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겨울은 예상대로 회색빛이었다.
원래비가 많이 와서 런던의 신사는 꼭 우산을 들고 외출한다는 말도 있고,
늘 도시를 뿌옇게 보이게 하는 런던의 날씨를 상징하는 런던 포그도 유명하듯이 마른 나무가지 색깔조차 회색빛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민준과 함께 있어서인지 암울한 도시의 풍경조차 로맨틱하게만 느껴졌다.
유리의 성이었던가...여명과 서기가 엇갈리며 재회를 하는 장면에서 런던 시내의 곳곳이 나왔었다.
그러나 나는 여명과 서기가 부럽지 않았다. 그들은 엇갈림 속의 도시겠지만...
나는 민준과 즐거운 데이트를 하고 있는 낭만의 도시였다.
뮤지컬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어서 2층이 오픈되어 있는 관광버스를 타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전에 런던에 왔을 때는 그 버스를 하루 종일 탈 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지하철로 힘들게 돌아다녔던 기억이 나서 민준에게 그 버스를 타자고 말했다.
버스 안에 있으면 지붕이 열려져 있어서 도시 건물들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스쳐 지나갔다.
선글라스를 쓴 금발머리 미인인 가이드가 열심히 버스 주변의 건물과 경치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었다.
"와~저거 정말 멋있네...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민준은 타워브릿지를 보고 감탄하고 있었다.
나도 전에 그 다리를 처음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마치 공주님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동화 속의 다리 같았다. 다리 양쪽의 두 기둥에는 섬세한 조각들로 채워져 있어서 마치 예쁘고 작은 조형품을 그대로 확대해 놓은 것 같았다.
"다시 봐도 이쁘다..."
어느 소설에선가 그런 구절을 봤다. 30살이 넘으면 인생이 재상영관 같은 느낌이라고...
아마도 어린 나이의 호기심을 잃고 모든 일에 심드렁해지는 것을 말한 것이리라...
나도 30살에 여길 다시 왔지만, 인생이 이런 재상영으로 가득차 있다면 나이 먹는 것도 즐거울 것만 같았다.
원래 좋은 영화는 보고 또 봐도 감동을 느끼게 되어 있으니까...
"내리자..우리 걸어서 건너가 보자..."
민준은 신이 났는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내 손을 잡고 버스의 아래층으로 내려 갔다.
타워브릿지에서 같이 사진도 찍고 전시실에 들렀다.
마치 수학여행온 아이들처럼 100년이 넘었다는 타워브릿지의 역사와 다리가 올라가는 원리 등을 열심히 보았다.
민준은 타워브릿지 모형을 2개를 샀다.
"사람은 각각의 섬이라고 하지...그런데 그 섬들을 잇는 다리가 있어서 서로 만날 수 있는 거고...너랑 나랑 이어주는 이런 다리...그런 다리를 만들어가자..."
민준은 하나는 자신이 갖고 하나는 내게 주는 거라면서 말했다.
다리라.....
그런데 민준과 나를 잇는 다리는 뭘까?
알바생과 대리...그리고...지금은? 3년만에 사랑을 만들어가는 연인?
어쩌면 섬으로 되어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다리는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없다면 타인과 이어지는 다리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을테니까...
민준과 타워브릿지처럼 100년도 넘게 서로를 이어주는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다.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온 허메저스티 극장은 로열석은 입장과 대기실이 따로 있었다.
예전에는 이런 차이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지만 막상 민준과 함께 로열석의 대기실에 있으려니
이런 사치가 얼마나 사람을 즐겁게 하는지 실감하고 있었다.
'오페라의 유령'을 보는 동안 민준과 나는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영어로 진행되어서 집중하고 있기도 했지만 긴박감 넘치는 스토리와 주인공들의 노래와 춤에 감동이 벅차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민준아.....고마워....."
나는 처음으로 민준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민준을 처음 만난 날부터 내게 참 고마운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직접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고맙다는 말보다는 다른 말이 듣고 싶은데...?"
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히 그렇게 말했다.
"어떤?"
나는 민준이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았다.
"사랑해...."
민준은 가볍게 키스를 하며 그렇게 말했다.
내 심장은 또 두근거렸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민준에게 들릴까봐 무안할 정도로 내 귀에는 크게 들렸다.
"얼굴이 빨개졌네...."
민준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끌어 안으며 말했다.
"3년전엔 몰랐는데....넌 얼굴 빨개지도록 부끄러움 같은 거 느끼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지..."
민준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 인생에 얼굴이 빨개질 일이 몇번이나 있었던가 싶었다.
적어도 전의 남자친구에게 사랑을 고백받은 후 몇년 동안은 아마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늘 무표정한 얼굴로 지낸 것은 아닐까....
"나 지금 미치도록 너 안고 싶다..."
민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자고 했다.
그래...나도...너...안고 싶어....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이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감정 표현에 서툴렀던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면 스스로 민준에게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의 수속을 마치고 방안에 들어오자 마자 민준은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달콤하다....
나는 민준의 유혹적인 키스 세례를 받으며 그 느낌뿐이었다.
달콤하다....너무 달콤해서 자꾸 먹고 싶은 쵸콜렛처럼....
'감동이 없어..요즘 남자들 다 똑같아....'
꼭 내 핸드폰은 분위기 깨는데 한목했다. 로밍받아온 핸드폰이 갑자기 울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나 싶어 로밍을 받아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더구나 저 가사는......지금 분위기하고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가는 즉시 핸드폰 벨소리를 바꾸리라 맘먹었다.
받을까 안받을까 잠시 갈등하는 사이 민준이 먼저 키스를 멈추었다.
나는 과감하게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민준과 함께 있을 때는 나와 다른 사람과 이어진 다리쯤은 끊어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시 키스해줘~"
나는 다시 민준에게 안기며 말했다.
민준은 키스를 하며 나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고, 그의 손길은 너무나 부드럽게 나의 알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런던과 오페라의 유령, 그리고 사랑하는 민준과의 섹스...오늘 밤은 아마도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리라...
다음 날 아침 민준보다 먼저 일어나 샤워를 하려다가 혹시나 싶어 핸드폰을 켰을 때 음성 메시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젯밤의 그 방해꾼이 남긴 음성 메시지인 것 같았다.
'너 지금 런던에 있는 거지? 민준인지 뭔지하는 사람하고? 그 사람 유시엘에이 로스쿨 다니는 거 맞지? 어쨌든 나한테 전화 좀 해라....국제 전화하기 아까우면 한국와서 하던가....'
지선의 목소리였다.
지선은 어떻게 민준이 로스쿨에 다니는 것을 알았을까...나도 런던에 오면서 처음 들은 이야기인데...
그리고 전화를 해달라고?
첫댓글 먼가 일이 난겨~~~
아싸! 언능 언능 점 올려놔바바...ㅋㅋㅋㅋ..재밌당.....^^
이걸루 드라마를 만들면 더 재미있을라나?? 궁금타...싸게 싸게 올려...ㅋㅋㅋ
뭘까???뭘까??? 궁금하여라...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