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들보니 몇가지 의문이 들어 나름 정리해보았습니다. 다른분들의 태클 혹은 지적 환영합니다.
1. 백제, 그 시조는?
백제,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건국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고구려의 온조와 비류가, 유리와의 왕위 대결구도에서 패해, 추종자들을 이끌고 남하, 한수 이남지역과 미추홀(인천)지역에 거점을 두고 나라를 세웠다. 미추홀지역에 건국한 비류는 그 토양의 안좋음과, 소금기 가득한 바닷물로인해, 나라를 온조에 받치고 본인은 자결하였다. 이리하여, 십제는 국호를 백제라 고쳤으니, 그 나라가 평안하였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렇게 백제 건국사를 믿고 계시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고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리하여, 백제는 한수이남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그세를 떨쳐, 대내적으로는 고구려왕을 전사시키고(근초고왕) 영토를 평양성 까지 확대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왜를 속복시키고, 요서지방을 장악하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사입니다.
하지만, 제가생각하는 백제 건국의 기틀은 조금 다릅니다. 일단, 백제와, 외백제에 대한 견해. 고서에 보면(자치 통감이) "요서의 백제가 부여를 자주 침공하였으며..."라고 나와있고, "중국의 대국이 요서의 백제를 공격하여..."라고도 기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백제의 요서 진출설을 말씀하셨고, 그것이 거진 정설로 가는 것같습니다. 헌데, 제가 보는 관점은(이도형님의 관점입니다만,) 외백제와 백제는 엄연히 다른 국가라는 겁니다. 일단, 백제 건국때로 보면, 비류백제와 온조백제가 하나의 백제로 이루어졌다고 나오죠. 여기서 전,(물론, 이도형님의 책을 빌어)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의 결합은, 북방 기마민족의 백제와, 한반도 내의 백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그 첫번째 이유로는, 비류백제의 한자와 온조백제의 한자가 다르다는점.(百濟가 아닌 다른 한자를 썼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온조백제와 비류백제의 지배계층이 북방에서 내려왔다는점. 마지막으로는, 온조백제와 비류백제가 합쳐진뒤, 한수 지방의 속국들을 힘으로 정복하였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역사의 관점으로 보면, 온조백제의 한수지방 평정은 어폐가 조금 많습니다. 당시, 한수지방에는 수많은 소국들이 존재하였는데, 건국한지 얼마되지 않은 백제가 과연 이들을 상대로 지속적인 전쟁을 벌일 수 있었냐는겁니다. 물론 말이 안되죠. 고구려나 부여처럼, 수많은 유민들을 규합하여 조직적인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는 거죠. 그당시 한수지역의 소국들은 목지국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소국이 공격을 받게되면 군사적인 동맹체도 결성이 가능했었구요. 이런상황에서 과연 막 건국을 한 온조백제가 이들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요? 국가의 기틀을 잡기도 벅찬상황에서 말이죠. 여기서 저는 비류백제를 대륙의 백제로 가정해보았습니다. 자치통감이나, 다른 중국 사서에서는 고구려나, 부여, 기타 북방민족과 중국의 국가들이 "대륙백제"와 전쟁을 치르는 부분이 심심찮게 나옵니다. 여기서 또한가지, 저는 대륙백제가 기병(특히 중기병)을 다룰 수 있는 유목민족으로 비정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한, 사서에 대륙백제를 쳐 이겼다고도 나옵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러한 가정을 할 수도 있죠. 대륙백제가 만주에서 활동하다, 주변의 강대국들과 지속된 전쟁으로 그 존재 자체가 위협받아, 중국과 여타 예맥족의 침략을 피해 반도로 남하하였다. 당시에는 국경선이 지금처럼 꼼꼼하게 감시되는것이 아니였으니, 고구려를 통해 남하하거나, 황해를 통해 남하하는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겠죠. 이렇게 남하한 대륙백제는 한수지역에 정착(비옥한 영토와, 풍부한 수자원으로 인한)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온조백제와 마주쳤다. 여기서 비류백제는 온조백제를 굴복시키고 기실 우리가 부르는 백제로 다시 탄생하였다.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되면, 백제 건국후, 지속적인 전쟁을 통한 한수지역 통합과, 더 나아가 충청지역까지의 영토확장도 가능했었을 꺼라 봅니다.
요는, 비류백제와 온조백제의 병합은, 대륙백제와, 반도백제의 결합이라는 겁니다. 물론, 가설이기는 합니다만, 어느정도 설득력도 있고, 당시 시대상황에 비추었을때도, 꽤 타당한것 같습니다.
2. 고구려와 백제는 형제국이였다?
삼국사기를 빌면, 백제는 고구려의 왕자들이 왕위다툼에서 패해 세운 나라라고 묘사됩니다. 또한 드라마 주몽에서는 2왕비가(이름이 기억이..;;) 아들들과 함께 남하해 백제건국에 일조했다고도 나오기도 하구요. 물론, 역사적으로 두 국가를 형제국으로 보는것에 그리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형제국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와 백제 모두 "동명왕묘"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많은 분들이 "동명왕"을 고구려 건국왕으로 생각하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말이 안되는 부분입니다. 만약 "동명왕(또는 추모왕)"이 고구려 건국왕이라면, 주몽이 고구려 건국 후 굳이 "동명왕묘"를 건설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본인이 살아있는데, 죽은 본인의 묘를 만드는게 말도 안되거니와, 위폐를 만들어 제를 지내는것이 말이 안되는거죠. 여기서 저는 고구려와 백제는 기실, 부여에서 떨어져나온 뿌리라는 겁니다. 두 국가 모두 "동명성왕 묘"와 "위폐"를 가지고 서로 제를 지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한다는 거죠. 부여 왕조의 뿌리를. 기실, 사서에 보면, 삼국시대에 가장 많은 전쟁을 한국가는 고구려-백제 입니다. 두 나라가 형제국이였다면, 굳이 이렇게, 국가의 존폐를 걸고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왕이 전사하면서까지? 여기서 전, 결국, 두 국가는 형제국이 아닌 경쟁국이라고 비정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비정한다면, 두 국가간의 많은 전쟁들이 설명이 되죠. 3~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고 근구수왕은 백제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왕들로 나옵니다. 또한 이 기간동안의 전쟁에서 고구려는 자신들의 수장을 잃기도 합니다.(고국원왕) 이후, 4세기후반,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에 의해 백제는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고, 결국 그 왕이 려왕에게 신하의 예를 옳리는 굴욕까지도 맛보게 되죠.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봤을때, 고구려와 백제는 형제국이다 라는것은 기실 말이 안된다고 보느것이 제 견해 입니다.
3. 백제는 대륙에 영토를 가진 해상제국이였다?
이 문제는, 솔직히 놓고 본다면, 강대한 해상국가였다는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대륙에 영토를 가졌다는 부분에서는 조금 이의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백제를 깍아먹으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일단, 중국 대륙에 백제 대륙이 있었다라는것. 이것은 논리 비약일 확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만약 대륙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면, 중국의 사서들이 그것을 기록 안할리가 없습니다. 또한, 현제 백제의 영토였다는 대륙에서 백제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죠. 요는, 대륙의 백제 영토는 실질적인, 유효영토가 아닌, "신라방"과 같은 대외무역의 기지로서 "자치구"적인 성격이 강한 곳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당시 백제는 강력한 해군을 무기로, 짧게는 중국과 일본을, 길게는 동남아와 서아시아까지 해로를 개척하였습니다. 이러한 해로는 백제의 무역업을 크게 발달 시켜주었고, 그에 맞추어 수많은 도시를 통해 무역을 하였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이렇게, 무역업이 발달하여 수많은 도시와 무역을 할경우 필연적으로, 현지에서 일을행할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죠. 상대국과의 공적 업무 처리나, 물건 및 현금의 교환등등. 이 부분에서 백제는 분명, 그곳에서 백제인들의 권리를 위한 어떠한 행동을 하였을 것이고, 그것을 상대국에서 인정하여 백제인들의 권리를 존중해주는 "자치구'"성격의 지역이 만들어졌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치구에 백제의 관료들이 출장을가 백제인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도 있구요. 물론, 치안을 위한 관군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대륙에는 백제의 "자치구"적인 지역이 존재하였지, 실제적인 백제영토가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만약, 실제적인 백제의 영토였다면, 백제의 정규군이 그 지역에 주둔했었어야만 하죠. 하지만, 여지껏 대륙의 백제영토로 비정되는 곳에서 백제 정규군에 관한 그 어떤 실증자료가 나오지 않은 관계로, 저는 대륙의 백제영토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왜와 백제의 관계는 사서에서 말하는 관계 이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백제가 위급하였을때-광개토대왕의 남하시-왜는 백제에 본국의 정규군을 파견합니다. 그리고 그 파견군들은 백제 제장들의 지휘를 받았구요. 두번째로는 칠지도의 존재입니다. 뭐 일본의 못난 학자들은 그것이 백제왕이 왜왕에게 받쳐다고 까대지만, 실제로는 백제왕의 하사품이라 보는것이 옳다고 봅니다. 당시 청동검은 무기로서는 가치가 없었으나, 그 의미로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청동검을 백제왕이 기분좋아하사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백제와 왜의 관계를 잘 알 수 있습니다.
4. 백제의 의자왕은 색을 밝히는 못난 폭군이였다?
이것은 분명하고 명백한 잘못입니다. 아마도, 통일전 승리 후, 신라 사서가들에 의한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제의 마지막왕 의자왕은, 상당히 유능한 왕이였으며, 쇠락해가는 백제를 다시금 일으키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왕입니다. 다만, 전후 사서가들의 왜곡일 뿐이죠. 본디 역사란 승자의 편에서 서술되기 마련이니까요. 의자왕은, 약화된 왕권의 강화를 꾀한 왕이였을것입니다. 영화 황산벌을 보면, 백제가 당의 침공을 받았을때, 의자왕이 제신들에게 "군사를 내라"라고 했을때, 제신들이 이러저런 딴지를 걸고 군사를 내주지 않았죠. 계백의 협박으로 군사를 내주었는데 고작 5천. 계백은 그런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의 5만 군대앞에 결국 전멸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영화를 끌어들인 이유는, 당시 의자왕과 백제 귀족들간의 관계가 영화에서 아주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에 빠졌는데도, 귀족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내주기를 꺼려하죠. 여기서 저는 의자왕이 하고자 하였던 일을 가정해보았습니다. "귀족세력의 탄압을 통한 중앙권력 강화". 그렇기 때문에 백제의 귀족들이 항전의사가 많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기실 백제의 멸망은 나당연합군의 공격도 있었지만, 가장 무서운 내분이 그 일조를 했다고 봅니다. 만약 의자왕이 사서 기술대로 색과 주에 빠진 왕이였다면, 백제 멸망 후, 승전국에서 의자왕을 참수해서 그 목을 효시하는것이 효과적인 방법이였을 겁니다. 왜냐면, 의자왕이 폭군이였다면, 그 폭군의 죽음이, 피점령지의 백성들로부터 호응을 얻어, 점령군의 인기를 올려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나라군은 그런 의자왕을 오히려 대려가버렸죠. 그건, 의자왕을 죽인다면, 오히려 당나라군에대한 백제인들의 좋지않은 시선이 폭동으로 발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의자왕은 당나라로 압송되고, 후에 그의 아들이 당나라 관리로서 백제영토의 제후로 중국에서 건너오게 되지요. 또한, 신라는 전후 당나라에 끈임없이 의자왕의 송환을 요구하게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의자왕이 취임 후 내각단행을 통한 중앙권력 강화와 더불어, 신라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려고한 정책 때문입니다. 이 전쟁으로 백제와 신라간에는 끊이없는 무력충돌이 발생 했었을 겁니다. 이로인해, 신라는 본의 아니게 많은 피해를 코앞에서 겪게 되었고, 그로인해 백제의 의자왕에대한 분이 쌓여만 갔을겁니다. 이제, 백제를 넘겨 그 분풀이를 하고자 하는데, 당나라에서 잡아갔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사실들을 토태로 볼때, 의자왕은 폭군이 아닌 명군이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백제 멸망 후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도 이해가 가죠. 만약 그가 폭군이였다면, 피 점령자인 백제 백성들로서는 새로운 점령군이 더 반가웠을 것이기 때문이죠. 백제의 마지막 명군 의자왕은, 이렇게 전후 승리국의 사서에 의해 위조된것입니다. 참고로 백제 멸망 후, 궁안에 살던 수많은 여성들이 몸을 강에 던졌습니다. 그 유명한 3천궁녀죠. 뭐 실제로 3천 명의 궁녀도 아니거니와, 그 인원구성은 궁녀 뿐만아니라, 왕실에 종사했던 수많은 여성들이였겠죠. 본인들의 주군이, 적앞에 무릎꿇고 잡혀갔고, 조국이 망했으니, 마지막 충성을 죽음으로 갚은것입니다. 사서나 알고있던데로, 의자왕의 궁녀들이 아니였죠. 어찌보면, 이들도 충신들이 아니였을까요?
5. 흑치상지, 그는 매국노인가 충신인가?
백제 부흥운동을 이끈 충신 흑치상지, 허나, 종국에는 중국의 관리가 되어 백제 부흥군을 격퇴시킨 매국노. 그에대한 우리의 시각이죠. 어찌보면 흑치상지에대한 평은 충신보다는 매국노쪽이 더 표를 많이 받을 것입니다. 이것또한, 저는 다른 시각으로 봅니다. 일단, 흑치라는 성씨는 그가 백제의 뿌리깊은 귀족임을 나타냅니다. 사서에 백제왕이 흑치라는 성을 직접 내려주었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또한, 그는 백제의 이름난 제장이였다고 합니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흑치상지가 백제에서 인기있는 장수중 한명이였다고 가정 할 수 있죠. 백제 멸망 후 흑치상지는, 수하들과 도주후, 백제부흥 운동의 핵심인물이 되어, 백제의 200백성을 회복하고, 당군과 맞서 싸웁니다. 허나, 그는 결국, 항복하여, 당나라로 귀속한뒤 백제 부흥군을 부수는 선봉에 섰고, 마지막에는 중국땅에서 관리로 지내다 모함으로 옥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흑치상지는 왜, 백제부흥군의 절정기때 중국으로 투항하게 된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의자왕의 생존과, 후 백제의 정부구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의자왕은 전후 당나라로 끌려가게됩니다. 그리고 당나라는 백제땅을 신라에 넘겨주지 않게다고 하고 백제땅에 위성국가를 세우고 의자왕의 아들을 보내게 됩니다.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게 된것이죠. 또한, 백제땅에대한 당나라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허나, 문제는 백제부흥군이였습니다. 흑치상지의 백제부흥군은 지속적인 게릴라전으로 당군에게는 큰 골치 거리가 된것이죠. 그래서 생각해낸것이, 충신이자 명장인 흑치 상지를 당의 위성국의 장군으로 회유하는것이였죠. 의자왕이 생존해있다는것을 미끼로서. 그리하여, 고심끝에 흑치상지는 당에 투항하게 된것입니다. 의자왕의 아들을 정통으로 백제땅에서 백제의 부흥을 위해서. 물론, 가정이기는 합니다만,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의자왕의 당나라에서의 생존. 그것이 이런 줄거리가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죠.
개인적인 견해이며, 제 관점은 이도학씨의 역사관점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역사학에 관한 지식이 짧아 부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음을 양해드립니다. 다른 분들의 태클 및 지적 환영합니다.
첫댓글고구려와 백제가 정통성 경쟁을 하고,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인 일이 있다 하여 두 나라가 형제국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온조와 유리가 (배다른 형제를 포함하여) 형제관계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과 양국이 경쟁하고 전쟁했다는 이야기는 완전 별개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는 건 건국 이후에도 수백년이 지난 후죠. 그렇다면 설사 양국 초기 임금들이 친형제였더 하더라도 이 정도 시간이면 '완전 남남' 이 될 정도로 멀어지기 충분한 시간입니다. 권력이란 본디 형제, 부자간에도 살육을 부를 정도로 냉혹한 것인데, 수백년 지난 친척간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고구려와 백제가 형제국이라는 이야기는 양국이 '매우 친밀한 동맹관계' 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양국 왕가의 초기 인물이 '형제였다' 는 이야기일 뿐이라 봅니다. 그러나 양국이 전쟁을 하든 말든 양국이 형제국인지 여부와는 관계가 없죠. 양국아 형제국이 아님을 밝히려면, 온조와 추모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형제간의 치열한 전쟁은 인류사에서 아주 흔한데, 형제간의 '우정' 이 집단간 혹은 국가간 전쟁을 억제하는 힘이 있다고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렇다면 프랑크 왕국이 왜 내전으로 인해 분열되고, 이후 형제임이 분명한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임금들이 왜 전쟁 직전까지 갔을까요)
미주가효님/ 제가 백제와 고구려가 형제국이 아닌 경쟁관계라고 한건, 일단 첫째로, 백제가 고구려계통의 국가가 아닌 부여계통의 국가라는 전제하에서 입니다. 만약 백제가 고구려 왕위계승에서 실패한 왕자에 의해 건국되었다면, 백제의 시조는 고구려의 건국왕이 되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제는 고구려의 건국왕이 아닌 부여의 건국왕을 자신들의 시조로 삼았습니다.(백제와 고구려에 모두 "동명왕제"가 있었다는것에서 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가 협력할 수 없는 사이로 이미 건국이 된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백제 왕실을 "고구려 계통의 왕실로" 본다면, 님의 말씀대로 백제와 고구려가 "형제국-이것또한 미주가효님 말씀대로 왕실의 계통이 같다는 의미로"으로 칭할 수 있지만, 저는 좀 다른 입장으로보았습니다. 하지만, 미주가효님의 지적 감사합니다^^ 확실히, 백제 왕실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가 문제이군요
백제의 의자왕은 색을 밝히는 못난 폭군이였다? 라고 의문을 제시한 뒤에 이것은 분명하고 명백한 잘못입니다.라고 결론을 내리셨는데..오히려 케타로군님의 그에 따른 주장이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삼국사기 42권 열전 제2 김유신(중) 영휘 6년 을묘년 기사를 읽고 난뒤 그뒤의 사건을 종합 고찰 했다면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없지요 승자인 신라의 왜곡된 기록이라치더라도 전후사정을 살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부정한다면 그만한 삼국사기 기사를 반박할 근거를 가지고 반론하여야 타당 할 것입니다. 또한 삼천궁녀에 관한 것은 이곳 게시판 2696번 "낙화암과 삼천궁녀에 대한 소고" 를 참조하시면 약간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솔직히 3번, 4번은 본카페 게시판을 검색만하여도 많은 자료가 나오는데 이를 먼저 열람 검토해 보시고 주장하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보입니다..그리고 5번 흑치상지 장군에 관한 건은 워낙 개인 취향적인 주장이라 님과 매우 다른 견해이지만 역시 정답이 없어 생략합니다...^^
소호금천씨/감사합니다^^ 제가 본래 백제사와 관한 책을 읽고, 백제에 관한 저의 관점을 정립하였는데, 현재 제가 한국에 있지 않은 관계로, 관련서적을 갖고있지 못해 보다 정확한 사료나, 첨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님의 말씀대로 이곳 개시판의 글들중 제 관심사를 좀더 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부정확한 글이 된것 같아 그부분도 고쳐야 하겠군요^^ 지적 감사합니다.
첫댓글 고구려와 백제가 정통성 경쟁을 하고,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인 일이 있다 하여 두 나라가 형제국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온조와 유리가 (배다른 형제를 포함하여) 형제관계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과 양국이 경쟁하고 전쟁했다는 이야기는 완전 별개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는 건 건국 이후에도 수백년이 지난 후죠. 그렇다면 설사 양국 초기 임금들이 친형제였더 하더라도 이 정도 시간이면 '완전 남남' 이 될 정도로 멀어지기 충분한 시간입니다. 권력이란 본디 형제, 부자간에도 살육을 부를 정도로 냉혹한 것인데, 수백년 지난 친척간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고구려와 백제가 형제국이라는 이야기는 양국이 '매우 친밀한 동맹관계' 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양국 왕가의 초기 인물이 '형제였다' 는 이야기일 뿐이라 봅니다. 그러나 양국이 전쟁을 하든 말든 양국이 형제국인지 여부와는 관계가 없죠. 양국아 형제국이 아님을 밝히려면, 온조와 추모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형제간의 치열한 전쟁은 인류사에서 아주 흔한데, 형제간의 '우정' 이 집단간 혹은 국가간 전쟁을 억제하는 힘이 있다고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렇다면 프랑크 왕국이 왜 내전으로 인해 분열되고, 이후 형제임이 분명한 동프랑크와 서프랑크 임금들이 왜 전쟁 직전까지 갔을까요)
미주가효님/ 제가 백제와 고구려가 형제국이 아닌 경쟁관계라고 한건, 일단 첫째로, 백제가 고구려계통의 국가가 아닌 부여계통의 국가라는 전제하에서 입니다. 만약 백제가 고구려 왕위계승에서 실패한 왕자에 의해 건국되었다면, 백제의 시조는 고구려의 건국왕이 되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제는 고구려의 건국왕이 아닌 부여의 건국왕을 자신들의 시조로 삼았습니다.(백제와 고구려에 모두 "동명왕제"가 있었다는것에서 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가 협력할 수 없는 사이로 이미 건국이 된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백제 왕실을 "고구려 계통의 왕실로" 본다면, 님의 말씀대로 백제와 고구려가 "형제국-이것또한 미주가효님 말씀대로 왕실의 계통이 같다는 의미로"으로 칭할 수 있지만, 저는 좀 다른 입장으로보았습니다. 하지만, 미주가효님의 지적 감사합니다^^ 확실히, 백제 왕실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가 문제이군요
마지막으로, 제자말한 형제국이란건, 미주가효님 말씀대로 "왕실 계통의 동일성"입니다. 또한, 왜 제가 두 국가가 경쟁국인지는 그 계통의 정통성에서 벌어난 일이라고 적었습니다.^^
백제의 의자왕은 색을 밝히는 못난 폭군이였다? 라고 의문을 제시한 뒤에 이것은 분명하고 명백한 잘못입니다.라고 결론을 내리셨는데..오히려 케타로군님의 그에 따른 주장이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삼국사기 42권 열전 제2 김유신(중) 영휘 6년 을묘년 기사를 읽고 난뒤 그뒤의 사건을 종합 고찰 했다면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없지요 승자인 신라의 왜곡된 기록이라치더라도 전후사정을 살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부정한다면 그만한 삼국사기 기사를 반박할 근거를 가지고 반론하여야 타당 할 것입니다. 또한 삼천궁녀에 관한 것은 이곳 게시판 2696번 "낙화암과 삼천궁녀에 대한 소고" 를 참조하시면 약간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솔직히 3번, 4번은 본카페 게시판을 검색만하여도 많은 자료가 나오는데 이를 먼저 열람 검토해 보시고 주장하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보입니다..그리고 5번 흑치상지 장군에 관한 건은 워낙 개인 취향적인 주장이라 님과 매우 다른 견해이지만 역시 정답이 없어 생략합니다...^^
소호금천씨/감사합니다^^ 제가 본래 백제사와 관한 책을 읽고, 백제에 관한 저의 관점을 정립하였는데, 현재 제가 한국에 있지 않은 관계로, 관련서적을 갖고있지 못해 보다 정확한 사료나, 첨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님의 말씀대로 이곳 개시판의 글들중 제 관심사를 좀더 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부정확한 글이 된것 같아 그부분도 고쳐야 하겠군요^^ 지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