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고조부는 이안사
이안사는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손자
고려 ‘무신란’ 주역 중 하나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손자인 이안사는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기 4년 전인 1255년 테무게 왕가로부터
천호장(千戶長) 겸 다루가치 직위를 하사받아 두만강 하류 일대를 지배했다.
이안사를 고조부로 하는 이성계 일가는
테무게 왕가의 가신(家臣)으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해
함경도 일대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이안사로부터 시작되는 이성계찬가가 바로 용비어천가다.
페스트의 대유행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1368년 대도(북경)를 점령한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는
1388년 3월 남옥에게 10만 대군을 줘 북원(北元)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남옥은 북원군을 내몽골 부이르호(捕魚兒海) 전투에서 대파하고,
북원을 외몽골로 축출했다.
이로써 북원(北元)과 고려 간 연계는 끊어졌으며
왕실을 포함한 고려 기득권 세력은 비빌 언덕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에 앞선 1388년 3월 명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평안도 북부 지역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했다.
명나라의 영토 할양 요구에 대해 고려는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으로 대표되는 대명(對明) 강경파와
이성계, 조민수, 정몽주 등으로 대표되는 온건파로 분열됐다.
이성계 일파는 1388년 음력 5월 우왕의 명에 따라
명나라를 치러 출격했다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회군해
대명(對明) 강경파를 숙청하고,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기초를 구축했다.
천호장 겸 다루가치 울루스부카(이자춘)를 승계한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투를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명장이었다.
이성계는 빛나는 군사 실적을 기반으로 고려의 최고 실력자로 우뚝 섰다.
이성계는 몽골식 평지전과 산악전에 모두 능숙했는데,
이 때문에 이성계 군단은 다른 고려 군단에 비해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최영, 최무선 등과 함께
일본 가마쿠라 막부 말기 남·북조(南北朝) 내전에 패배한
규슈의 사무라이 위주로 구성된 왜구의 침략을
진포와 운봉(남원) 등지에서 격퇴하고,
신흥 사대부의 대표격인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의
지지를 받아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어진
즉 조선은 원나라 지방군벌과
고려 성리학자의 합작품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승리와 조선 건국은
고려의 부패한 친원(親元) 기득권 세력을 밀어냈다는 의미와 함께
성리학이라는 한족 문명을 절대시하는
나약하고 폐쇄된 나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1392년 조선 건국은 명나라와 만주의 몽골 세력 간
새로운 관계 정립의 한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