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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복음 7,14-23
어제와 오늘 복음은 한단락으로 묶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2)으로 논쟁을 걸면서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고발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8)하시며 종교생활의 본질을 건드리십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 '무엇이 더럽고 무엇이 깨끗한가?' 물으십니다.
외모, 체면, 드러나는 것을 중시하고 자주 겉에만 머무는 우리들에게 속, 본질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14)
군중에게 '깨달음'이라는 과제를 건네십니다
멈춤, 침묵 없이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 말씀의 빛을 받지 않고서는 본질, 알맹이를 볼 수 없습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15)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ᆢ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ᆢ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20-23)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에 더 조심하면서(유효기간이 지났는지, 유기농인지, ᆢ? '한살림'이나 '자연드림'에서 구입한 것을 선호하고ᆢ)
반면에
입으로 나오는 것들이 나와 너를 더럽힌다는 사실은 잊고 살지는 않은지 ᆢ?
내속에 무엇이 들어 있어 입밖으로 나오려고 하는지 물으십니다.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21-22)
날마다 30분, 하루의 48분의 1
아니 96분의 1, 15분이라도 멈추어 마음 가꾸기를 해보지 않으시렵니까?
(천 사비나 수녀님)
2월12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마르코 7,14-23
사람과 나라를 건강하게 지키는 힘: 자비로운 독재자의 유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약진하는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요? 많은 곳에서 이 나라가 지금 망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미래의 먹거리인 A.I., 로봇, 전기 자동차, 드론 등에서 가장 약진하는 나라는 뭐니 뭐니 해도 중국입니다.
중국의 약진은 무서운 수준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반도체나 핸드폰, 자동차, 가전제품, 선박 등으로 중국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이 거의 추격했고 한국이 아직 선두를 잡지 못한 중요한 부분에서는 이미 중국이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현재 누가 봐도 주춤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어디 있을까요? 역사를 보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대부분 정치 때문입니다.
외세의 침략이나 자연재해 등을 말하지만, 정치가 안정되어 있다면 그런 어려움들은 다 극복될 수 있습니다.
중국은 현재 반 독재국가라 할 정도로 심지어 종교의 자유까지도 제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국은 선교가 금지되어 있고 아직도 감옥에 갇혀있는 지하교회 주교와 신부들이 많습니다.
또한 미국이 워낙 견제를 많이 해서 무엇이든 발전해서는 안 되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지휘체계는 하나입니다.
인도도 비슷한 인구를 지니고 있지만, 중국만큼
약진하지는 못합니다.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조선시대 때 여기에 맞고 저기에 맞게 된 이유는 바로 당파싸움 때문입니다.
특별히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세력 때문에 많은 인재들이 죽거나 숙청당하였습니다.
여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한 번 뒤처지면 추월하는 것은 배로 어렵습니다. 그렇게 신식 무기로 장착한 일본과 청나라 등을
상대하기는 언제나 역부족이 되어 결국엔 나라까지 반토막이 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항상 이렇게 된 것의 핑계를 외부에 둡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을 더럽히는 모든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내부에 적이 있으면 그 사람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부가 분열된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나라든 무너뜨리기 너무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함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자비로운 독재자’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전했던 왕이라고 하면 세종대왕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자비로웠습니다.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도록 한글까지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독재자였습니다.
세금을 많이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웠기에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 덕분으로 독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나라가 깨끗하고 건강하고 발전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자비로운 독재자가 필요합니다.
지금 뒤로 밀렸다가는 예전의 약했던 나라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독재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현재 서울 연세에이스내과의 이장욱 원장은 제가 첫 보좌를 할 때 성당에서 특별히 아주 열심한 청년이었습니다.
당시 인터넷이 막 대중화될 때부터 ‘평화의 오아시스’란 홈페이지를 만들어 복음화에도 힘썼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열심한 신앙인은 아니었습니다.
의대에 다니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매일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자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의사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좌절하고 있을 때 성령 기도에 심취해 있던 어떤 교수님의 인도로 짧은 성령 피정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강의도 재미없고 방언도 되지 않았습니다.
실망과 실망의 연속 끝에 마지막 미사를 할 때였습니다.
이때 안수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손이 뜨거워지고 등에서도 이상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이게 뭐지?’ 싶을 때 환시로 누군가의 손바닥이 자신의 얼굴 앞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손엔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뚫려있었다기보다는 손바닥에서 손목까지 찢어져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는 가시관을 쓴 그 손 주인공의 얼굴도 어렴풋이나마 보였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했고, 마치 두부를 칼로 자르듯 이런 생각이 가슴을 채웠습니다.
‘아, 저렇게 고통받고 한 사람이 바로 나구나!’
그때는 물론이요, 그 이후도 성당에 갈 때마다 눈물바다였습니다.
그냥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인물들의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변한 것으로도 저는 그 체험이 주님께서 주신 체험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제 그 손바닥의 주인공은 안젤로에게 독재자가 됩니다.
한 번은 성지순례 중에 젊은이들 기도 모임을
만들어 묵주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사명을 받습니다.
그렇게 어디를 가나 기도 모임을 만듭니다. 지금도 병원에서 오후 3시에 묵주기도 모임을 매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 마음이 갈라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재자가 자비롭게 그 사람 안에서 나쁜 것이 자신을 오염시키지 않게 막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바로 ‘뜻’인데 내 안에 있었던 무자비한 독재자를 자비로운 독재자가 발로 밟은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당시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서 ‘독재자’로 판단 받았음을 알고 있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세종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백성이 반대하더라도 밀고 나갔습니다.
그 힘은 백성 대부분은 그래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힘입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할 때 이러한 자비로운 독재자가 빨리 나타나서 많이 갈라져 있는 우리나라를
하나의 뜻 안에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지만, 또한 비전이 명확하여 나라 전체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자신 안에 있고 오직 자신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과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2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7,14-23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한 영성가께서 지극히 간단하지만 심오한 한 마디를 건네주셨는데, 한 문장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제 마음에 꽂혀 오래도록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웃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이웃, 특히 가까운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때로 얼마나 꼬였는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편향적인 시선인지 깊이 반성합니다.
동시에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혹독하거나 엄격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중심을 잡지 못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힘든 부분이 나 자신과 이웃을 바라보는 균형잡힌 시선인 것 같습니다.
때로 나 자신이란 존재 제가 봐도 신기하고 흥미롭습니다.
제 속에 뭐가 그리 내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내가 있는가 하면, 때로 송곳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속 좁은 내가 있습니다.
때로 시속 500킬로의 테제베같이 성급한 성격의 내가 있는가 하면, 때로 나무늘보보다 더 느긋한 내가 있습니다.
비단결보다 더 고운 너그러운 천사 같은 내가 있는가 하면, 눈빛이며 얼굴이 무섭고 기괴한 사탄 같은 내가 있습니다.
오늘 비록 내가 천사로 산다 할지라도, 내일 사탄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우리네 삶입니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나입니다.
오늘도 제 안에 들어있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 곰곰이 헤아려 볼 일입니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이왕이면 선한 것들, 가치있는 것들,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들로
가득 채워나가야겠습니다.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놓으면 부패할 것들, 역한 냄새 풀풀 풍겨, 나 자신을 더럽히는 것들, 주변 사람들 괴롭힐 것들은 자꾸 비워내야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도 언급하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정녕 인간을 오염시키고 부패시키고 타락시켜 추하게 만드는 것은 외적,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옷 좀 떨어졌다고 그 사람이 더러운 사람이겠습니까?
몸에 흙탕물이 좀 튀었다고 그 사람이 지저분한 사람이겠습니까?
샤워 한 며칠 안 한 사람을 두고 타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인간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키는 것은 인간의 내면,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것, 다시 말해서 죄입니다.
그 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오늘 예수님께서 잘 나열하신 것입니다.
당시 오류와 편협된 사고에 빠진 바리사이들은 깨끗함과 더러움의 기준을 사물의 외적인 상태에 두었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떠하든, 그 사람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든, 그 사람이 맺고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든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의 몸 상태가 청결한가 아닌가가 관건이었습니다.
율법의 세칙에 따라 그가 손을 씻어야 할 때 손을 씻었는지, 발을 씻어야 할 때 발을 씻었는지,
그것만 뚫어지게 쳐다 봤습니다.
정녕 깨끗한 사람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5주간 수요일 강론>
(2025. 2. 12. 수)(마르 7,14-23)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4-23).”
1) 같은 칼이라도 병자를 살리기 위해 수술하는 칼로 사용하면 ‘생명의 도구’가 되고,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하면 ‘죽음의 도구’가 됩니다.
그 칼을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칼은 ‘선’도 되고 ‘악’도 됩니다.
결국 칼이 문제가 아니라 칼을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원자력도 병원에서 병자를 치료하는 일에 사용하면 ‘생명의 도구’가 되지만, 폭탄으로 만들면 ‘죽음의 도구’가 됩니다.
원자력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기 때문에, 칼이나 원자력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악하게 사용하는 인간 자신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2) ‘음식’의 경우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먹어서 죄를 짓게 되었을 때, 그 음식이 죄를 짓게 한 것이 아닙니다.
죄는 그것을 먹은 사람 자신이 지은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 입장에서는 “선악과가 없었다면 죄를 안 지었을 것이다.”, 또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죄라는 것이 안 생겼을 것이다.”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따 먹지도 못할 열매를 왜 만들어 놓으셨는가?” 라고 하느님께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실제로 아담이 그런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1-12)”
아담의 대답은 ‘여자 때문에’인데, 그 여자를 만들어 주신 ‘하느님 때문에’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은 여자 때문이고, 여자를 만들어 주신 하느님 탓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흔히 하는 변명입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냥 단순하게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는데,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변명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것이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태도로는 용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3) ‘죄’와 관련해서, 다음 말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9-30).”
이 말씀은, 죄를 짓게 만드는 온갖 유혹과 욕망과 충동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억눌러서, 죄를 피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눈과 손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이고, 나 자신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라 버려야 할 것은 눈과 손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도 사탄이 다가와 유혹하긴 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어떻게 잘라낼 수 있는가?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4)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을 해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로마 7,22-25).”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라는 고백은,
‘마음’이라는 것을 다스리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그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 도움을 받는 방법은 바로 ‘기도’입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욕망과 충동을 누르는 방법은,
즉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오직 ‘기도’뿐입니다(마르 9,29).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