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파리: 지성의 형성(4)
파리대학교의 사조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멸시받는 지적 흐름 중 하나가 스콜라철학일 것이다. '저능아', '열등생'을 뜻하는 영어 단어 'dunce'를 위대한 스콜라 신학자 중 한 명인 던스 스코터스(Duns Scotus) 의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다. 스콜라철학은 1250년부터 1500년까지 융성했던 중세 사조 중 하나다. 스콜라철학은 종교적 신념을 이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논증하고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독교 신학에내재하는 합리성을 철학을 통해 입증하고, 기독교 신학을 구성하는다양한 요소들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 기독교 신학의 완벽한 조화를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저술은 길고, 논박을좋아하고, 차이를 면밀히 논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변호하는 데 가장 적합한 철학 체계는 무엇이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1270년경에 이미 '철학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 보수파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당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신학사상을 지배했다. 파리에서는 특히 더 심했다. 16세기에 들어선 이후로 파리에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려면 반드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자연학을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른 대학들은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해로운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었지만, 파리대학교는 단호한 태도로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방법론을 고집했다.
옷핀 머리 위에서 몇 명의 천사가 춤을 출 수 있을까? 이런 무의미한 주제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이 스콜라철학 사상가들, 이른바 '스쿨맨(schoolmen)’으로 불리는 스콜라철학 교사들을 묘사할 때 흔히 떠올리는 그림이다. 토론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실제로 이런 토론이 이뤄진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런묘사는 16세기 초 인문주의자들이 스콜라 철학자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정확히 압축해서 보여 준다. 인문주의자들의 눈에 그들은 하찮은 일을 가지고 무의미하고 지루한 지적 사색을 일삼는 자들로 비쳐졌다. 파리대학교는 이런 멸시를 받던 사조의 중심지로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에라스뮈스는 파리대학교에서 보낸 학창 시절뿐 아니라, 몽테귀에서 신학자들을 흥분시킨 신학 논쟁에 관한 기억도 풀어놓았다.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셨다면, 인간이 아니라 오이가 되실 수도있는가? 하나님은 과거를 되돌리실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창녀를 숫처녀로 되돌리실 수 있는가? 만약 이런 질문에 진지한 면이 있었는데 에라스뮈스가 그 부분을 간과했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급한 성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원을 사각형으로 만드실 수있는가? 설마 예수가 성전에 있는 학자들과 이런 문제들을 놓고 토론하지는 않았겠지? 이런 문제에 신경 쓸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14세기에 차츰 영향력이 커진 하나의 흐름에 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관심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옛문헌에서 '유명론nominalism''으로 불리던 이 흐름은 '명사론terminism'또는 비아 모데르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존 메이저는 16세기 초파리대학교에서 유명론을 대표하는 많은 이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하나님이 인간이 아니라 당나귀가 되실 수도 있는가를 놓고 논쟁하기까지 했다. 유명론은 파리대학교에서 영향력을 키워 나갔고, 이는15세기 북유럽 대학교 교양학부의 일반적 추세였다. 1460년 4월에 설립된 바젤대학교의 경우에는 '비아 모데르나'에 입각해 학생들을가르쳐야 한다고 학칙에 규정하기도 했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와에르푸르트대학교의 교양학부도 이런 사조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학교다. 흥미롭게도 루터가 몸담은 비텐베르크대학교는 1508년이라는 무척이나 늦은 시기까지 '비아 안티콰(via antiqua)’를 충실히 따랐다. '옛길'을 뜻하는 비아 안티콰는 아주 초기에 명성을 얻은 완고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전통주의를 나타낸다.
이쯤에서 실재론과 유명론의 차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좋을 것같다. 두 개의 흰 돌이 있다고 치자. 실재론은 이 두 돌이 형상화하고 있는 보편적인 '백whiteness'의 개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특별한 흰 돌들은 보편적인 '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흰 돌들은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반면에, '백'의 보편성은 그렇지 않다.그러나 유명론은 '백'의 보편적 개념은 불필요하다고 단언하며, 대신에 특수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개의 흰 돌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백의 보편적 개념'에 마음을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14세기 후반, '비아 모데르나'는 '비아 안티콰'를 점점 더 강하게압박했다. 비아 안티콰는 실재론을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던스 스코터스 같은 사상가들과 관련이 있고, 비아 모데르나는 유명론 또는 명사론을 대표하는 오컴의 윌리엄, 장 뷔리당(Jean Buridan),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 인겐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Inghen) 같은 저술가들과 관계가 있다. 파리대학교 교양학부는 새로운 흐름에 위협을 느끼고 진압하고자 했다. 1340년 12월 29일, '오컴의 오류’를 규탄하는 학칙이 시행되었다. 이후로 파리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오컴의 이론에 반대하는' 교양학부의 학칙을 지킬 것이고, 학생들에게 그런 사상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선서해야 했다. 비아 모데르나 지지자로 유명한 피에르 다이의 화려한 경력을 보면, 전반적으로 이런 조치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84년에 피에르 다이는 콜레주 드나바르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학장이 된 피에르 다이는 가장 먼저 콜레주에 소속된 신학자들에게 충분한 와인이 공급되도록 보장했다. 학장이 되고 얼마 되지 않은 1389년에 피에르 다이는 파리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1425년에 쾰른대학교는 유명론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귀족들 앞에서 비아 모데르나를 옹호하면서 파리대학교에서도 이제는 유명론을 좋게 평가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15세기 말엽에는 파리대학교에서 비아 모데르나에 대한 반감이 심해졌다. 1474년 3월 1일, 프랑스 국왕이 오컴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유명론자들을 억압하는 추가 법령을 공포했다. 법령이 공포되자 유명론에 찬성하는 파리대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이 곧장 독일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독일 대학에서는 유명론 지지자들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아무 효과도 없이 당국의 옹졸함만 드러낸 이 법령은 결국 1481년에 폐지되었다. 이로써 파리대학교에서 비아 모데르나가 부흥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6세기에 들어서고 처음 몇 십 년 동안 콜라주 드 몽테귀가 유명론자들의 부활에 앞장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칼뱅이 비아 모데르나의 영향 아래에 있는 콜라주에 다녔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칼뱅은 파리대학교에서 명사론의 논리와 변증법을 철저하게 배웠고, 이것은 칼뱅의 지성에 어떤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그 영향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고 어느 정도였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변증법을 주요 원리로 훌륭하게 활용했는데, 이는 명사론에 토대를 둔 것이다. 명사론으로 접근한 인식론의 아주 중요한 문제(대상의 정신적 개념과 대상 자체의 관계가 생애 말기 칼뱅의 신관을 지배했다. 인간이 이해한 하나님과 하나님 자신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나님'이라는 용어와 이 용어가 가리키는 형식상의 실재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 생각들의 기저에는 이런 질문이 도사리고 있었다. 인간의 관념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쟁점이 되는 관념이 하나님에 관한 관념인 경우 이는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그렇지만 칼뱅의 사상 가운데 파리대학교 시절 명사론을 지지하는 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은 그 뒤에 접한 정신 운동(특인문주의)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젊은 칼뱅의 지성 발달에 다른 학파가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을 다루는 훨씬 오래된 교재들은 종교개혁 직전에 '유명론'과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대럽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을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유명론에 승리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최근 중세 후기 스콜라철학의 본질에 관한 연구가 꽤 진전되었다. 이에 따르면 유명론 안에도 서로 다른 두 개의 학파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비아 모데르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신아우구스티누스 학파 schola Augustinianamoderna'다. 두 학파의 유일한 공통점은 실재론에 반대한다는 점뿐이다. 두 학파 모두 유명론의 입장에서 논리학과 인식론에 접근했지만,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신학적 입장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엄밀히 말해서, '유명론'이라는 용어는 보편의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지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두 학파는 똑같이 보편의 필요성을 부인했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한쪽은 인간의 능력에 대해 엄청나게 낙관적이었고, 다른 한쪽은 상당히 비관적이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겼던 칭의의 교리는 “개인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다룬다. 어떻게 죄인이 의로우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개인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가 일찍이 5세기에 치열하게 논쟁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흔히 이를 '펠라기우스 논쟁'이라고 부른다." 이 논쟁은 중세 시대에 여러 방식으로 재연되었다. 비아 모데르나는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지지했고,신아우구스티누스 학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지지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자신의 상황에 매몰되어 있고, 그래서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외부의 도움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인간이 할 수있는 일 중에 죄의 지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시대에 한 번도 접한적 없는 이미지를 사용해 설명하자면, 자력으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인간은 헤로인이나 코카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마약중독자와 같다.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는 이런 상황을 바꿀 수가 없다. 따라서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변화가 틀림없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이 빠진 딜레마에 개입하신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인간이 처한 상황에 개입하셨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흔히 '은혜 박사(doctor gratiae)’라고 불릴 정도로 '은혜'를 무척 강조했다. '은혜'는 인간을 지배하는 죄의 영향력을 자신의 의사로 끊어 내신 하나님이 자격 없는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과분한 선물이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이 주시는 이 선물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은 우리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우리에게 베풀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방편이 인간의 외부에, 다시 말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구원의 과정을 여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구원의 방편이 인간 안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 개개인에게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있다. 인간은 죄의 포로가 된 것이 아니며,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 구원은 선한 행실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선한 행실에 상을 내리실 의무가 하나님께 있다고 본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십계명처럼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에게 요구하는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은혜를 이해하고 은혜 개념을 하찮게 만들어 버렸다. 한마디로 펠라기우스가 '개인의 공로로 말미암은 구원'을 가르쳤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가르쳤다.
두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관점도 전혀 달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약하고 타락했으며 무능하다고 보았지만,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본래 자율적이고 자족적이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구원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단순히 보여 주는 것이 하나님의 몫이고, 외부의 도움 없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인간의 몫이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을 공 없이 얻은 선물로 이해했지만, 펠라기우스는 구원을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으로 이해했다.
서구 교회에서 이 논쟁이 계속 반복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견해로 인정되었고, 펠라기우스의 관점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두 개의 중요한 공의회, 즉 카르타고 공의회 (118)와 제2차 오랑주 공의회 (529)에서 규범으로 정립되었다. 그리하여 '펠라기우스주의자'라는 용어는 “인간의 능력은 과도하게 신뢰하는 반면,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히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과 더불어 경멸의 의미가 담긴 조롱이 되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루터는 대부분의 서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개념을 잊어버리고 펠라기우스주의에 빠져서 마치 자기 손으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가 하면, '아우구스티누스 학파'는 철학의 유명론과 신학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결합시켰다. 철학적으로는 비아 모데르나와 마찬가지로 토마스 아퀴나스나 던스 스코터스의 실재론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학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길', 즉 비아 모데르나의 구원론과 정반대되는 구원론을 발전시켰다. 이들의 구원론은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 인간의 타락과 죄성,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예정을 철저히 강조한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았다. 비아 모데르나는 인간이 '최선을 다함’으로써 칭의로 들어가는 문을 열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신아우구스티누스 학파는 오로지 하나님만 칭의를 시작하실 수 있다고 보았다. 비아 모데르나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인간의 본성 안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신아우구스티누스 학파는 그러한 자원은 오로지 인간의 본성 밖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이 두 학파는 칭의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의 역할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가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신아우구스티누스 학파의 철학(인식론)과 신학의 주요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부득이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1. 인식론상 '유명론' 또는 '명사론'을 엄격히 따름.
2. 인간의 공로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근거를 주지주의主知主義가 아니라 주의주의 입장에서 이해함.
3.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특히 은혜의 교리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반펠라기우스 저술을 광범위하게 활용함.
4. 구원의 역사에서 타락을 하나의 분수령으로 간주하고 원죄에 대한 시각이 대단히 비관적임.
5. 인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우선권을 매우 강조함.
6. 절대적 이중 예정이라는 급진적인 교리를 따름.
7. 죄인을 의롭다 칭하고 죄인이 선을 행하는 데는 '창조된 은혜의 습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중세 초기 저술가들의 견해를 거부함.
이 일곱 가지 기본 특징은 칼뱅의 저술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 두 번째 특징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로이터는 자신의 논문에서 칼뱅이 파리대학교에서 '반펠라기우스와 스코터스주의, 그리고 신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새로운 관념'을 배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뱅이 존 메이저 같은 특정 인물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보다는 중세 후기 신학의 일반적인 흐름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비아 모데르나와 신아우구스티누스 학파를 포함하여 중세 말의 전통은 전체적으로 주의론主意의 입장에서 공로의 근거를 이해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어떤 선행을 했을 때 그 행동의 공로적 가치는 그 행동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그 행동에 부여하기로 하신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 것이다. 이 원리는 “제물의 가치는 그 제물이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선한 성질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취지로던스 스코터스가 한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아주 정확한 평가라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던스 스코터스는 주의주의로 흘렀던 중세 말기 신학 사조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칼뱅도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하여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좀 더 초기의 판본에는 이 내용이 암묵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면, 1559년판에서는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이 주제를 놓고 라일리우스 키누스 Laelius Socinus와 서신을 주고받은 결과에 따른 것이다.
1555년, 칼뱅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신앙의 확신에 관하여 소키누스가 제기한 질문들에 답했다. 그리고 그 답변들을 특별한 수정없이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 그대로 삽입했다. 칼뱅은 소키누스와 서신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의 근거 ratio meriti Christi에 대하여 확고히 주의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리스도의 공로의 근거는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죽음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행위가 인류를 구원할 충분한 공로가 된다고 하나님이 결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주지주의 입장과 일치하고 후자는 주의주의 입장과 일치한다. 칼뱅은 "선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그리스도의 어떤 행위도 공로로 인정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렇듯 칼뱅과 중세 후기 주의주의 전통 사이에는 확실히 연속성이 있다.
과거에는 칼뱅과 스코터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유사성을 근거로 스코터스가 칼뱅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거나 소키누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알렉산더 고든Alexander Gordon 은 칼뱅이 그리스도의 공로의 근거와 관련하여 스코터스의 견해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스코터스주의가 소키누스주의의 토대가 된다는 추측을 바탕으로 스코터스부터 칼뱅에 이르기까지 이 사조가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추적했다." 그러나 사실 칼뱅에게서 엿보이는 이런 연속성은 오컴의 윌리엄과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에게서 비롯된 중세 후기 주의주의 전통 때문이다. 스코터스는 이 과정에서 전환점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인류 구원을 위한 공로로 받아들이기로 정하지 않으셨더라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갖는 공로의 성격을 설명할 근거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 연속성을 어떻게 설명하든지 간에, 칼뱅과 중세 말기 전통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위에서 언급한 신 아우구스티누스 학파의 일곱 가지 특징에는 로이터가 존 메이저의 영향이라고 주장했던 칼뱅의 일부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명제집 해설》 1권 서문에서 메이저가 신학자 세 사람에게 빚을 졌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점에서 이는 의미가 있다. 그 세 사람은 스코터스와 오컴의 윌리엄, 리미니의 그레고리우스다. 그러므로 만약 칼뱅이 학문적인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익히 알지 못했다면, 모교였던 파리대학교에서 발전한 이 신학 사조의 주요 특성을 자신의 책에 그대로 반복한 것은 정말 놀라운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런 견해를 접하기 위해 굳이신학 강의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파리대학교에는 그레고리우스의《주해서 Commentary> 1482년판, 1487년판, 1520년 이렇게 세 개가돌아다녔고, 마지막 판본이 등장한 것은 칼뱅이 파리대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이다. 만약 칼뱅이 동시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폭넓은독서 생활을 했다면, 파리대학교에서 유명론을 대표하는 두 명의선생 중 한 명이 집필한 책으로 논리와 신학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이 작품에도 분명히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실제로 로이터는 칼뱅이 파리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개인 공부나 독서를 통해 신학 공부를 어느 정도 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로이터는 신아우구스티누스 학파의 정체성과 특징을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논문을 제출했고, 이로 인한 불필요한 보조 가설들(메이저와의 개인적 만남과 같은) 때문에 이론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므로 칼뱅이 제시한 구원신학의 주요 주제에 파리대학교에서 접한 사조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칼뱅의 파리시절에 관하여 단편적으로밖에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이 가능성을 확인하는 조사를 엄밀하게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가능성은 칼뱅이 중세의 전통과 완전히 절연한 것이 아니라, 흠잡을 데 없는 중세의 내력 가운데여러 신학적 ·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