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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5권)
- 조정래
제 2부 민중의 불꽃
---- 차 례 ----
13. 빨갱이와 내통한 좌익분자.
14. 물과 기름
15.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16. 당신을 용공행위로 체포하겠소!
17. 새로 부는 바람
18.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윈회 습격
19. 그리고,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의 승리
20. 백범 김구를 죽인 네 발의 총알
21. 거꾸로 흐르기 시작한 역사의 물줄기
22. 팔월의 들녘
23.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
24. 일어서는 산 민중
13. 빨갱이와 내통한 좌익분자.
하대치는 마땅찮음이 가득 물린 입을 삐뚜름하게 해가지고 서운상이네 솟을대문을 올려다보며 여기저기 살피고 있었다.
"씨부랄놈, 이눔도 작인덜 등까죽깨나 빗긴 놈이구만."
그는 투덜거리고 나서 카악 가래를 돋구어 대문을 향해 내뱉었다. 날아간 가래가 왼쪽 대문 중간쯤에 찰싹 붙었다. 그는 얼굴을 찡등그린 채 대문으로 다가가 거침없이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누구다요오! 대문 그리 쳐대먼 그짝 주먹 깨지제, 대문에 실금이나 갈 줄 아요?"
앙칼진 여자의 소리가 날아왔다.
"워떤 년이 새살 한분 잘 까네."
하대치는 욕질을 하며 대문 두들기기를 그쳤다.
"누구요?"
대문이 열림과 동시에 성질 돋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요."
하대치는 큰 소리를 내며 얼굴을 안으로 쑥 디밀었다.
"워메 엄니!"
여자가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워따 애 뱄으먼 애 떨어져뿔것소. 밤도 아닌 뻘건 대낮에 사람이 사람얼 보고 워찌 그리 놀래고 그러요?"
하대치는 헛눈질을 하며 능청을 떨었다.
"워메 시상에나.......”
여자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고 숨길을 돌리는 듯하더니,
"체신이고 얼굴이고 하나또 보잘 것 웂이 생게갖고 멀 믿고 그리 난리 판굿이요, 판굿이!"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허, 여자가 초면인 남자 인물평도 막 해불고, 영 똑똑해부네."
하대치는 바람 새는 헛웃음을 흘리며, ‘믿기는 머럴 믿어, 서운상이가 없는 것을 믿제,’ 속대꾸를 하고는,
"좌우당간, 여그가 서운상이란 사람 집이 맞제라?"
표정을 싹 바꾸며 물었다.
"그런디, 워째 그요?"
여자는 하대치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었다. 곱지 않은 눈매에 업신여기는 빛이 역연 했다.
"허먼, 머심 있소?"
"음마, 음마, 참말로 벨꼬라지 다 보겄네. 피 서방이란 이름이 요러타께 있는디, 첨 보는 사람이 누구보고 머심이여. 머심이."
여자가 금방 대들 것 같은 기세로 눈꼬리를 세웠다. 여자의 하는 품으로 보아 머슴의 아내라는 것을 하대치는 이내 눈치 챘다.
"나야 심바람얼 왔응께로 피서방인지 물 서방인지 알 것 웂고, 벌교. 경찰서서 왔는디, 피 서방 시방 있소?"
"워메, 경찰서라?"
여자는 순간적으로 질리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피 서방 있소, 웂소."
하대치는 여자를 더 몰아 붙었다.
"몸이 아파 자니께 쪼간 기둘리씨요. 얼렁 깨와 갖고 나오겄소."
태도가 돌변한 여자는 쫓기듯이 돌아섰다.
하대치는 쩜쩝 입맛을 다시며 귀에 꽂았던 꽁초를 빼들었다.
ㄴ자로 꺾인 뻣뻣한 느낌의 왼쪽 팔을 목에 늘인 멜빵에 건 남자가 여자와 함께 부산스럽게 나왔다.
"경찰서서 오셨다고라?"
남자는 고개를 꾸벅이며 물었다.
"그러요. 심바람얼 왔는디, 싸게 오랍디다."
"다 끝막음 난 줄로 알았등마 무신 일이까?"
피 서방은 불안한 낯빛으로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무신 일이랍디여?" 하고 물었다.
"나야 심바람만 허는 신센디 무신 일인지 워찌 알겄소. 급헌 일인께 나허고 항군에 싸게 오라고만 헙디다."
"오라면이야 가기넌 갈밖에 웂는 일인디, 고 오살헐 강가눔 땀세 볶여 못살겄네. 그눔으 새끼가 워디로 내뺐는지, 눈앞에 있으먼 가쟁이럴 짝짝 찢어 났으먼 속이 씨언허겄다."
피 서방은 얼굴에 핏기를 올리며 혼잣말을 질겅거렸다.
"아, 워디 가요."
하대치는 뒤돌아서는 피 서방을 제지하듯 말했다.
"와따 사람 숨넘어가게 잡지지 마씨요. 질이 먼디 신이나 바까 신어야제, 요러고 가겄소?"
하대치를 돌아다본 피 서방은 한쪽 다리를 들어 뻗치며 버럭 소리쳤다. 그 발에는 다 찌그러진 짚신이 걸려 있었다.
"멋 땀세 나헌테 성질내고 그러요?"
하대치는 눈을 부릅떠 맞쏘아 보며,"싸게 나오씨요, 싸게. 늦게 왔다고 졸갱이질 당혀도 내사 몰릉께." 은근히 겁을 먹였다.
하대치는 피 서방과 함께 벌교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 걸음이 무척 빨랐다.
"와따 찬찬히 잠 갑씨다. 키는 쪼간허고 다리넌 짧은 양반이 심바람만 해묵고 살아서 그런가 워째 그리 발이 빨르다요."
자꾸 뒤처지던 피 서방이 더 못 견디겠다는 듯 말했다. 하대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는다.
"벌교 워디 사는 누구요?"
말문을 틔워 하대치의 걸음을 늦추자는 속셈인지 피 서방이 말을 걸었다.
"경찰서꺼지만 가먼 됐제 고런 건 알어서 무신 쓰잘 디가 있소."
하대치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아, 시상살이가 꼭 무신 쓰잘 디 있는 일만 허고 살아집디여? 그라고, 오다가다 옷끝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디 요리 항군에 행보럴 허게 됐음시로, 사는 동네 알고, 이름 아는 것이 그리 쓰잘 디가 웂는 일이겄소?"
여편네고 서방눔이고 드럽게 새실은 좋네. 하대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쩌 들몰 사는 염치대요."
염상진의 성을 따고, 자기의 이름을 뒤바꾼, 하대치가 더러 써먹은 가명이었다.
"나넌 피보길이요."
피보길, 하대치는 이름을 되뇌어보며 픽 웃었다.
"워째 웃소?"
"성도 순 불쌍눔 성에다가 이름할라 고것이 머시요."
"이름이 워째서라."
"피보길이가 머요, 피보길이가. 피보지라고 허는 기 훨썩 낫제."
"머시라고라, 피보지!"
피 서방이 우뚝 걸음을 멈추며 소리쳤다.
"워째, 나 말이 틀렸소?"
하대치는 느물거리며 웃었다.
"허면, 넘 존 이름 갖고 욕을 맹그는 짓거리가 잘허는 것이여!"
피 서방은 성한 오른팔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름이 하도 요상시런께 안 그렇소. 요러다가는 영축웂이 늦어 참말로 졸갱이 치겠소. 미안시럽게 됐응께, 싸게 갑시다."
하대치가 팔을 끌었고, 피 서방은 마지못한 듯 발을 떼어놓았다.
"당신이 무식혀서 그렇제, 보배 보자에 길헐 길자, 보배가 쌓이고 쌓여라 허는 뜻인디, 요리 존 이름이 머시가 요상혀, 요상허기는. 그라고 나도 한마디 허고 넘어가야 쓰겄는디, 염가는 참 양반 성이고, 치대라는 이름도 참말로 쪼옿고 쪼오옿소. 염치가 너무 커서 넘 이름을 욕에다 갖다 붙이는 염치 웂는 짓 허는 갑소이."
"아이고메 유식허고 유식헌거. 하여튼지 보배가 쌯이고 쌯여 서운상이 맹키로 잘 한분 살아 봇씨요."
하대치는 말에다가 가시를 박고 있었다.
"걱정 마씨요. 나도 요분 참에 잡은 밑천으로 그리 살 날얼 기엉코 맹글고 말 팅께."
피 서방의 말이 하대치의 뇌리에 부딪쳐오며 불똥을 튀겼다. 그래서 이눔이……
하대치의 의식에 명확히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하대치는 기분 변화를 감추고 천연스럽게 물었다.
"무신 존 일이 있었는갑제라?"
"아니요, 아녀. 존 일은 무신……”
피 서방은 당황한 기색으로 얼버무렸다.
"아 그러덜 말고 말혀봇시요. 존 일이야 자꼬 말을 혀야 더 좋아지는 법잉깨요."
"어허, 아무 일도 아니라는디 왜 그래쌓소."
피 서방은 화를 벌컥 내며 걸음을 멈추었다.
"알겄소, 알겄소. 가기나 싸게 갑시다."
하대치가 달래듯 했다.
두 사람은 황톳길을 말없이 빠르게 걷고 있었다.
봄하늘의 끝둘레에 땅기운이 부유스름하게 서려 있었고, 봄새들의 지저귐이 어디에선가 청량하게 구르고는 했다. 고흥을 지키는 수문장이라 일컫는 삼각뿔로 외로운 듯 서 있는 첨산을 왼쪽으로 지났다 싶으면 뱀골재는 시작되었다.
하대치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피 서방은 그 뒤를 따라잡느라고 성한 팔 하나만을 휘둘러대며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나 하대치는 피 서방과 보조를 맞추느라고 평소의 제 빠르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력은 혁명전사의 생명이고 무기다. 발끝으로 걸어라. 뒤꿈치가 닿기 전에 빨리 다른 발을 내밀어라. 걸음은 걸을수록 빨라진다. 걸어라, 계속 걸어라. 염상진이 되풀이하고 되풀이하는 말이었고, 하대치의 주력은 염상진과 맞먹는 입장이었다.
뱀골재 마루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하대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피 서방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멜빵에 걸쳐진 피 서방의 왼쪽 팔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보였다.
"으쩌요, 걸을 만 허요?"
피 서방이 가까워지자 하대치가 입을 열었다.
"아이고메 죽겄는거."
피 서방은 숨을 헐떡거리며 이마에 내밴 땀을 훔치고는,
"나도 기운 에지간히 쓰고, 발 빠르단 말도 듣는 축인디, 당신 겉이 발 빠른 사람 첨 보요. 뛰는 것인지 날르는 것인지, 산사람덜 발 빠르단 말이야 들었는디, 산사람 아닌 당신은 그 빨른 발로 천상 발 심바람 해묵고 살게 타고났소."
힘이 들어 하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요 몬뎅이럴 올라챘으먼 벌교도 다 간 심잉께 담배나 한 대썩 꼬실림스로 다리쉼얼 헐께라?"
하대치가 인심 쓰듯이 입을 뗐다.
"아이고 지발 그럽시다. 아무리 다급혀도 사람이 살고 봐야재, 요 폴이 천근만근이요."
피 서방이 왼쪽어깨를 올렸다 내리며 엄살을 섞었다.
"그러기도 헐 것이요. 나도 땀이 곤곤하게 뱄는디 기왕 쉴라먼 쩌그 저 바웃뎅이 그늘로 갑시다."
하대치는 턱짓을 하며 발을 떼어놓았다. 그가 턱짓한 쪽은 큰길에서 서른 발짝 남짓 떨어진, 골짜기가 시작되는 지점이었고, 거기에는 큼직큼직한 바윗덩이들이 서로 등을 기대고 있었다.
"다리가 심들어 쉴라는 것인디 멀라고 한 발이라도 더 가고 그래쌓소. 나넌 그냥 여그서 쉴라요."
피 서방은 선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으려고 했다.
"피 서방, 그러덜 말고 날 따라 오씨요. 담배 꼬실리는 간격이 한참인디, 편허게 쉬고 담배맛도 지대로 보자먼 자리가 좋아야 쓴다 그 말이요. 나 말 안 듣고 정 거그서 쉴라고 허먼 나 그냥 가뿔라요. 워쩌겄소?"
"허기넌 손 요 모냥 해갖고는 나 혼자 담배도 못 몰 처지고, 그냥 가기 보담이야 쉬는 것이 낫겄제라아."
피 서방은 기운 빠진 소리를 늘이며 하대치 쪽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은 바위 그늘을 골라 앉았다. 하대치는 쌈지를 꺼내 담배를 말았다. 피 서방에게 먼저 건넸다. 또 하나를 말아 자신의 입에 물었다. 성냥 하나로 불을 나눠 붙였다. 담배를 맛있게 빨아대고 있는 피보길의 옆모습을 하대치는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긴장이 안개 걷히듯 풀려나감을 담배맛과 함께 느끼고 있었다. 하대치는 담배를 새로 돋은 풀 위에 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입에 대고 둥글게 겹쳐 모았다.
"풀꾹, 풀꾹, 풀꾹."
풀꾹새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 울렸다.
"먼 소리여?"
피 서방이 놀란 듯 후딱 고개를 돌렸다.
"짬짬혀서 한분 혀봤소."
하대치가 씨익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무신 새가 요리 가차이서 운다냐 싶어 놀랬소. 영축웂이 풀꾹새 소리요. 참말이제 별난 재주 다 지녔소이."
"돈벌이도 안되는 요런 것이 재주는 무신 재주요."
"돈벌이야 발 심바람으로 허고. 넘 못허는 그것이 을매나 용헌 재주요."
"싸게 담배나 태우씨요."
피 서방이 고개를 되돌리고 막 담배를 입에 물 때였다.
"하 동무, 무사허셨구만이라."
느닷없이 들린 목소리였다.
"머시……”
소리 나는 쪽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리던 피 서방은 말을 멈춘 상태의 모양 그대로 입을 반쯤 벌린 채 뻣뻣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개 겉은 자석, 나가 누군지 알겄어?"
피 서방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서 있는 것은 강동기였다.
"싸게 뜨세, 강 동무."
하대치가 피 서방의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잡아끌며 일어섰다.
피 서방은 마치 허깨비처럼 자기보다 키가 작은 하대치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골짜기로 좀 더 들어간 바위 뒤에 염상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댕게 왔구만이라. 요눔이 그눔이구만요."
하대치가 피 서방을 염상진 앞에 세우며 보고했다.
"수고했소. 그놈을 무릎 꿇려 앉히시오."
염상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 서방은 스스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 들어. 너, 우리가 누군지 알겠지?"
바위에 걸터앉은 염상진이 찬바람 도는 엄한 얼굴로 피 서방을 쏘아보며 물었다
"야아……"
"저 사람 알아보겠나?"
염상진이 강동기를 가리켰다.
"야아, 그때 그……"
"왜 잡혀왔는지 알겠나?"
"모, 모르겄는디요."
"지금부터 묻는 말에 거짓말하지 말고 대답해라. 만약 거짓말을 하면 죽는다."
"야아……"
“그날 서운상이를 해치운 게 저 사람 혼자였나, 그렇지 않으면 셋이 함께였나."
"저 사람 호, 혼자였구만이라."
"다른 두 사람은 뭘 했나."
"저 사람얼 말겠구만이라."
"그런데, 왜 경찰서에 가서는 세 사람이 합세를 했다고 거짓말을 했나?"
피 서방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하대치는, 바로 이 대목이라 생각했다.
"고개 들어. 죽고 싶으면 거짓말해도 좋다."
"아니구만요, 참말만 허겼어라. 긍께, 쥔 아짐씨허고 쥔 어런 동상허고 둘이서, 쥔 어런 원수를 갚아야 쓴께 자꼬. 그리 말허라고 혀서……"
피 서방은 또 고개를 떨어뜨렸다.
"대장님, 아까 저눔이 설핏 말허는 것이, 한밑천 챙기고 헌 짓이구만요."
하대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 뭘 받아먹었는지 빨리 말해.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면 당장 죽어."
"야아, 첨에넌 그럴 맴이 하나또 웂었는디, 쌀가마니럴 줄팅께 그리 허라는 말얼 듣고 봉께 지 맴이 요상허게 변혔구만요. 그런 그짓말 혀주고 쌀가마니 받을 수 있다면야 나 폴 뿌라진 값도 쳐받어야 쓰겄다, 고것 둘을 합친 값얼 톡톡허니 쳐받어 머심살이럴 면허자, 그리 생각이 돌아간께 지 정신이 아니게 그짓말얼 하게 되얐구만요. 살려 주시씨요."
"못난 놈, 네놈이나 똑같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네놈 혼자 잘 살겠다고 그 사람들을 해치다니. 너 같은 놈은 서운상이보다 더 나쁜, 생매장감이다."
"아이코메, 살려주시씨요. 시키는 일이먼 멋이든지 다 헐팅께 살려만 주시씨요."
"그 말, 참말이냐!"
"하먼이라, 하먼이라."
"그래, 네놈이 살아날 길은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이 뭔고 하니, 앞으로 재판이 벌어지면 네놈이 또 증인으로 나가게 되니까, 그때 네 입으로 네놈이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걸, 지금 이 자리에서 한 것처럼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 할 수 있겠나!"
"하먼이라."
"하먼이라, 하먼이라, 쉽게 대답하고 또 마음 변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염상진이 피 서방 눈앞으로 무언가를 불쑥 디밀었다. 권총이었다. 피 서방은 파랗게 죽어가고 있었다.
"또 거짓말을 하면 넌 우리 손에 죽는다. 약속해라."
"야, 야, 야악속……”
"똑똑하게 끝까지 말해!"
"야악속허겄구마안이라."
"됐어. 또 하나, 오늘 일을 죽을 때까지 입 밖에 내지 않겠다는 걸 약속해라."
"야악속허겄구마안이라."
"그 두 가지 약속을 지키기만 하면 넌 다시는 우리를 안 만나도 된다. 그러나, 약속을 어기면 우리를 다시 만나야 하고, 넌 죽는다. 우리는 네가 하는 짓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안다는 걸 명심해라. 알겠나."
"야아……”
"됐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라. 어서 가."
"고, 고맙구만이라, 고맙구만이라."
피 서방의 목소리는 그대로 감격적인 울음이었다.
몸이 경직되었던 탓인지 목소리에 비해 그가 몸을 일으키는 동작은 더디고 힘들어 보였다. 그는 흔들리는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골짜기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것도 가엾은 인민의 한 모습이다……
염상진은 피 서방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자, 출발이다."
피 서방의 모습이 반쯤 가려졌을 때 염상진이 돌아섰다.
하대치와 강동기는 몸을 추슬렸다. 율어까지의 산길은 꽤나 먼 거리였다.
'심재모 사령관님 각하' 전 상서
수업시 생각허고 또 생각허고 망설이고 또 망서리다가 종당에는 작심을 허기로 하였습니다. 타향사리 허심스로 불편허지 안는 거이 업것지만은 사소헌 손수건 하나라도 지대로 장만이 되었는가 허는 걱정시러움이 마음에 자꼬 걸려서입니다. 여자가 먼첨 나대는 것이 숭잽히는 일이라는 거슬 다 암스로도 허는 일이니 숭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가 누군지 알라고도 마시고 보내는 손수건만 자알 써주시면 지 마음은 족허고 족헙니다. 항시 몸조심허십시요.
사령관님을 멀리서 등대불로 삼고 있는 못난 여자가
심재모는 편지로 눈길을 보냈다가 손수건으로 눈길을 보냈다가 하고 있었다.
글씨는 그다지 잘 쓴 것이 아니었지만 또박또박 씌어진 한자, 한 자가.얼마나 신경을 쓴 것인지 첫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한창 유행하고 있는 가제손수건에도 글씨에 못지않은 정성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물처럼 얼금얼금하게 짜인 가제천의 올이 풀리지 않게 하려고 그 가장자리를 실로 감치게 마련인데, 기왕 감치면서 멋까지 내기 위한 이중효과로 색실을 쓰는 것이 예사였다. 그런데 책상 위에 놓인 손수건들은 그 색실이 각기 다른 다섯 가지였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두 색을 더 보태 사랑의 무지개를 만들지 그랬나, 이런 생각이 얼핏 떠오르자 심재모는 스스로에게 쑥스러워져 픽 웃었다.
편지와 손수건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는 심재모의 기분은 여러 가지로 묘했다.
그것이 여자로부터 생전 처음 받아보는 연애편지고 사랑의 선물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한 여자의 주목을 받아왔다는 점이 그랬고, 자신이 어느 여자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그랬고, 그런 사실들이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음이 그랬고, 결혼을 재촉하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을 때는 무관심했던 마음이 낯모르는 여자의 편지를 받게 되자 자신이 결혼적령기를 넘기고 있음을 실감하는 것이 그랬고, 자신을 위해 색색의 수실을 써서 손수건을 만든 여자가 어떤 여자일까 하는 관심이 슬그머니 동하는 것이 그랬다.
심재모는 다시 편지로 눈길을 보냈다.
'심재모 사령관님 각하 전상서'
그는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각하'라는 존칭이 웃음을 자아냈다. '사모하는 심재모씨'로 쓰고 싶은 마음을 참아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업시 생각허고 또 생각허고 망서리고 또 망설이다가……’
손수건을 만들면서, 만들어놓고도 보낼까 말까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여자의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먼첨 나대는 것이 숭잽히는 일이라는 거슬……’
심재모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을. 자신이 정숙하지 못하고 얌전하지 못한 여자로 오해받을까봐 염려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가 누군지 알라고도 마시고……’
심재모는 눈을 내려 감았다. 몇 번을 읽어도 이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을 감추려는 여자가 안쓰럽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심재모 자신으로서도 답답한 일이었다.
'사령관님을 멀리서 등대불로 삼고 있는 못난 여자가'
심재모는 다시 빙긋이 웃었다. 소설 같은 데서 본을 따 멋을 부리려 한 것이 웃음을 짓게 했다.
한지에 함께 싸인 편지와 손수건을 가져온 것은 사환아이였다.
"누가 요걸 전해드리라고 허든디요."
"그게 뭐지?"
"몰르겄는디요."
"누구였는데?"
"워떤 아이요."
심재모는 사환아이를 부를까 말까 망설였다. 사환아이를 불러 그 아이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보고도 싶었고, 사환아이가 모르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결국 사환아이를 부르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 여자의 마음씀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 몰라도 굳이 알아내려고 하기가 싫기도 해서였다.
심재모는 편지를 본래대로 접어 손수건과 함께 한지에 쌌다. 그것을 책상 오른쪽 맨 아래 서랍에다 넣었다. 그러면서, 아무튼 앞으로는 읍내를 돌아다니며 전처럼 마음에 거리낌이 없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연정을 가진 여자의 눈길이 어디서인지 모르게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은 기분 나쁜 일은 아닐지 모르나 신경이 쓰이는 일임은 분명했다.
김범우는 서울행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무심코, 오늘이 3월 16일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학기는 6월에 가서야 바뀌지만, '공부에 임하는 태세를 갖추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옛 어른의 가르침에, 공부는 빠르고 늦음이 없다고 했니라. 가서 공부에만 충실해라. 속이 차야 볼 것도 바르게 보는 눈이 생기고, 듣는 것도 바르게 듣는 귀가 생기는 법이다. 그라고…… 니는 이 집안의…… 장자 노릇을 해얄 사람잉께."
아버지의 말이었다.
아버지는 마침내 형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체념하고 있는 당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낸 것이다. 그 대목에서 말을 두 번이나 멈춘 것은 당신의 괴로운 심중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었다.
어머니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버지를 타박하지는 않았다. 아내처럼 심하지만 않았을 뿐 어머니도 자신이 때늦은 공부를 하러 집을 떠난다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같은 문제를 놓고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는 각기 그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다.
아버지의 뜻은"가서 공부에만 충실해라" 하는 말에 함축적으로 들어 있었다. 중단한 공부를 시킬 겸해서 불안정한 정치상황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자식을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의도였다. 아버지의 그런 이중적인 의도에 비해 반대 입장에 선 어머니나 아내의 뜻은 순진하도록 단순했다. 어머니는 큰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차에 작은아들이나마 옆에 두고 싶어 하는 모성이었고, 아내는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꺼리는 여자의 마음이었다.
누구의 뜻이 어쨌든 간에 막상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처럼 서울행을 작심한 것은 정작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되는 계획이 있어서였다. 공부를 마저 마치겠다는 점은 같았지만, 혼란한 정치상황으로부터 격리당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또 하나의 현장을 찾아가는 기회로 삼기로 한 것이다.
학병에 끌려가면서 중단된 공부를 다시 이으려고 하는 사이에는 흘러간 5년 세월이 들어앉아 있음을 김범우는 새삼스럽게 상기하고 있었다. 그 5년, 결코 허송했거나 뜻 없이 보낸 세월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공부는 중단되었을망정 그 세월은 많은 것을 겪게 했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으며, 많은,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것은 공부가 가르치거나 일깨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김범우는 벌교를 떠나오기 전에 서민영을 만났을 뿐이다.
"공부가 끝이 있겠나만 정규과정을 끝내기로 한 건 잘한 일인 것 같군. 사람이 공부를 하는 건 사람으로서 뜻을 바르게 세우고자 함일 것이네. 자네 전공이 역사학인 만큼 그 점 특히 명심하시게."
서민영 선생다운 다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학교 신설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손승호를 생각하며 물었다.
"교육법이 아직 통과되지 않아 금년에는 어려운 모양이네. 벌써 3월 아닌가. 교육법보다 더 시급한 농지개혁법도 통과가 안 되고 있으니 무리는 아니지."
"농지개혁법은 곧 통과가 될 거라는 소식 아닙니까?"
"그게 현 정권 유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문제이니 도리가 없는 일이지. 허나, 그 실시는 진작 늦어진 거니까 이제 와서 시기는 문제가 안 되는 것이고, 문제는 방법인데, 그것 때문에 통과가 지연되고 있는 것이야 뻔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방법으로든 농지개혁을 하나마나로 만들 것이네. 농민들의 호응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평과 반감만 사게 될 테니까."
현시점에서 분단 상황을 완화시키는 것은 사상대립을 완화시키는 일이고, 사상대립을 완화시키는 것은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일이고,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법을 택하는 일이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법을 채택하는 것은 지주계층의 와해와 함께 사회경제의 새 구조를 탄생시키는 일이고 사회경제의 새 구조가 탄생되는 것은 민권회복과 인권회복을 동시에 이룩하는 일이고, 민권회복과 인권회복을 이룩하는 것은 절대다수의 의사로 좌우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일이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탄생되는 것은 민족통일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서민영 선생은 말했다.
"그러나, 이게 다 잠꼬대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내가 모르지 않으니 비애가 아니겠나. 현 상황으로선 내가 한 말의 반대 방향으로 내닫고 있으니 암담할 뿐이네."
서민영 선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분단 상황의 경직화를 심히 우려했다.
현 정권의 주도세력인 친일 지주계층과 그 하수인 격인 민족반역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찰과 군대의 기존조직에다가, 50만을 넘는 월남자 태반이 그 조직에 분산 가세했고, 그와는 반대로 농민들의 원한에 찬 생존욕구가 팽배해 있는 상태에 200만을 넘는 귀환동포가 거기에 흡수 가세한 점을 지적했다.
"귀환동포라는 사람들은 그 의식이나 식견이 토착농민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네. 그들도 물론 고향을 떠나기 전에는 대체로 농민들이었는데, 고향을 떠나서는 여러 가지 직종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네. 도시 막노동자, 공장이나 광산·부두 등의 하급노동자로 말이네. 물론 계속 농민생활을 한 사람들도 많은데, 문제는 그들의 생활환경이 우리나라와는 판이했다는 점이지. 우리 땅이 폐쇄적이고 통제적이었던 데 반해 그 사람들이 산 일본이나 간도·만주 등지는 훨씬 개방적이고 자율적이었던 게야. 그들은 직종과 생활환경의 변화에 따라 의식이나 식견이 달라지게 되었네. 경제에 대한 인식은 물론 사회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사상적 영향도 많이 받게 된 거지. 그런 그들이 막상 고향에 돌아오니 어찌 되었지? 먹고 살 땅이 있나, 잠을 잘 집이 있나. 식이나 식견이 이미 달라져 있는 그들은 타관생활보다 더 나쁜 생계위협을 당하게 된 게 아닌가. 그들이 자구수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나. 월남한 숫자에 못지않게 월북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이고, 회정리 이구처럼 그들 중에 좌익 가담자가 월등히 많은 것 등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이 대립적 갈등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란, 내가 보기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른 농지개혁 단행밖에는 없네. 보게, 지금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농토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어떤 주의든 지지하고 따르게 되어 있는 상황이네. 이건 바로 갑오란 때와 똑같은 상황이란 말일세.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동학이라는 종교사상이 갑오란을 일으켰느냐, 농민들이 그 종교사상을 행동의 계기로 삼았느냐가 문제인 것이네. 다시 말해, 어떤 사상이 다수의 사람을 의식화로 무장을 시키는 것이냐, 아니면, 다수의 사람이 공동으로 처한 생활의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사상을 필요로 하느냐 하는 점일세. 그건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호작용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보통이지만, 갑오년 농민항쟁의 경우에 있어서나 지금 우리의 상황에 있어서는 후자의 경우가 분명하네. 그 근거는 중국을 보면 확실해지네. 모택동의 공산당 정부가 지난 2월 북경으로 옮기지 않았나. 그건 중국대륙의 공산화 성공을 뜻하는 것인데, 그게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능력이냐, 아니면 봉건사회의 변혁을 원하는 절대다수 민중들의 수용이냐, 하는 점인데, 그건 먼저 후자의 작용인 것이네."
이야기 중에 김범우는 손승호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을 할까 말까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입에 올리지 않고 서민영 선생 앞을 물러 나왔다. 손승호의 괴로움은 손승호의 것이지 서민영 선생이 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손승호를 다시 만나지 않고 벌교를 뜬 것도 그 까닭이었다.
학교를 그만두려고 할 정도인 손승호의 고민에 대한 대안은 그 누구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발을 붙일 수 없는 손승호의 고민은 그야말로 철저한 개인적 문제였다. 왜냐하면 손승호는 김범우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에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김범우는 서민영 선생 곁을 어느 기간이나마 떠난다는 사실에 가슴이 비는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홉 시간 남짓 걸려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밤기차는 어둠 속을 줄기차게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가고 있는 것은 잘 가고 있는 것일까……
김범우는 창밖의 진한 어둠에 눈길을 던진 채 망연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 길이 여행일 수 있다면…… 갑자기 떠오른 그 생각이 어이없어 헤식은 웃음을 흘렸다.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인생이다. 여행은 새로운 체험의 보고이며, 아름다운 추억의 산실이다.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하며, 영혼을 살찌운다.
여행을 이런 식으로 호들갑스럽게 미화하고 과장한 글들에 김범우는, 아무런 실감도 동감도 느끼지 못했다. 여행이 새로운 곳, 미지의 세계를 보고 느끼는 것이므로 그렇게들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자신은 단연코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지구를 완전히 한 바퀴 돌았으니 말이다. 그 교통수단도 다양해서 배와 비행기까지 다 탄 것이다. 그런데도 여행에 대한 보드라운 감상이나 낭만적 정서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아마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타의적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행위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일본에서 동지나해를 횡단해 버마에 이른 뱃길,
버마에서 이집트를 경유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의 비행기길,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거기서 다시 인천까지 태평양을 횡단한 뱃길,
이렇게 따지고 보면 자신은 정작 가장 손쉬운 기차를 제일 짧게 탄 셈이었다. 중학 5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통학한 거리를 다 합친다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기차와 기찻길은 일본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입에 올리던 자랑거리였다.
"우리는 미개한 조선 전역에 기찻길을 놓아주었다. 그 편리한 시설로 걸어다니는 미개생활을 면하게 하고, 타고 다니는 문화생활을 하게 해준 그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조센징은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에 대대로 감사해야 한다."
일본놈들이 뻔뻔스럽고도 자신만만하게 지껄여댄 소리였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서구라파 제국이 이룩한 산업혁명을 선망과 동시에 열등감으로 바라본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산업혁명의 성취가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이루어진 과학문명의 발달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차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지칠 줄 모르고 달리는 검은 철마, 그 신기한 기계에 대한 일본인들의 끈질긴 관심은 마침내 그들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만들어내게까지 되었다.
그들은 그 신기한 기계를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영토에 미친 듯이 설치해 나가기 시작했다. 본토와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대륙에까지 일본인이 가설한 철도는 뻗어나갔다. 결국, 서구라파 제국이 산업혁명의 결과로서 발전시켜온 기차와 철도를 일본인들은 1차적으로 효과적인 식민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했고, 2차적으로 대륙침략의 무기로 활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였고, 이차대전이 일어나게 되자 그 순서는 완전히 뒤바뀌어, 기차는 중국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는 전투 무기화 하게 되었다. 일본은 본래 섬나라이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에 수많은 항구를 개발해 해상교통을 극대화시켰지만, 만약 철도시설이 없었거나 빈약했더라면 조선의 수탈을 그렇게 잔인할 만큼 철저하고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었을 것인가는 결코 상상만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일본이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그렇게 중국대륙 깊숙이 침략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철도시설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느 외국학자의 별로 새로울 것 없는 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4년이 다 되어 가는 최근까지도 일본놈들이 강변하고 주입시킨 대로 철도시설을 '일본의 공이고 은혜'라고 주절거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에 김범우는 암울해지고는 했다.
그는 얼핏 스쳐간 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기차가 멈추려는지 속력이 아주 느려져 있었다. 그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저언주, 저언주, 여기는 전주역입니다. 내리실……"
아아, 전주!
김범우는 감정의 동요를 느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전주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강한 감회가 가슴을 흔든 것은 그 땅에 어떤 추억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박두병 때문이었다.
속이 깊고 농담을 즐길 줄 알았던 박두병, 그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한 고생, 그와 함께 한 고뇌, 그와 함께 한 결의, 그와 함께 한 체념,
그런 것들이 감정적인 면에서나 이성적인 면에서나 교감을 이룰 수 있었던 그와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고, 겸손한 양보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 이상을 넘어선 상태의 어떤 결속감이 발휘해낸 힘이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고, 그 생각을 떠밀며 그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이성적 그리움처럼 일어났다. 그를 찾아보고 하루쯤 묵어가는 게 어떨까. 김범우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때 그를 제지하듯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두 차례의 편지가 오가고, 자신이 세 번째로 소식을 보냈을 때 그에게서는 답신이 오지 않았다. 배달 사고인가 해서 네 번째의 편지를 보냈지만 역시 그쪽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박두병과는 그것으로 연락이 두절된 채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그가 전주에 살고 있으면서 말 한 마디 없이 소식을 끊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 막연함이 그를 더 보고 싶게 했다.
김범우는 느릿느릿 걸어 기차를 내려섰다.
전주의 하늘은 어둠을 타고, 어둠 그 깊고 먼 곳에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김범우는 깊게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그 하늘을 향해 자꾸 내뿜었다.
"서울행 추울바알, 서울행……"
기차가 덜커덩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까…… 김범우는 같은 생각을 다시 하며 기차에 올랐다.
박두병은 법대를 다니다가 학병에 끌려나온 처지였다. 그는 보통 키에 비해 체력이 강했고, 평범한 얼굴에 코가 유난히 뭉툭하게 커서 그나마. 개성을 유지하는 얼굴이었다.
약간 부족한 듯한 생김을 유감없이 보충하고 있는 것이 그의 목소리였다. 굵으면서도 맑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에는 언제나 정감이 흐르고 있었고, 그 목소리로 부르는 틀이 잡힌 판소리는 그의 품격을 다시 느끼게 했다. 박두병의 소리에 정신없이 반한 것은 하와이 포로수용소의 도라지였다. 위법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두 사람을 지프차의 뒷자리에 태우고 해변으로 빠져나가고는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으레 소리를 청했고, 박두병은 수영을 즐기게 해준 것에 보답이라도 하듯 태평양의 동쪽 수평선을 바라보고 서서 소리를 뽑아댔다. 노래라고는 아리랑도 제대로 못 부르는 김범우 자신은 언제나 미안한 청중일 뿐이었다.
훈련 사이의 휴식시간에 농담들을 하다가 유태인 교관이 박두병의 코를 가리키며 '돼지코'라고 놀려대며, 별명을 삼자고 했다. 박두병은 코를 소중하게 만지작이며 능청맞게 응수했다.
"그걸 별명으로 부른다면 나는 더 없는 영광으로 알겠다. 너희 서양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동양에서는 코 큰 남자를 제일로 친다. 왜냐하면 코가 크면 남자의 상징인 그것이 크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한 속설이나 미신이 아니고 바로 내 물건이 그것을 증명한다. 내 물건은 보통사람의 두 배는 큰데, 네 눈으로 확인해볼래?"
박두병은 벌떡 일어나 혁대를 풀었고 유태인 교관은 갓 댐 어쩌고 소리치며 혼비백산했던 것이다.
배짱이나 농담이 언제나 그런 식인 박두병은 이미 아내와 자식을 거느린 몸이었다. 완고한 아버지의 주장에 따라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장가를 간 것이다. 박두병은 그런 몸으로 죽기를 각오해야 하는 OSS에 자원한 것이었다. 그 점이 박두병을 더욱 큰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그는 식자가 좀 들었다는 사람들이 농민들을 무조건 무식하다거나 무지한 집단으로 몰아 무시하고 멸시하는 태도에 대해 무엇보다도 분개했다.
"그건 글줄이나 읽었다는 자들이 저지르는 가당찮은 착각이고 자만이고 오해야. 인생살이 전체를 놓고 생각해볼 때 유무식의 차이란 글줄을 읽고, 안 읽고의 차이가 아닐 것이네. 그건 인생살이의 진실이나 고통을 얼마나 아느냐, 모르느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네. 농민들만큼 인생살이의 쓰라림과 아픔과 슬픔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이 또 누가 있나. 그리고, 세상의 잘못 짜여진 구조에 대해서, 그것이 배웠다는 자들이 꾸미는 집단횡포라는 것에 대해서, 배운 자들의 교활과 위선과 자만에 대해서 그들은 다 느끼고 판단하는 이지를 가지고 있어. 그런데 배웠다는 자들은 그들이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바보나 천치들인 것으로 취급하려 들어. 그거야말로 큰 코 다칠 일이지. 배웠다는 자들이 번드르르한 말로, 그럴싸한 이론이라는 것으로 발라 맞추는 대신 그들은 모든 것을 몸으로 부딪치고, 몸으로 깨닫고, 몸으로 말하네. 소리가 아닌 몸으로 하는 말을 배웠다는 자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야. 농민들은 인생살이의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세상판세 돌아가는 잘잘못이 무엇인지 환히 알고 있어. 그러면서도 식자라는 것들처럼 소리 내서 말하지 않을 뿐이야. 말을 해도 그들끼리만 낮게 말하고, 그들끼리만 통하는 몸으로 하는 말을 해.
배웠다는 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거지 동냥 주는 식으로 한다는 짓이 '농촌계몽'이야. 그거야말로 식자층이 일방적으로 농민들을 무시하고 멸시한 결과로 나타난 대표적인 행위지. 도대체 삶의 진정한 아픔이나 괴로움을 모르는 자들이 그것을 뼈저리게 체득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무엇을 계몽한다는 것인가. 글자 몇 자 가르치고, 허황한 소리나 지껄이다 마는 것이 계몽인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 계몽을 고마워하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네. 고달픈 삶을 온몸으로 겪고, 온몸으로 부대끼고, 온몸으로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따위 어설픈 짓들 하다가 언젠가는 크게 당하게 될 거네. 그런데 말이야, 농민들이 온몸으로 하는 말, 그것을 딱 한마디로 줄일 수 있는 말이 없을까? 나도 생각해볼 테니, 자네도 한번 생각해보게."
김범우는 하룻밤을 생각한 글에 두 개의 단어를 조립해낼 수 있었다.
"이봐, 전신언어나 생체언어가 어떤가?"
"전신언어, 생체언어…… 응, 생체언어가 힘도 느껴지고 실감이 나서 더 좋은데. 그래, 생체언어, 그거 좋은 말이야. 농민은 생체언어로 사회에 발언하고, 생체언어로 삶의 진실을 표현하며, 생체언어로 역사에 참여한다. 됐어, 됐어, 아주 잘 어울리는군."
박두병은 소년처럼 기뻐했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김범우는 이 생각을 되풀이하다가 피곤이 변색해 가는 흐릿흐릿한 잠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심재모가 여자를 율어로 들여보낸 것을 문젯거리로 제일 먼저 포착한 것은 토벌대장 임만수였다. 심재모는 그 일을 공개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밀에 부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임만수는 그 일을 금방 알게 되었고, 심재모에게 줄곧 앙심을 품어오고 있던 그에게 그건 일대 사건으로 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큰 먹이가 걸려들었음을 직감했고, 가슴이 벌떡거리는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그렇게도 무참히 병신을 만들더니…… 내가 그것을 한시라도 잊은 줄 아느냐. 네놈은 공포를 쏴질렀다만 나는 네놈 심장을 정통으로 쏘아 맞히고 말거다.
임만수는 전신을 떨어댔다.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힘이 팽팽하게 뻗쳐올랐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실수가 없도록, 일거에 공격을 가해 쓰러뜨릴 수 있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빨갱이와 내통한 좌익분자 - 이 죄목이야말로 결정타가 아닐 수 없었다.
아, 이런 기막힌 기회가 오다니, 이런 기회는 다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임만수는 차츰 침착을 회복해갔다.
놈이 한 짓을 샅샅이 적어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다. 한 곳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 보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커지고, 묵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나 혼자 이름으로 해야 하나? 혼자 하면…… 힘도 약하고, 결국 내가 한 일인 게 밝혀지지? 그 정도로 사형을 당할 리는 없을 거고, 심재모 그놈이 풀려나면 또 보복을 하려 들겠지? 안되지, 후환을 남겨서는 안 되지. 놈이 꼼짝달싹 못하도록 큰 힘으로 밀어붙이면서 내 이름을 감출 수 있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때 마침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염상구였다. 그도 심재모에게 감정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지눔이 계엄사령관이먼 다여? 나가 한분 종그기 시작허먼 지눔 신세가 바가지 깨지대끼 헐 때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써."
지난번에 염상구는 이빨을 갈아붙였던 것이다.
임만수는 지체 없이 염상구를 찾아 나섰다. 경찰서를 거쳐 청년단까지 갔지만 염상구는 없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임만수는 짜증을 부리며 다시 차부 쪽으로 내려왔다. 다방에서 아가씨를 희롱하고 있는 염상구를 찾아냈다.
"대낮부터 이게 뭣 하는 짓이오, 점잔찮게."
임만수는 그를 찾아다니느라고 괴어오른 짜증을 그대로 토해냈다.
"허어 참, 장닭이 밤낮 개림스로(가리면서) 일 헙디여? 몰르먼 말이나 마씨요이."
염상구는 태연하게 대꾸했고, 옆자리에 앉았던 아가씨는 얼굴을 붉히며 달아났다.
"아니 임 대장, 워째 넘 청춘사업에 재 뿌리고 그러요? 저것이 새로 온 가씨네라 입맛 다사고 있는 참인디."
"청춘사업이고 입맛이고, 사건이 생겼소."
"사건?" 염상구는 금방 반응을 나타냈다.
"혹시, 심재모가 어떤 여자를 율어로 들여보낸 사건을 알고 있소?”
"알제라."
의아한 얼굴을 한 염상구는,
"그까징 거이 무신 사건이라고 그래쌓소. 나넌 나가 요리 태평치고 앉었는 새에 강동기라도 잡아뿐 줄 알었소."
그는 맥 빠진다는 듯 의자에 몸을 부려버렸다.
"염 부장!"
임만수는 염상구 앞으로 얼굴을 내밀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것이, 빨갱이와 내통한 좌익분자의 소행이라고 생각지 않소?"
낮으면서도 질긴 목소리로 말했다.
염상구의 얼굴은 긴장되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맞소!" 소리 지르며 탁자를 내리쳤다.
임만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무식한 놈이 눈치 하나는 여우새끼처럼 빨라,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에 물었다.
"글먼 고것을 워째야 쓰겄소?"
염상구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염 부장이 말한 대로 이번 기회에 그놈 신세를 바가지 깨버리듯 하지 않겠소?"
임만수는 벌써부터 뒤로 물러서며 염상구의 옆구리를 긁어대고 있었다.
"하먼이라, 종글 기회가 왔는디, 나가 당헌 만치 짭고 맵게 복수럴 혀야지라. 근디, 워째 임 대장은 넘 일 말허대끼 허고 앉었소?"
임만수는 그만 속이 뜨끔해졌다. 역시 만만한 놈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염 부장을 찾아온 게 아니겠소. 그런데 말이오, 심가 그놈이 꼼짝을 못하게 치려면 이쪽 힘이 클수록 좋고, 그놈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감쪽같이 해치워야 하는데, 그게 문제란 말이오."
"걱정도 팔자요. 그눔 헌 짓거리에, 죄목할라 그리 근사허고 멋 떨어진 마당에 그눔 손모가지에 쇠고랑 채우기는 목구녕에 넴긴 괴기요. 들어 봇씨요."
염상구는 입을 야무지게 훔치고 다시 자리를 고쳐 앉더니,
"심재모 그눔이 지 혼자 잘난 칙 험시로 꺼떡기레봤자 폴세부텀 지주덜헌테 미움을 살대로 다 사고 있소. 임 대장도 다 알디끼. 지주덜 편에 거마리 붙디끼 찰싹 붙어야지 신간 편코, 지 명도 질 것인디, 요것이 멀 믿고 사사건건 지주덜이 싫어허는 쪽으로만 일을 혀왔다 이것이요. 긍께로 지주덜이 그눔얼 바까치고 잡아허는(싶어하는) 속맘이야 우리허고 피차일반일 것이요. 요분 일얼 지주덜이 해치우게 허먼 워쩌겼소."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렇지, 좌익척결위원회가 있었지. 임만수는 그 단체가 동원되면 힘이 커지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염 부장은 좌익척결위원회를 생각하는 모양인데, 일은 심가가 모르게 감쪽같이 해치워야 할 판인데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다 보면 이야기가 새나가 심가가 미리 알아버릴 염려가 있단 말요."
"구데기 무서바 장 못 담겄소. 사람이 많다고 해야 위원장·부위원장·총무 세 사람이고, 그 사람덜이 세 살 묵은 아그덜도 아니겄고, 다 즈그덜 눈구녕에 백힌 까시 빼는 일인더 즈그 발등 찍는 해로운 입얼 워째 놀리겄소."
염상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했다.
"그럼, 어쩌면 좋겠소?"
"워쩌긴 워째라. 고름이 살 안되는 법잉께 당장 유주상이럴 찾아 가야제라, 갑시다, 얼렁."
염상구가 의자를 거칠게 뒤로 밀며 일어섰다.
두 사람은 기세 좋게 금융조합을 향해 발을 맞추었다.
거만스러운 앉음새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유주상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좌시할 수 없는 중대사요. 빨갱이를 소탕해서 멸공통일을 이룩해야 할 중차대한 임무를 띤 자가 빨갱이를 소탕할 생각은 않고, 빨갱이와 내통해 빨갱이의 새끼를 낳게 하다니, 이건 엄연한 용공·이적행위요. 당장 좌익척결위원회의 이름으로 그자를 상부에 보고해서 처단해야 할 일이오. 오늘 저녁에 위원장님과 부위원장님을 모시고 결정을 내려야겠소. 남원장에서 7시에 회의를 겸한 저녁을 먹을 테니 두 분도 참석해주시오. 그리고, 두 분께 당부할 말이 있소. 이 사실을 절대로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것이오."
"하먼이라." 염상구가 머리를 조아렸고,
"그것에 대해선 우리 두 사람이 먼저 염려했던 문젭니다. 사람이 늘어나게 되면 비밀 유지가 어려워지는 법이니까요."
임만수는 유주상의 지시하는 것 같은 꼴이 아니꼬워 말을 되받아 넘겼다.
"아, 우리 쪽은 추호도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그럼, 이따가 다시 만나도록 하죠."
두 사람은 조합장실을 나왔다.
"염 부장, 나 염 부장 다시 봐야겠소."
임만수가 금융조합을 나오자마자 경멸적인 투로 말했다.
"먼 소리다요?"
염상구는 짚이는 것이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했다.
"뭔 소리긴, 언제부터 유주상이한테 그렇게 꼼짝을 못하게 됐소? 염 부장, 배짱도 있고 오기도 있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영 뼈도 없고 배알도 없는 사람이구만. 자기 자리 뺏어 앉은 사람 앞에서 굽신거리기나 하고."
임만수의 말은 신랄했다.
염상구는 속으로 감추고 있는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임만수에게 노골적인 무시를 당하게 되자 그만 성질이 치솟았다. 속사정은 속사정이고 임만수에게 그런 꼴을 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임 대장님, 사람 드런 입장 몰르고 말 막 해대지 마씨요. 나가 그러고 잡아 그러는지, 헐수 웂응께 그러는지 한분이락도 생각혀 보고 허는 소리요, 시방? 청년단도 조직잉께 분명히 질서가 있어야 헌다고, 심가고 서장이고 유가헌테 무조건 복종해야 헌다고 왈김스로, 안 그러먼 감찰부장꺼지 띠뿐다고 허는디, 나가 워째야 쓰겼소. 아니, 임대장이 나 입장이라먼 워쩌겄소. 배짱으로 허고 주먹으로 헌다먼야 나 이 시상에 무서운 눔 하나또 웂소. 임 대장은 넘 속도 몰르고 넘 아픈디 푹푹 쑤시지 마씨요. 이해헐 만헌 사람이 그러먼 더 섭헌께요. 나가 임 대장보고, 워째 임 대장은 심재모헌테 꼼짝을 못허냐고 허먼 임 대장 속언 좋겄소?"
염상구는 마침내 임만수의 약점을 덜퍽 물고 들었다.
"아냐, 아냐, 내가 그냥 한 소리요. 미안하게 됐구, 그만둡시다."
임만수는 손까지 저으며 말을 피했다.
염상구는 말은 그렇게 얼렁뚱땅 해치웠지만 속이 켕기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미 유주상이한테 뒷다리가 잡혀 있었다, 염상구를 마음대로 다스리지는 못해도 최소한 자기편은 만들어야 했던 유주상은 그를 불러 돈다발을 내밀며 회유했고, 어차피 내놓을 수밖에 없는 자리 내놓은 것인데 의외의 돈이 생기자 염상구는 덥석 받아 챙기고 말았던 것이다.
최익달과 윤삼걸이 추가된 그들 다섯은 남원장 별실에 모여 앉았다. 술이 곁들여진 저녁밥상이었는데도 시중드는 여자는 없었다.
유주상이 최익달과 윤삼걸을 상대로 일의 전말을 이야기해 나갔다.
"…………좌익척결위원회의 이름으로 심을 고발조처하자는 건의인데 두 분, 위원장님과 부위원장님의 고견으로 결정을 내려야만 될 것 같습니다."
유주상은 윤기 도는 눈망울을 굴리며 달변을 끝냈다.
"고 싸가지웂는 자석이 인자 그물에 걸렸구만!"
최익달은 이렇게 불쑥 내뱉으며 책상다리를 고치더니,
"그눔언 용공·이적행위럴 헌 것이 아니라 바로 빨갱이질얼 헌 것이고, 빨갱이허고 내통헌 좌익분자가 아니라 바로 시뻘건 빨갱이여. 그렇지 않음사 그 자리 차고 앉어서 고런 짓거리럴 워찌 허겄어. 그눔이 그 짓가리 허먼 글안해도 삘건 물이 불그딕디그리 허게 든 저 아랫것들이 워쩌고 나대겄냐. 그것이여 안뒤여, 고런 눔헌테 우리 벌교럴 맽겨서는 안뒤여. 더 말허고 자시고 헐 것 웂어. 당장 상부에 보고해서 그눔얼 처치혀. 그눔얼 갈치속젓 담대끼 짭고 짜운 맛 뵈서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허게 해야 써."
그 말은 흥분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열분 백분 맞는 말이요. 그눔얼 요분 참에 단단허게 몰아쳐서 비얌껍디기 빗기대끼 군복을 홀랑 빗게서 다시는 못 걸치게 맹글어야 허요. 그 상녀러 자석이 예시당초부텀 허는 뽄새가 삐까닥허고 야리꾸리혔는디, 고런 군인눔덜이 많앴다가는 우리 겉은 유지덜 볼장 다보고, 이 나라도 결국 빨갱이 손에 엎어지고 말 것잉께 고런 종자덜언 뿌랑구부텀 쏙쏙 뽑아뿌러야 허요. 지금 시상이 워떤 시상인디 빨갱이 씨럴 받게 혀? 화아, 그눔이 뒤질라고 환장얼 혀도 열 분 혔지. 요런 일얼 알고도 그런 눔얼 조처허지 않으먼 우리도 빨갱이고, 대역죄인 되는 것이요. 당장 일을 벌레야 쓰요."
윤삼걸도 최익달 못지않게 흥분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의 결정이 내렸으니 좌익척결위원회 이름으로 곧 일을 진행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유주상이 결론짓듯 말했다.
"가만있어 보씨요. 아까 말허기럴 심이 클수록 좋다고 혔는디, 저 토벌대 이름도 항꾼에 넣고, 유 조합장 이름으로 청년단도 넣고 해서 도장 쾅광 눌러야 더 심이 씨질 것 아니겄소."
윤삼걸의 지적이었다.
"그거 부위원장 말씸이 맞소. 이름이야 많이 붙을수록 심지고 좋은께로."
최익달의 맞장구였다.
"그것 참으로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주상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느닷없는 결정에 임만수는 정신이 얼떨떨한 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었다.
"짜아, 큰일을 결정했으니 인자 술 한잔썩 돌립시다."
위원장 최익달이 술주전자를 들었다.
"다시 당부합니다만, 일이 성사될 때까지 절대 비밀이 지켜져야 합니다."
유주상이 좌중을 훑으며 못을 박았다.
"하먼, 대사에는 함봉이 질잉께로!"
최익달이 눈을 똑바로 뜨고'다시 좌중을 훑었다.
에라, 될 대로 돼라. 술이나 마시자.
임만수는 상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술잔을 들었다.
첫댓글 염상구 임만수
지금의 정치 형태와 대동소이
즐독 감사합니다
그 일이 이렇게 되잡히는 건가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