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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1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마르코 7,1-13
교회가 얼마나 세속에 물들었는지 알아보는 법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하면 세속의 법과 인간적인 욕망에 물들지 않고, 본래의 사명인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로 남을 수 있을지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마르코 복음 7,1-13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하느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전통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핑계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마르코 7,6-7)
예수님께서는 신앙이 외적인 형식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하느님의 계명은 오직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법을 코르반이라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전통으로 무시하는 지도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영화 ‘대부’는 인간이 자신이 타락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망가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마이클은 코를레오네 가문이 하는 마피아 사업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군에서 명예롭게 복무하고 돌아온 젊은이로, 아버지인 돈 비토 코를레오네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폭력과 범죄를 통해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경쟁 조직의 공격을 받고 중태에 빠지자, 마이클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보호하고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는 이유로, 경쟁 조직의 두목과 부패한 경찰서를
살해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복수였지만, 이 살인은 그를 범죄 조직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마이클은 이탈리아로 도피해 한동안 평화로운 삶을 꿈꾸지만, 자신이 저지른 폭력이 결국 자신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는 도피한 곳에서 사랑하는 여인 아폴로니아와 결혼하지만, 적들의 복수로 인해 그녀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 사건은 그를 더욱 냉혹하게 만들었고,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랑과 가정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단순한 힘과 통제에 집착하는 인물로 변해갑니다.
결국 마이클은 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새로운 대부가 됩니다.
그는 점점 더 권력에 집착하며, 가문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마저
의심합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형 프레도를 배신자로 의심하고 결국 제거하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마이클이 자신의 형제마저 용서할 수 없는 차가운 인간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이제 그는 가족을 희생하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이클은 혼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조직을 확장하고 가문의 안전을 지켰지만, 정작 자신에게 남은 것은 고독과 상실뿐입니다.
그의 아내 케이는 그를 떠났고,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준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한때 가족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한다고 믿었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58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단식하면서도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모습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우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불평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단식하는 그날에 제 일을 찾아다니며 일꾼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구나…
너희가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나눠 주고, 집 없는 가련한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에 네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리라.” (이사야 58,3-9)
19세기 프랑스의 성 빈첸시오 드 폴은 당시 부유층과 결탁하며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던 교회를 바라보며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주님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바쳐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지키고 교회가 세속의 법에 물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이웃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황금으로 장식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서 빛나야 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위에 늘어날수록 나는 세상 법에 오염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립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줄어들수록 나 자신은 병들어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로 둘러싸인 교회는 절대 오염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이들이 줄어든다면 그 교회는 분명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1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7,1-13
우리 모두 백 퍼센트 예비 병자들이요 병자 후보자들입니다!
오늘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동시에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언젠가 파리 기차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루르드로 간 적이 있습니다.
열차에 오르니 한량이 여러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배정받은 칸으로 들어가니 2층 침대에
4명이 함께 누워 자게 되어 있었습니다.
좁디좁은 공간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자야된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갑갑하고 조심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잠들면 탱크가 울고 갈 정도로 심하게 코를 고니, 민폐가 될까봐, 도저히 잠을 잘수가 없었습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에 루르드로 들어갔습니다.
막 안개가 걷히고 청량한 아침 햇살이 눈부신 루르드 성지로 들어서는 순간,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이 어찌 그리 맑아지는지, 그리고 성지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성모님의 따뜻하고 친밀한 환대가 온몸으로 느껴져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미 루르드에는 저를 포함한 수많은 환자들이 도착해 있었는데,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 말끔히 치유되도록 도와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일으켜세워주신 성모님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와 찬미를 드릴 뿐입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당신도 여기저기 몸이 성치 않은 분이시니, 병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십니다.
메시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병자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의 최고 증인은 그분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만나신 이야기를 수없이 들려주지 않습니까?”
“팬데믹 시대, 사랑하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집중 치료실에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세상과 단절된 채로 외롭게 맞이하고 있는 환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보건 의료 종사자 여러분, 여러분이 병자들 곁에서 사랑과 힘을 다하여 실천하는 봉사는 직업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의 사명이 됩니다.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루만지는 여러분의 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신 손길의 표징이 됩니다.”
“가톨릭 보건 의료 기관은 지속적으로 보호받고 존속되어야 하는 값진 보화입니다.
이들의 존재는 우리 교회가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 곁에 있음을, 병자들이 무시당하는 상황에서도
교회가 늘 그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병자 방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제자에게 하시는 초대입니다.
얼마나 많은 병자와 연로한 이들이 집에서 머물며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치유자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모든 병자와 그 가정을 맡겨드립니다.
그들이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의미와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기를 빕니다.”
나는 아직 젊고 쌩쌩하니 병과는 아무런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세월은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갑니다.
어느새 우리 역시 이런저런 병고에 시달리며 고생할 날이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병자 후보자가 100퍼센트 확실합니다.
주변의 병자들이 오늘 겪고 있는 사무친 고통과 외로움을 나 몰라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병자들은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할 각별한 존재, 수난당하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5주간 화요일 강론>
(2025. 2. 11. 화)(마르 7,1-13)
<‘위선’은 곧 ‘어리석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5-13)”
1) 여기서 ‘조상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아니라, 구약시대 때의 유명한 율법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여기서 ‘전통’이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그 ‘전통’이 아니라, 구약시대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할라카’ 라고 부르는 규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할라카’는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그 실천 방법을 정해 놓은 ‘행동 지침’이었습니다.
따라서 ‘할라카’를 만든 본래 의도는 좋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그 규정의 본래 의도는 잊어버리고, 그 규정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고 속은 거룩하지 않은 ‘위선’이었습니다.
<당시에 ‘할라카’는 바리사이들만 철저하게 지켰고, 바리사이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사두가이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또 일반 서민들도 그런 규정은 무시하면서 살았고, 예수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할라카’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불경한 자들’, 또는 ‘부정한 자들’로 취급했습니다.>
5절의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라는 말은, “어째서 당신들은 ‘할라카’에 규정되어 있는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고 부정한 행동을 하는가?” 라고 시비를 거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신들은 부정한 죄인들이다.” 라고
비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 바리사이들의 정결예식은 우리나라의 ‘목욕재계’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욕재계’는 원래 ‘마음을 씻는’ 일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씻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몸을 씻는 ‘눈에 보이는 행위’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깨끗함’을 이루려고 하는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정결예식도 원래는 ‘거룩함’에 도달하기 위한 일이었는데, 그들은 ‘몸의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착각했고, 결국 몸이 깨끗하면 거룩한 것이라고 우기는 위선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만(규정만) 지키는 ‘어리석은 위선’이었습니다(8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3) 11절에 언급되어 있는 ‘코르반’ 관습도 원래는 하느님을 좀 더 잘 섬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민수 30,3).
<하느님께 봉헌한 물품을 함부로 세속적인 일에
사용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목적은 잊어버리고
부모 공양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악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를 잘 지키기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십계명 제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를 안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역시 인간들이 만든 규정만 중시하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시하는 짓이라고 꾸짖으십니다(13절).
그런데 만일에 실제로 계명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주일을 지키면 효도를 못하게 되고,
효도를 하면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병석에 누워 있는 부모를 간병하다가 주일을 못 지키는 일이 생기거나, 반대로 주일을 지키려고 성당에 가면 병석에 누워 있는 부모를 방치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실제로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리 교회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일을 지킬 수 없는 경우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실, 두 계명이 서로 충돌하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모든 계명은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 하나로 통합됩니다.
<기도하면서 부모를 간병한다면, 주일을 지킨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사랑은 하나입니다.>
만일에 어떤 계명 때문에 다른 계명을 못 지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또는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려고 핑계를 대는 사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