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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파고는 상류층도 덮쳤다
‘귀족의 몰락.’
19세기는 세계화의 시대였습니다. 미국 아메리카 광활한 대륙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물품과 황금빛 곡물들이 유럽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세계화의 파고는 취약한 계층부터 닥친다지만, 때론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1800년대 잉글랜드 귀족들이 세계화 유탄을 그대로 맞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 경제 상황에 대한 설명부터. 1800년대 들어 영국은 곡물법을 도입했습니다. 자국 농업을 보호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혜택은 농민과 귀족을 아우릅니다. 그들의 광활한 영지에서 수 많은 소작료를 얻어서였습니다. 높은 곡물 가격은 짭짤한 수입으로 이어지는 구조였습니다.
상황은 1840년 급변합니다. 당시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아일랜드에서 ‘감자 대기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끔찍한 풍경들. 감자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던 민중들. 당시 총리였던 로버트 필은 지시합니다. “곡물법을 폐지하고 농작물을 값싸게 수입하겠다.” 당시 지식인 계층의 필독서였던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역시 자유무역에 힘을 실었습니다.
무역의 장벽이 무너지자, 곡물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아사(餓死) 직전 아일랜드 사람들에겐 작은 빛이었으나, 잉글랜드 귀족과 농민에겐 거대한 그림자였습니다. 곡물 가격이 폭락하면서였습니다.
영국의 밀 가격은 1800년대 초 톤당 10파운드였지만, 1870년이 되면 3파운드로 떨어집니다. 3분의 1수준으로 폭락한 것이었지요. 대영지를 보유한 귀족들의 수입도 그만큼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저택과 윤택한 삶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세계화가 잉글랜드 귀족을 강타한 셈입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귀족 작위를 유지하고 있던 처칠 가문(말보로 공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때 대서양에서 남루한 귀족에 손을 내밀 구원자가 도착했습니다. ‘달러 프린세스’라고 불리는 미국의 부잣집 딸들이었습니다.
런던에 몰려든 신붓감들의 정체는
“우린 귀족들과 결혼을 원하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걸출한 경제 거물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철도·철강·석유·백화점 등 거대한 산업이 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이끌던 시절입니다. 막대한 부에도 이들의 허영은 차오르지 않았습니다. 미국 사교계 상류층에 진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올드머니(Old Money)로 불리는 오랜 전통의 부자들은 이들을 “벼락부자”로 폄훼합니다. 유럽 귀족 출신으로서 오랜 세월 미국에 터를 잡은 이들만이 진짜 ‘상류’가 될 수 있었습니다. “Money can’t buy the class(돈으로 계급을 살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욕망은 부정당할수록 들끓기 마련입니다. 신흥 부자들은 결코 포기를 몰랐습니다. 자신의 자녀에게만큼은 ‘귀족’이라는 타이틀을 어떻게든 달아주고 싶었습니다. 돈만 많은 벼락부자라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국 내 사교계의 견고함을 깨닫고 그들 새로운 행선지를 정합니다. 미국의 모든 상류층이 갈망하는 그곳. 그러나 결코 갈 수 없었던 그곳. 대서양 건너 영국 런던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부잣집 규수들은 영국 귀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지적 수준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 데다가, 신대륙 특유의 발랄함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남성 앞에서도 당당히 매력을 과시하는 모습에 점잖은 귀족들마저 쉽게 매료됩니다. 거기에 엄청난 재산은 또 어떻고요. 영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7세는 미국에서 온 여성 손님들을 만나는 걸 열렬히 즐겼을 정도입니다.
‘달러 공주’들의 유럽 공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가난한 잉글랜드 귀족들은 너도나도 미국 상속녀와의 혼인을 추진합니다. 경제 위기를 맞은 가난한 집안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정 형편상 강제로 혼인을 당한 건 비단 가난한 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던 셈.
잉글랜드 귀족 열 중 하나는 달러 공주와 결혼합니다. 가장 높은 계급인 공작(Duke) 서른개 가문 중에서 여섯개 가문이 ‘달러공주’와 결혼했을 정도였습니다. 귀천상혼을 금기로 여기던 영국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전 유럽으로 범위를 넓히면 450건이 집계됩니다. 세계화의 파고가 그린 역설적 풍경이었습니다.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