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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말씀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복음, 19:30)
예수는 사람들을 구원하러 이 땅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이미 구원되어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해 내려왔을 뿐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본래 죽음이 없다는 사실, 우리가 본래 영원한 생명이란 사실을 직접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출처 : “선으로 읽는 복음”, 몽지님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한 개인으로 살고 있지만, 한 인간 존재로 형태를 취하기 전에 여러분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태어나기 전에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태어나기 전에 여러분이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세상에 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라진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죽으면 사라져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사라진다고 해도,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비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법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그 어떤 마법 주문도 걸 수 없습니다. 세상이 마법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라보면 그것은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켜보기 때문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도 보지 않는데 어떻게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무엇을 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무언가 특별한 것을 성취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순수한 자질 속에 이미 모든 것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궁극적인 사실을 이해한다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있을지 몰라도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려움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이 진짜 어려움일 것입니다.
매우 자신 있게 올바른 방향을 향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속에 이미 모든 것이 간직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노력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에게서는 무엇인가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노력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어떤 것도 잃을 염려가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여러분의 노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더라도, 여러분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미혹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고, 바른 수행의 순수한 자질만이 늘 있을 뿐입니다.
출처 : “선심초심”, 스즈키 순류
인간은 마음속에서 자신을 ‘나I’와 ‘대상으로서의 나me’, 또는 ‘대상으로서의 나me’와 ‘나 자신myself’의 두 부분으로 분리하며, 그 분리로부터 에고가 생겨난다. 따라서 인격의 분열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면 모든 에고는 정신분열증적이다.
당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마음속 이미지, 즉 개념적 자아와 함께 살아가며, 그것과 관계를 맺는다. 당신이 ‘나의 삶(생명)my life’이라고 말할 때, 삶 자체가 개념화되고 당신 자신으로부터 분리된다. ‘나의 삶(생명)’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순간, 그리고 단순한 언어 습관으로서가 아니라 그 말을 자신도 믿는 순간 당신은 망상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만약 ‘나의 삶(생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나’와 ‘삶(생명)’이 두 개의 분리된 것이 되며, 따라서 ‘나’는 ‘삶(생명)’을, 내가 상상속에서 소중하게 소유하고 있는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 이때 죽음은 겉보기에 하나의 실체가 되고 위협이 된다. 말과 개념이 ‘삶(생명)’을 아무 실체도 없는 분리된 조각들로 분해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나의 삶(생명)’이라는 개념이 분리라는 근본적인 망상, 에고의 원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만약 ‘나’와 ‘삶(생명)’이 둘이라면, ‘내’가 ‘삶(생명)’과 별도로 존재한다면, 나는 모든 사물, 모든 존재, 모든 사람들과도 별개이다. 그러나 ’내‘가 ’삶(생명)‘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가? ’삶(생명)‘과 분리되어서, ’존재‘와 분리되어서, 어떤 ’나‘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나의 삶(생명)’ 같은 것은 없으며, 내가 ‘삶(생명)’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삶(생명)’ 그 자체이다. 나와 ‘삶(생명)’은 하나이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나의 삶(생명)’을 잃을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잃을 수 있는가? 어떻게 본래의 ‘나’인 것을 잃을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출처 :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당신이 죽음을 믿기 때문에 육체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음을 믿기 때문에 육체가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육체와 죽음은 동일한 환상의 일부이며, 삶의 근원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 분리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고 믿는 에고에 의해 창조됩니다. 당신이 하나의 육신에 불과하며 끊임없이 위협 받고 있는 조밀한 물질이라는 환상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출처 :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분해되고 있는 나무와 썩고 있는 낙엽들이 새 생명의 탄생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생명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합니다. 미생물이 작업 중이니까요. 분자들이 자신을 재정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 형태의 변형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죽음은 생명의 반대가 아닙니다. 생명에는 반대가 없으며, 죽음의 반대는 탄생입니다. 생명은 영원합니다.
출처 : “고요함의 지혜”, 에크하르트 톨레
노나라에 발 하나가 잘린 왕태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를 좇아 노니는 자들의 수가 중니의 제자들만큼이나 되었다. 상계가 중니에게 물었다. 왕태는 발이 잘린 사람인데도 그를 좇아 노니는 자들이 선생님을 따르는 자들과 더불어 노나라를 반분하고 있습니다. 그는 서서 가르치지도 않고 앉아서 의논하지도 않는데, 텅 비어서 찾아갔다가 가득 차서 돌아옵니다.
진실로 불언지교라는 것이 있어서 드러내지 않고 이루어주는 것입니까? 이 사람은 어떤 자입니까? 중니는 “그분은 성인이시다”말하며, 나는 다만 꾸물대다가 아직 그에게 가지 못한 것이다. 나는 장차 그를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데 하물며 나만 못한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어찌 노나라 뿐이겠느냐. 나는 장차 온 천하의 사람을 이끌고 그를 따르려 한다. 상계는 묻는다. 그 분은 불구인데도 선생님보다 훌륭하다고 하시니, 보통 사람과의 차이는 퍽 크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 씀은 특별히 어떤 것입니까? 중니가 말한다. 죽고 사는 것은 큰 문제이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다. 비록 천지가 뒤집어져도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틈이 없음을 알고 있어서 사물과 함께 변하는 일이 없으며, 사물의 변화를 명으로 알고 따르면서 그 종을 지킨다.
상계는 묻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중니는 말한다. 다르다는 점에서 보면 간과 쓸개는 초나라와 월나라만큼 멀다. 같다는 점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무릇 이와 같이 깨달은 자는 눈과 귀가 좋아하는 것 따위는 알지 못하고, 마음을 덕의 조화 속에서 노닐게 한다. 모든 사물을 하나의 바탕에서 보기 때문에 사물이 없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발 하나 잃는 일 따위는 마치 흙을 떨어버리는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상계는 말한다. 왕태는 자신을 위해 그의 지로 마음을 얻었고, 그 마음의 역량으로 상심을 얻었습니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그에게 모이는 것입니까? 중니가 말했다. 사람들은 흐르는 물에 비추지 못하고, 고요한 물에만 비출 수 있다. 오직 고요한 것만이 능히 다른 것들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 땅에서 목숨을 받은 것 가운데 소나무와 잣나무가 가장 올바르므로 겨울이나 여름에도 푸르고, 하늘에서 목숨을 받은 것 가운데 오직 순임금만이 가장 올바르므로 다행히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하면서 뭇사람을 바르게 이끌었다. 도를 보존하고 있는 사람의 징표는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용감한 병사는 혼자서도 대군이 지키는 적진에 쳐들어가 싸운다.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여 반드시 일을 이루는 자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하늘과 땅을 뜻대로 다루고, 만물을 품에 품고, 육신을 잠시 머무는 숙소로 삼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허망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아는 바를 하나로 삼고, 마음으로 이미 죽음을 넘어선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그는 날을 택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따르는 것이다. 그가 어찌 사람들을 모으는 일 따위에 괘념하겠는가.
나고 죽는 것은 명이다. 낮과 밤이 일정함은 자연이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바가 있으니, 모두 물의 실정이다. 사람들은 하늘조차도 아비로 여기고 몸소 그를 사랑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우뚝한 것은 어찌하겠는가. 사람들은 군주조차도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 그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참된 것은 어찌하겠는가. 샘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서로 땅위로 드러나 서로 습기를 불어 주고 서로 물방울로 적셔주지만, 강호에서 서로를 잊고 사는 것만 못하다. 요임금을 기리고 걸을 비난하는 것은 양망하여 그 도와 하나가 되는 것만 못하다.
무릇 대괴는 내게 모습을 주고, 내게 삶을 주어 수고하게 하고, 내게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내게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그러므로 나의 삶을 훌륭하게 하는 것은 곧 나의 죽음을 훌륭하게 하는 것이다.
출처 : “장자, 위대한 우화”, 정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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