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롱메롱 은주 (외 2편)
김점용
깊은 산 등산로 한가운데 서서 사람들 손잡아주느라 닳고 닳은 나무줄기의 반질반질한 맨살에 새겨진 글자 은주
나는 그것이 남몰래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름인지 이파리를 죄다 몸속으로 숨긴 그 나무의 이름인지 파란만장 푸른 잎물결 속에 숨은 빈 배의 이름인지 알 수가 없어 한참 동안 나무 주위를 맴돌다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그 나무는 어떤 사람과 눈이 맞아 죽어서 올라가든가 내려가든가 하는 중인 것 같은데 거기에 소 한 마리 매어서 딸려 보낸 주인이 누군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한밤에 부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릴 들으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깔고 앉을 때나 강원도 깊은 산골에 두꺼운 방석을 펴면 이따금 귓전에 울리는 소 방울 소리가 메롱메롱 은주, 하고 날 놀리는 것 같아 평생을 그렇게 놀림받으며 살 것만 같아
그는 숨는다
그는 숨는다
장롱 안에도 숨고 마루 밑에도 숨는다
담벼락 속에도 숨고 나무 뒤에도 숨는다
이름에도 숨고 바코드에도 숨는다
한번은 오래된 은수저에서 그가 숨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는 숨는 데 귀신이다 심지어
구멍 난 양말의 오랜 추억 속에도 그는 제 몸을 숨길 줄 안다
동짓달 초이레의 반달 뒤에도 숨고
늙은 여자의 하품 속에도 숨는다
제삿날 병풍 뒤에도 숨고 사진 속에도 숨는다
일부러 보자고 한 적 없지만 그는 날마다 숨는다
햇볕 속에도 숨고 그림자 속에도 숨는다
그의 흔적은 도처에 널려 있으나
그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술래가 되어 그를 찾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
入脫
백여덟 번 절하고
부처 훔쳐 내려오는 산길
집으로 가는 길을 지웠네
내 몸을 지웠네
겨울나무들의 마른 이파리를 지웠네
가지와 줄기의 살점도 지웠네
나무들 속살 속 물관만 남겼네
뿌리에서 잎과 꽃 퍼올리던 물관들
금세 하얗게 얼어붙어 반짝였네
능선에 쏟아지는 황금 햇살에 쓸리며
싸르랑 싸르랑 반짝였네
은사시보다 눈부시게
어느 겨울,
그만 쓰러져 죽어버리고 싶었던
소백산 설화보다 더 눈부시게
꼿꼿한 결벽만이 뜨겁게 타올랐네
햇살에 떠밀리는 황홀한 나무들 사이
금빛 나비 한 마리
천천히 날아올랐네
—시집『메롱메롱 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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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용 / 1965년 경남 통영 출생. 서울시립대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 졸업. 1997년 《문학과사회》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 『오늘 밤 잠들 곳이 마땅찮다』『메롱메롱 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