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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울린 이산가족 방송 40주년…“형 하늘 갔지만 함께 보낸 시간 감사”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40주년]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당시 방송 출연자들 만나보니
이민준 기자
고유찬 기자
박지민 기자
입력 2023.06.30.
1983년 6월 30일 첫 방송을 시작한 KBS '이산가족을 찻습니다'가 40주년을 맞았다. 방송을 통해 극적으로 만난 가족이 얼싸안고 오열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간 생방송으로 진행된 KBS 프로그램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방영된 지 40주년이 됐다. 6·25전쟁 등을 겪으며 흩어진 1만여 가족이 방송을 통해 재회했고, 국민은 이들과 함께 매일 눈물을 흘렸다.
본지는 당시 제작진을 통해 연락이 닿은 출연자 네 가족을 만났다. 대부분 80대에 접어든 출연 가족 다수는 “힘든 가족사를 다시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다”며 인터뷰를 고사했다. 본지와 만난 이들은 “방송을 통해 가족을 만나 힘겨운 삶 속에서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1983년 6월 30일 첫 방송을 시작한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여의도 KBS 사옥 벽에 가족을 찾는 벽보가
빼곡하다./국가기록원 제공
그래픽=이진영
인천 부평구에 사는 김광옥(76)씨는 6·25전쟁 때 헤어진 형 고(故) 임무웅씨를 방송을 통해 33년 만에 만났다. 김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온몸의 피가 탁 하고 멈추는 느낌이었다”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눈을 딱 마주치는 순간 ‘내 형이구나’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만난 김씨와 임씨는 함께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1947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김씨는 6·25전쟁이 터진 직후 부산으로 가는 피란길에 올랐다. 전쟁으로 사정이 어려웠던 탓에 김씨는 서울 영등포 한 가족에게 입양되며 원래 가족들과 헤어지게 됐고, 5살 때 고아원으로 보내지며 ‘김광옥’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됐다고 한다. 이후 형을 찾는 과정에서 양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성이 임씨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임씨는 김씨의 5살 위 형으로, 피란지인 부산에서 살고 있었다. 임씨는 본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김씨에게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형은 구두닦이부터 시작해서 안 해본 일이 없었다더라”며 “그런데도 괜히 동생 마음이 안 좋을까 싶어 얘기를 참은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인천에서 부산까지 400㎞ 떨어져 있었지만, 김씨와 임씨는 명절은 물론 사시사철 여행을 함께 다니며 살갑게 지냈다고 한다. 김씨는 앨범을 펼쳐 보이며 “남해, 정동진, 월미도 등 여행을 함께 갈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임씨는 지난 2011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너무나 큰 불행을 겪었지만,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형님과 만나 함께 보낸 시간이 있어 너무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김광옥(76·왼쪽)씨가 지난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통해 형인 고(故) 임무웅(오른쪽)씨와 재회하는 모습(위쪽 사진).
아래는 김씨(왼쪽)와 형 임씨(오른쪽)가 지난 2008년 인천 월미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래픽=김현국
이창주(88)씨는 지난 1983년 잃어버린 언니·오빠를 찾으러 방송에 출연했지만 찾지 못했다(위쪽 사진).
아래는 지난 2014년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한에 살던 둘째 언니의 아들 (오른쪽)과 상봉하는 모습. /그래픽=김현국
경남 창원시에 사는 황대근(83)씨는 43살이던 1983년 방송을 통해 사촌 누나와 사촌 여동생, 육촌 동생을 만났다. 황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의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라며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어떻게 살았느냐’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다’ 등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1940년 강원 원산시에서 태어난 황씨는 6·25전쟁이 터진 뒤 아버지가 메는 지게를 타고 속초로 피란을 갔다. 고아원에 맡겨진 황씨는 연탄 공장 등을 전전하다가 왼쪽 손가락 4개를 잃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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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씨의 마지막 소원은 이북에 있는 형과 누나 가족을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황씨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외에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에 모두 참여했지만 결국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중국 등을 통해 가족들의 상황을 수소문해왔는데, 두 사람이 함경북도 청진시의 한 동네에 살고 있다는 소식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황씨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남는 반찬을 보면 힘들게 살고 있을 가족들 생각에 울컥한다”고 했다.
1983년 가족을 찾는 벽보가 서울 여의도 KBS 현관앞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1983년 KBS의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은 4개월 이상 방영되며 1천만 이산가족과 전국민들을 울렸다./조선일보 DB
KBS 이산가족찾기 행사 당시 모습(1983년). /국가기록원 제공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공개홀에서 한 할머니가 전화통화를 하는 모습./국기기록원 제공
당시 방송에 출연했지만 뒤늦게 이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거나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창주(88)씨는 평안남도 강동군에 살다가 6·25전쟁 당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탓에 홀로 피란을 왔는데, 1983년 방송에 나갔음에도 가족들을 못 찾았다고 한다. 이씨는 “2014년 금강산에서 있었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둘째 언니의 두 아들을 만났다”며 “돌아가신 언니가 내 걱정을 대단히 많이 했다고 하는데, 살아서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고 했다. 정해수(87)씨는 전쟁으로 행방불명이 된 사촌 오빠와 사촌 동생을 찾기 위해 방송에 나갔지만, 40년이 지난 아직도 못 찾았다고 한다. 그는 “사촌 오빠가 살아 있다면 90살이 넘었을 텐데, 생사라도 알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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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8
이삭
2023.06.30 06:21:54
6.25전쟁이 낳은 우리 민족의 참혹한 역사였다. 그러나 이런 과거를 딛고 일어난 대한민국은 위대했다. KBS는 이런 소중한 책임을 짊어지는 국가공영방으로 태어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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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2
2023.06.30 06:43:50
이렇든 KBS가 어떡하다 주사파와 종북좌파들의 놀이터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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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을잡자
2023.06.30 07:03:28
중공놈들이 참전만 안했어도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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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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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사
2023.06.30 07:07:17
동족상잔 전쟁인 6.25로 인해 발생한 이산가족의 비극을 오직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서 외면하는 문재인과 이재명은 역사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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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자봉
2023.06.30 07:09:24
오늘의 KBS, MBC는 열번을 죽고 살아도 이산가족찾기 같은 프로그램 못만든다. 그들은 실력과 창의력이 부족하고 권력의 압력을 극복할 결의와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송인으로, 기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한낱 월급쟁이로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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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드랙
2023.06.30 07:05:26
저렇게 KBS가 KBS다워야지. 다됐고, 이젠 그냥 폐방! 굳이 살려두자면 재난방송국으로만 한정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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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y1
2023.06.30 07:32:04
당시 2회인가 3회인가 방송하려고 했던 이산가족생방송이 138일이나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TV보급율이 이미 80%를 넘어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때 KBS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현재 개배쓰는 죽었다. 소생시킬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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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루
2023.06.30 07:25:52
40주년 기념 이산가족찾기 재방송을 시작으로 KBS의 정상화를 기도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