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 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 각묵스님, 「디가니까야 2」(초기불전연구원 2006), 115면
대인연경은 9지연기로 연기법을 설하는 경이다.
이 경은 아난다가 연기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세존께서 그 견해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데 위의 인용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본으로 이 대목을 읽어보면
아난다와 부처님 간의 대기설법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
부처님은 아난다의 말에 대하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부정하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읽히려면,
이후 부처님의 말씀은 아난다의 말을 부정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도 아난다와 동일하게,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물론, 아난다의 “그러나 이제 제게는 분명하고 또 분명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는
뒷말만을 부정하는 것으로 읽을 수는 있다.
즉, 연기는 참으로 심오한 것이어서 너의 수준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각묵스님은 이 해석을 지지하여,
“연기는 부처님들의 영역에 속하는 심오한 가르침인데 이를 두고 아난다가 자신에게 이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아난다 존자의 그런 성급한 말을 제지하시면서
연기의 가르침에 대한 부처님의 심오하신 설명은 시작된다”고 각주에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각묵스님의 해석을 지지하면, 이후 부처님의 헝클어진 실타래, 엉킨 풀이라는
비유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아난다여, 너는 연기법을 분명히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므로
연기법이 분명하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너의 수준으로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서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말씀하셨단 말인가?
그리고 설마하니
연기는 제불의 영역에 속하는 가르침일 뿐,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란 말인가?
참으로 중요한 경인데, 이 경의 서두가 이토록 불명료한 이유는 무엇일까?
번역이 여러 면에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일차적으로 번역문을 바로 잡자면,
“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고쳐야 한다.
각묵스님이 “이와 같이”, “그렇게”라고 번역한 evaṃ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여시아문)의 “이와 같이”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대개의 경우처럼 “이와 같이”는 후술할 내용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대목을 콜론을 사용하자면,
“이와 같이 말하지 말라: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로 옮겨야 하며, 우리말의 어순을 고려한다면,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된다”로 옮겨야 한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고
말해서는 안되는가?
연기를 본 자는 “연기는 심오하게 드러난다”, “연기는 명료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연기는 이렇다”고 직접 드러내어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문을 가지고 좀더 분명히 설명하자면, “yāva gambhīro cāyaṃ, bhante, paṭiccasamuppādo
gambhīrāvabhāso”는 “세존이시여, 참으로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하게 보입니다”, 또는
“세존이시여, 참으로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로 옮겨야 한다.
avabhāsa는 영어로는 appear, 독일어로는 sheinen에 가장 가까운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난다는 연기법을 체득하거나 깨닫지 못한 채 이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연기는 이렇다”고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하게 보입니다”,
혹은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 하며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여,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여, 이 법을 통찰하지 못하여,
이와 같이[네가 말한 바와 같이] 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엉키게 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연기를 본 자는, “연기는 심오한 듯합니다”, “이제 제게는 연기가 분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연기를 보지 못하고 그저 듣고서 이해한 자는 “연기는 심오하고 심오한 듯합니다.
연기는 참으로 분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아난다는 후자의
위치에 있었고, 부처님의 후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설법했다. 연기에 대하여
그와 같이 말해서는 안된다고, 알면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요 모르면 침묵하라고,
추정과 짐작과 감상에 의거해 연기를 말하면 필연적으로 엉킨 실타래처럼 풀 길이
없을 것이요 윤회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각묵스님의 해석은 서양언어에서 be/apper, sein/sheinen이 얼마나 다른 차원의 것인지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안목의 결여 때문이겠지만. . .
그리고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나는 각묵스님의 초기경전 번역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전재성의 초기경전 번역을 신뢰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존경받아 마땅한 그분들의 원력과는 별개로,
후세의 진취를 위해서는 이런 비평과 탁마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 불가사의합니다,
세존이시여 ! 참으로 연기는, 세존이시여,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제 연기는 제게 명료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여,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여, 법을 깨닫지 못하여, 법을 통찰하지
못하여, 이와 같이 사람들은 엉킨 실타래처럼 되고 먼짓덩이처럼 되고 문자풀과 바빠자
풀처럼 되어 고처, 악취, 악처의 윤회를 넘어서지 못하느니라.”
스스로가 체득한 바에 의거하지 않고 다른 것, 다른 권위에 의거하여 연기를 이해하고
말하는 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의 수레바퀴를 벗어날 길이 없다.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고 심오한 듯합니다” 하는 아난다의 고백은 얼핏 연기에 대한
예찬론처럼 보이지만, 실은 연기를 모르는 자의 고백, 남이 체득한 바를 자신의 개념으로
환치시킨 사례, 그리하여 실타래를 더욱 엉키게 하고 먼짓덩이를 더욱 부풀리는
언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개념의 놀이, 희론을 좋아하는 학자들은 이 언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말한다: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 이와 같이 말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
비고 : 12연기 댓글 의견 글 - Review
알기 어려운 난제를 들고 계시군요.
시간이나 무명과 같은 개념의 시원은 인식되어지지 않으며,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명을 원인으로하여 행이 행을 원인으로 하여 식이 생겨나는데....
집착과 욕망는 왜 생겨나는가? ...........집착과 욕망은 '나'라는 전도된 인식에서 생겨납니다.
'나'라는 전도된 인식은 왜 생겨나는가?.........무명으로 인하여 생겨납니다.
무명은 왜 생겨나는가? ..........
'나' '나의 것'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동시에 같이 일어나고, ';나' '나의 것'이라는 전도된 인식을 일으킴과 동시에 함께 일어나고.......
연기적이지 않습니다.
수정이 됨과 동시에 식도 역시 같이 일어난다고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해집니다.
결코 12지가 나열된 순서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연기한다는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12가지로 해체하고 나누어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리수가 생각하기에는 결코 순서에 따라 일어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관계를 맺고(關係性) 이어지다가 조건이 소멸하면 함께(同時性) 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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