민도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싶어
11층에서 지상으로……,
기어코 땅속에 파묻혀
어제 손 놓아버린 청년 옆에 순장되고 싶어
흙 속에서 잘 탈골되고 싶어
침대 모서리에서 수십 번 뒤적거렸던
체의 죽음이 부러웠던 것은 혁명의 열정보다
볼리비아에서 몇 발의 총탄으로 절명했던 것
체처럼 붉은 피 콸콸 쏟으며 절명하고 싶어
눈감으면 벽을 타고 흐르는
저 울음소리 손 내밀고 싶지 않아
밤마다 눈 감고 싶지 않아
지상에서 지하로 암흑 속으로
오늘 밤에는 기어오르지 않으리라
누군가 웃으며 나에게 독주 한잔 권했으면
마지막으로 웃으며 로비에 전시되던 풍경에 안녕
투명한 손 흔들며 독주 한잔 꿀꺽 삼키고
열 손가락 뭉개지도록
땅거죽 파헤치고 흰 피 모조리 쏟아내고 마침내
깊고 깊은 적막의 심지 위에 눕고 싶어
곁을 떠나지 못하는 설움 몇 개와 함께 순장되고 싶어
누군가 부르는 소리 꿈속 같아서
눈뜨지 않아도 되는 암장이면 더 편안하겠어
―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 (도서출판b / 2022)
유종
1963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2005년 광주전남 「작가」 신인 추천 및 「시평」 여름호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