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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눈 사이
w. 애즈원
"김민정."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힘겹게 들어올려서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자리에서 비비적 일어났다.
어쩌면 저렇게 날 잘 아는건지, 내가 어제 밤 샌건 어떻게 알고 또 이렇게 직접 이름까지 불러주시면서 읽으라시네.
원하신다면.
히죽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The moment your alarm clock goes off at six, another busy day begins as usual."
그냥 선생님의 목소리가 자장가라는 5교시. 꾸벅꾸벅 졸고있는 아이들의 뒷통수가 보이고, 고개를 좀 더 들면,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선생님이 보인다. 조용한 교실엔 내 목소리만 울린다.
"You leave home at seven and spend more than ten hours at school. You do homework, take lesson, and do a variety of other things a typical high school student is supposed to do every day. It may be past midnight…"
무미건조하게 읽고 있을 뿐, 이미 신경은 온통 선생님에게로 쏠려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오늘도 불평으로 시작해서 불평으로 끝나는 점심시간.
"아 오늘 급식 완전 맛없어. 나 그냥 도시락이나 싸가지고 다닐까잉?"
"니가 퍽이나 싸갖고 다니겠다?"
가방도 귀찮다고 안매고 다니면서. 교복도 귀찮다고 다 벗어재끼고 다니면서.
일부러 열거해주기도 귀찮아서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는데 또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섭취해야겠다며 쌩난리인 이나연.
젠장맞을 이나연, 거지같은 이나연, 처죽일 이나연.
"나 먼저 벤치에 가 있는다?"
"응응!!"
좋댄다. 넌 먹다 죽을 애야.
그렇게 매점으로 팔랑팔랑 뛰어간 이나연을 등지고 걸어서 학교 뒤쪽에 있는 벤치로 걸어갔다.
아….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앉아있는 선생님.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멈칫, 멈추어서버렸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담배.
"선생님이 본보기가 되네요. 담배는 어떻게 피는 거예요? 담배피는 것도 가르쳐주시려구요?"
"…"
평소와 같은 침묵이다. 절대 누군가가 먼저 시선을 떼지 않는다. 누가 보면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먼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미안하게도.
"공부좀 해라."
피식 웃으며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그 웃음이 왠지 서럽다.
그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지겹도록 서럽다. 왜…? 왜…?
언제부터였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오늘 날씨는 맑음. 기분이 좋았다, 왠지 좋아할 것 같아서. 내 선물을 마음에 들어할 것 같아서.
아니면… 선생님을 보러 갈 명분이 생겨서?
"선생님!"
"뭐야, 이게?"
"…칙칙해 보여서요. 선생님 책상."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꽃집이 보였다. 정말 우연히 보였다. 우연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난 화분을 하나 사고야 말았다. 너무도 예뻐보여서. 눈을 뗄 수 없는 화분이 하나 있어서.
"괜찮은데."
"이게 뭔지 알아요?"
묵묵히 나를 올려다보는 그를 바라보면서 베시시 웃음을 지었다. 나연이가 바보같아 보인다고 했던 그 웃음을.
선생님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화분을 앞에 두고, 그를 앞에 두고.
"베고니아예요."
선생님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져 이제 화분으로 향한다. 예쁜 적색.
열려진 창문 사이로, 봄바람이 불어와 선생님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아낌없이 주는 꽃이예요. 항상 꽃이 펴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꽃이래요."
그런데, 잎이 어긋나서 난대요. 그래서, 꽃말이.
"고맙다."
꽃말이…
꽃말이… 기억이 안나네요.
언제부터였는지…
오늘도 또 시작되는 나연이의 투정으로 나는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으면서 대답해준다.
"이잉, 야자해 민정아?"
"엉. 미안미안~"
"야아~ 그냥 집에 가면 안되?? 힘들지도 않냐!"
"오늘 그 드라마 하는 날 아니냐? 빨리 집에나 가시지??"
"아, 맞다!!! 으악, 간다 나!!"
무섭도록 조용한 학교 자습실엔, 남아있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언제나처럼 창가 맨 끝 자리로 향했다.
습관처럼 가방먼저 내려놓으려던 내가 얼어버렸다.
화분이다… 노란색 꽃. 수선화. 노란 수선화.
…언제부터였을까?
칙칙했던 하늘엔 결국 먹구름만 가득. 불만에 가득 쌓인 듯. 휑한 바람이, 지금이 봄이 맞는 가 싶어지는 날씨.
1교시부터 수학이라 골머리 썩히는 것보단 차라리 창밖이나 보고 있자니,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선생님이 보인다. 아…
결국 학교수업이 다 끝날때 쯤엔 비가 주룩주룩 내려버린다.
"인생이 썩었어. 인생 자체가 썩었다고. 아오!!"
"비오는게 인생이 썩는정도냐...?"
"그래!!! 이런 썩은 개차반 인생같으니라고!!! 너 또 야자해?"
고개를 끄덕이자 나연이 비명을 내지르더니 버스타고 가야겠다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공부도 안 하면서 야자는 왜 해, 라고 나연이가 물었던 적이 있다.
그 때도 난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오늘 자습실, 내 자리에 놓여진 건, 우산이었다.
"아 정말 우리 선생님 너무 멋지지 않냐, 내가 진짜 영어공부할 맛이 난다니까."
"됬다 그래라? 야, 니가 그런다고 수업 듣긴 듣냐?"
"권현진쌤 짱이야 짱! 얼굴 반반하지, 키 되지, 몸 되지, 게다가 머리 좋지. 빠지는 게 뭐가 있냐 진짜 선생님만 아니면!"
"쯧쯧, 꿈깨라 꿈."
일상 다반사. 선생님은 항상 오르내린다. 이런 식으로, 나한텐 안타까운 방식으로.
정말 맞는 말이라서 부정할 수도 없다. 학교에서 가장 어린 선생님이다. 그러니까 이제 막 부임한.
권현진 선생님. 영어 담당.
내가 고 2가 되서 그를 처음 보았고, 아마 내가 생각하는 그 언제부턴가는 처음 본 그 날부터라고 생각한다.
우린, 처음 본 그 날부터, 서로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오늘만은 제발 놀자던 나연이를 뿌리쳤다.
지겹도록 길기만 했던 야자가 끝나고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찍찍 했다.
차는 눈물에 흐려지는 눈가를 쓱쓱 비비며 가방을 챙기고 주위를 보니 어느새 다 갔는지 애들이 보이질 않는다.
너무 오래 잤나봐...!
느릿느릿 발걸음도 무겁게 정문을 통과하는데, 빵- 클랙션이 울린다.
놀라서 앞을 바라보니, 검은색 차가 보인다. 날 향해 있는.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타. 데려다줄게."
"에? 진짜요? 우와, 감사합니다."
알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화의 한계는 여기까지라는 걸. 여기서 뭔가 더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그런다면… 우린 다신 볼 수 없을 거다.
더 어긋나기엔 우린 너무 위험하고, 너무 깊이 와 버렸다.
서로의 마음 안으로.
"선생님, 담배 끊어요."
"그래 , 그래."
"…선생님."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데리러 와 줘요. 이렇게 매일 매일 그래줘요.
조금은 불쌍한 내 마음을 위해서라도 그래줘요. 결국 이것밖에 할 순 없는 거 나도 아니까, 그러니까 나도 참고 있는 거니까.
조금만 더 우리 이대로 있으면 안될까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들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웃음이 늘어갔고, 선생님은 담배를 끊었다. 점심시간마다 우린 점점 더 가까이 앉게 됬고, 자습실 내 자리엔, 이제 너무도 당연한 듯 한 두개씩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처음처럼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모든 게 결정되어 버렸다.
선생님을 향한 내 감정도, 선생님의 감정도 모든게 너무도 선명하고, 너무도 갑작스럽게.
"정말 안타깝지만…"
거짓말.
"권현진 선생님이 어딜 가서든 잘 할 수 있도록, 다들 그렇게 좋게 생각하고 보내드리자구."
거짓말.
"자자, 뭐 해. 인사들 해야지?"
6월로 접어들었다. 노란 수선화가 왠일인지 시들시들해지는 그 시점이었다.
아침에 수선화를 보는데, 죽어가고 있었다. 잔뜩 울상이 되서, 하나 더 사달라고 조를까, 라는 생각을 하며 학교에 왔다.
아침조회 중이었는데, 방송실에서 방송이 나왔다.
권현진선생님이 그만둔다고.
"선생님 가지마요! 으에, 선생님 가면 무슨 낙으로 학교 와요!"
"맞아요 쌤 가지마요오오!!!"
아무말도 나오질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느껴졌으므로.
애써, 정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려 해도, 그의 시선에 서러워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안 되. 멈춰. 안 되. 그러면 안 되. 좀만 참아. 나중에 말해도 되는 거잖아.
아…싫어.
"좋아해요."
내 목소리가 참 이질적으로 들렸다. 그래서 주위가 조용해진 건가.
선생님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놀란 듯한 선생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갈색 눈동자, 살짝 길어진 옅은 갈색 머리, 언제나 말끔한 수트. 얇은 입술. 무뚝뚝해 보이는 눈빛.
내가 사랑하는 사람, 권현진.
"사랑해."
반짝임은 정말 순간이었다. 그와 함께였던 그 순간은 그 반짝임이었다.
모든 이목이 집중했다. 나 혼자 견뎌내기엔 너무 힘든 시간뿐이었다.
'쟤지? 선생님한테 다짜고짜 사랑한다고 했다며.'
'대박이라니까, 그 때 선생님 표정 봤었냐? 완전-'
'쩐다. 근데 선생님이랑 쟤 좀 친하지 않았냐?'
수근거림은 참을 수 있었는데, 그 두려움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그와 헤어지게 될 거라는.
그리고 내가 그에게 엄청난 피해를 줘버렸다는 그 두려움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죽음과도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고, 오늘에서야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생님…"
"민정아."
"…보고싶었어요."
"…왜 그랬어."
"선생님은 왜그러셨어요."
"…그래야 했어."
"도망친거잖아요."
"선생님은 널, 제자로써 좋아했어."
눈물이 터져나왔다. 어느새 난 울면서 말하고 있었다. 말 그래도, 난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그에게 사랑을 원하고 있었다.
그의 이해를 바라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거짓말이잖아요. 나 사랑했잖아요."
"…베고니아가 죽었어."
난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도, 손가락질도, 욕도, 돌이라도 던진다면 기꺼이 받아줄 수 있었다.
내가 슬픈 건… 날 이해하는 선생님 때문이다.
베고니아의 꽃말을 알아버린, 선생님 때문에.
다신 나를 향해 웃어주지 않을 것 같은 선생님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끝나버림을.
그래도, 그래도 다시 한 번만, 정말 딱 한번만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이건 내 욕심이겠지.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당신의 모습을 딱 한번만 더 보고 싶다면,
교무실에 앉아서 내가 준 화분을 보고 있던 당신의 모습을,
가끔씩 당신 책상 위에 놓아뒀던 편지를 읽으며 웃음짓던 당신 모습을,
그래도… 잠시라도, 그 작은 반짝임이었더라도 날 행복하게 해줬던 당신의 모습들을 정말 딱 한번만 더 보고 싶다.
난 아직 당신을 안아보지도 못했는데.
사랑한다고 많이 말해주지도 못했는데…우리 아직 못 해 본게 많은데…같이 밥이라도 먹어보고 싶은데.
같이 영화도 보고 싶었고, 놀이동산도 가보고 싶었는데. 그것도 안 된다면…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었는데.
베고니아가 죽었다.
베고니아 꽃말이… 짝사랑이었다. 아낌없이 주는 꽃. 그러나, 잎이 어긋나는.
짝사랑이 죽었다.
내 외로운 사랑이 죽어버렸다.
수선화… 노란 수선화… 사랑에 답하다. 내 사랑에 답했던 당신이. 당신의 사랑이. 죽어버렸다.
오늘따라, 그가 그립다.
'들었어? 걔 죽었대-'
'나 진짜 놀랐다니까.'
'불쌍하지 않냐? 왕따당해서 그랬나-'
'왠지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근데, 진짜 권현진선생님이랑 사겼던 거 아닐까?'
아무도 알아주지 못했던 외로운 내 베고니아가 결국 죽어버렸다.
첫댓글 인소닷 회원으로 오늘 가입해서 처음 읽은 소설입니다. 좋은 소설 많이 올려 주세요
^^ 댓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자주 뵈었으면 좋겠네요~
엄훠......먼가 여운도 남고, 슬프기도 하고ㅠㅠㅠㅠㅠㅠㅠ잘봤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
주인공 이름이 저랑 똑같아요!!!!!! 에헤>_<
댓글 고마워요~~
뉴뉴뉴뉴뉴 저 남자가 이상..뉴뉴 자살...........꺅.....
읽어줘서고마워~ ^.^
문체 상당히 맘에 든다........ 소녀 왠지 알것같기도 한데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