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로 살다가 속인으로 임종한 경허스님
경허鏡虛(1849 ~ 1912)스님은 속명은 동욱(東旭)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송씨 다. 부친은 송두옥(宋斗玉)이고, 모친은 밀양 박 씨다. 9세 때 과천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해 계허(桂虛)스님한테서 계를 받았다. 마을선비로부터 한학(漢學)공부했다. 그 뒤 계룡산 동학사 만화 화상 밑에서 경을 배웠다. 『논어』, 『맹자』, 『시경』, 『서경』 등의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 모두 섭렵해 23세에 동학사 강사가 되었다.
하루는 출가 본사인 청계사에 가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났다. 비를 피하려는데 마을에 역병이 돌아 문을 열어 주지 않아 마을 밖, 큰 나무 밑으로 갔다. 밤새도록 비바람과 추위에 시달림에서 '생사불이'(生死不二)를 깨달았다. 스스로 생사에 무력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학인들을 해산시켰다. 문 꼭꼭 걸어 잠그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참선에 들어갔다. 시봉하던 사미 승과 그의 스승의 대화에서 “중이 시주를 먹고 방일하면 죽어 소가 되어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된다.”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콧구멍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삼천세계가 내 집임을 알았다. 6월 달 연암산 내리는 길에 야인은 일 없이 태평가를 부른다.』 그 후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선의 일상화를 추구하였다. 한센병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는가 하면,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기도 하는 등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천장암에서 어머님 생신특별법회를 했다. 많은 불자들이 모였다. 법상에 앉아 있던 경허스님이 벌떡 일어나 바지를 벗고 알몸을 들어내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같이 보살들은 밖으로 도망갔다. 경허스님 어머니는 “경허가 미쳤구나! 이런 망측한 짓을 앞에서 하다니! ” 옷을 입은 스님은 “어머님은 내가 어릴 때 발가벗겨 씻기던 그 마음은 어디가고 망측하다. 미쳤다 하시다니 그렇게 마음이 변하셨나요."
(참으로 좋으신 스님입니다.저는 눈물이 납니다)
경허스님 충남 서산 개심사(開心寺)에 주석할 때 일이다. 경허 스님은 서산 태안반도 어촌에 만행을 갔다. 생선 도매상집에 들어가 주인에게 “오갈 곳 없어 떠도는 불쌍한 중입니다. 일은 시키는대로 잘할테니 밥이나 얻어먹을 수 없을까요.” 주인이 보니 장대한 체격에 힘깨나 쓸 것 같아 승낙했다. 경허스님 일꾼들보다 먼저 새벽에 일어나 온갖 궂은일을 다했다. 무슨 일이든 주인이 시키면 군말 없이 잘했다.
하루는 주인마님이 “밭 솥에 불을 넣어라.” 밥솥에 쌀을 안치는 주인마님 엉덩이 뒤에서 불을 지폈다. 스님은 갑자기 손바닥으로 주인마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참 잘도 생겼다” 이에 놀란 주인마님은 부엌을 뛰어나갔다. 부엌에서 일어난 사실을 보고 받은 남편은 “오갈 데 없는 중놈이라 불쌍히 여겼더니 아주 나쁜 놈이다”하고 동네 무뢰배들에게 술을 사주면서 “저놈을 죽도록 패라. 죽어도 내가 책임지겠다.” 십여 명의 장정들에 몽둥이찜질로 스님은 5일간이나 죽었다 깨어나 도망 나온 일도 있다.
스승인 경허스님과 제자인 만공스님이 탁발을 나갔다. 평소보다 많은 시주를 얻었다. 시주쌀을 담은 바랑은 무거웠다. 경허스님에 비해 만공스님은 힘에 부쳤는지, 조금만 가다가는 “아이고 죽겠네 스님 쉬어갑시다.” 경허스님은 만공스님 애걸을 받아 몇 번이나 쉬었다. 그래도 만공스님은 어구적 걸음으로 ‘아이고 죽겠네’ 투덜거리면서 따라왔다. 우물에서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가는 젊은 아낙네를 만났다.
경허스님은 갑자기 그 아낙에 두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놀란 아낙네가 물동이를 땅에 떨어뜨리며 큰소리로 “저놈 잡아라.” 이 소리를 들은 마을사람도 “저놈 잡아라.”며 몽둥이를 들고 경허스님 일행을 쫓기 시작했다. 두 스님은 있는 힘을 다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얼마를 달렸는지 따라오던 마을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산모퉁이 바위 뒤에서 두 스님은 숨어서 만났다.
부아가 치민 제자 만공스님 “아무리 은사님이라도 해도 그렇지요. 물동이 인 아낙네 젖가슴을 주물린 스님이 어디 있습니까?” 경허스님은 껄껄 웃으며 “야 이놈아! 맞아 죽을까봐 도망칠 때도 바랑이 무겁더냐?” 만공스님 “붙들려 맞아 죽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무거운지 가벼운지 몰랐습니다.” 경허스님 “그것봐라. 무겁고 가볍고, 괴롭고 즐겁고 다 마음에 장난이란다.”
경허스님 첫 스승인 계허(桂虛)스님은 하루라도 곡차 없이는 못 살았다. 이 버릇을 물러받은 경허스님도 어디서든지 곡차와 함께 했다. 그러다보니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취중으로 선의 일상화했다. 한센병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는가 하면,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기도 하는 등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 독특했다. 이에 주변스님들과 대중에 미움을 살대로 샀다. 경허스님은 “내가 얼굴을 벗기지 않은 한 그 누구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다."
1886년 경허스님은 스복과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석왕사 떠나 함경도 갑산으로 갔다. 임시정부 초대 교육부 차장, 의정원 평안도 대표 등을 역임한 김탁 집에서 박난주란 이름으로 살았다. 갑산마을 일대 문맹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서민대중을 교화하는 등 자유자재한 방편 행을 펼쳤다. 박난주는 때로 선비의 차림으로 때로 서민의 옷차림으로 묻혀 지냈다. 홀로 있을 때에는 가사 장삼을 입기도 했다고 한다.
시인 고은 시로 본 경허스님은
삼수갑산
그 갑산 응이면 도하리
난덕산 밑
감자밭 조밭
날이 날마다 영하 30도 추위
거기로 갔도다
승복 벗고 머리 길렀도다
수염 길렀도다
경허 버리고
박난주가 되었도다
거기 두 아이 과부를 마누라로 삼았도다
(중간 생략)
옥수수술 좁쌀술이면
어느새
철딱서니 하나 없이
흥얼흥얼
또다시 대낮 마누라 불러 뉘었도다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방구석 어둠 좋아라
마누라 감창
썩 좋아라
자진모리
썩 좋아라
어디에도 경허 자취 온데간데없도다 - 시 '경허 마누라' 일부
경허스님 삶은 세간과 출세간에 머문 것이 아니다.
출출 세간에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1912년 함경도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마음 달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