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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새로운 노자를 번역하느라 당분간은 그냥 구경만 하고 지나치려고 했는데
댓글이 너무 길어져 카페 규정에 맞지 않다는 비사인님의 지적에 따라 공간을 이쪽으로 옮겼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드리는 말씀은 주로 평범한 역사학도로서의 "상식" 선의 소견입니다
저는 언어학 보다 정확하게는 한자로 이루어진 문헌정보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사 연구에 있어 제가 할 몫은 언어학적 서포트라고 봅니다.
역사학 또는 고고학 분야의 접근은 제가 아닌 역사학자들 몫이라고 보지요.
그리고 언어학 또는 어원학적으로 탐구하면서 제가 확인한 사실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만으로도 삼국시대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민족적 계통을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언어적으로는 어느 계통인지도 모르고 또 알타이어족설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 역시 현재 국어학계의 실상입니다.
국사학계도 문제가 많지만 국어학계도 막상막하더라구요.
아뭏든 언어적 접근이 고대사 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의 고리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물론 언어/어원/금석학적으로는 드리는 말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습니다만
역사/고고학 분야로는 어쩔수 없는 초보자고 입문자이니
모쪼록 너그러운 해량과 아낌없는 "채찍질(^^;;)"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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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관총 환두대도의 주인
이번에 발견된 신라도의 주인은 눌지왕입니다
물론 "명문에 근거할 때" 또 "왕이라고 가정할때"라는 단서를 붙여야 겠지만요
확신의 근거는 언어학적 견지에서 거의 90% 정확도의 정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 기존의 연구 결과에 따르더라도
(1) 냉수리비에 처음 왕호가 등장하면 '왕'의 사용 상한선은 그 이전인 5세기로 소급되겠고
(2) 4-5세기라면 역사적으로도 눌지왕 시기에 맞아 떨어지며
(3) 국왕급 능인 금관총에서 그 칼이 발견됐다면 일반 귀족과는 다른 왕으로 보아야 옳다
이상의 근거만으로도 눌지왕 밖에 해당자가 없다고 봅니다
눌지왕이라는 증거는 조금 더 기다려 주십사 말씀 올려야 겠습니다.
제가 지인에게 카페에 눌지왕이라는 근거를 글로 올릴 에정이라고 하니까
거기에 근거로 제시하는 이론과 학설들만 갖고도 논문 2편이 나오니까 정식으로 발표하라는군요.
제 생각에도 게시판에서의 댓글달기나 언론을 통한 공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아무리 떠들어 대도 항상 찻잔 속의 소용돌이로 그치더군요.
차라리 학계에 논문으로 발표해서 정식으로 문제제기하고 싸워서 바로잡는게
저 개인, 고대사학계, 그리고 수많은 역사학도 및 매니아들께 더 많은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 따라
차후에 논문으로 발표하게 됨을 해량해 주십시요.
2. 갈문왕의 것일까?
문제는 갈문왕으로 보게 되면
(1) 그 갈문왕이 누군지부터 먼저 확인해서 주장해야 한다
(2) 갈문왕의 "갈문"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뜻은 제대로 아는가?
이런 문제들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언어학적으로 따져 들어가다 보니 갈문왕은 서울시장 정도의 지위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더군요
그러다 보니 현재까지 국내에서 주장해 온 갈문왕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더군요
이 칼의 출현으로 "왕"이라는 존호를 지증왕때부터 썼다는 통설이 하루아침에 의혹에 휩싸일 정도로
지금까지의 고대사 분야가 허약하고 그 고증에도 빵꾸가 너무도 많다는 점을 절감합니다
갈문왕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라고 봅니다.
해당 분야 연구가 미흡하고 학자마다 한두편 논문을 낸 정도여서 학자들마다 서로 의견이 다르니
정설이나 통설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더군요.
갈문왕의 자격이나 권력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갈문왕을 왕족이나 척족에게 주는 벼슬이라고 주장한 학자는 있지만 신라사 전반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때문에 갈문왕설은 칼의 주인이 누구냐에 대한 답을 모르는 학자들의 안일한 미봉책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문왕의 말뜻이나 성격이나 위상 권력 등
이에 대한 전문적 집중적 연구결과도 없는 상황에서는 언젠가는 자신의 주장이 폐기될 위험성까지 안아야 될테니까요
3. 그렇다면 소지왕일 가능성이 있겠군?
어제오늘 신문에서 칼의 주인이 소지왕이라고 주장한 학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분에게 그 이상의 근거는 하나도 없지 않나
만약 소지왕이라는 근거가 있다면 왜 밝히지 않는가 따지고 싶더군요.
제 생각에는 이사"지"와 소"지"가 같은 "지"자 돌림이라는 것밖에는 아무 근거가 없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1) 소지왕은 이사지왕과 언어적으로 전혀 관련성이 없다
(2) 반면에 눌지왕은 언어적으로 "분명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라는 점입니다. 그 분은 소지왕설을 제기하기 앞서 이 두 문제에 먼저 대답해야 할 거라고 봅니다.
회원분들 중 몇몇 분은 제가 역주한 <조선사연구> 보고 계시겠지만
삼국시대 왕호 중에도 지금 알려진 것과 별칭 중 어느쪽이 정답인지도 학계에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더군요.
책계왕인지 청계왕인지, 아신왕인지 아화왕인지 기타 등등 말입니다.
아신왕만 해도 목판 판각과정에서 "신"으로 쓴거지 사실은 "아화왕"인데 지금 "아신왕"이 공식 왕호로 대접받는게 현실입니다..
어제오늘 신문 아무리 찾아봐도
소지왕이라고 주장한 분 함자나 그 주장의 근거를 밝히지 않았더라구요
그 분에게 그렇게 "막 지를 수 있는지" "실증사학 하는 분 맞는지" 한번 따지고 싶더군요
4. 그럼 귀족의 것일 수는 있겠지?
왕관의 성분 문제도 그렇습니다.
귀족들도 그런 관을 썼으니까 이 칼의 주인은 귀족이라는 주장은 역사 초심자인 제가 봐도 어불성설이에요.
신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골품제도와 관등제도가 중대까지 철저하게 엄수되던 나라입니다
하대까지도 당나라에 유학하고 관리까지 하다 귀국한 최치원조차 6두품이라고 명함조차 못 디민 나라입니다
관도 당연히 금관-금동관-동관...
서열에 따라 이런 식으로 차등이 있던 나라 아닙니까?
그런데 현존 금관 중에 가장 화려하고 큰 순금(?)관의 주인공인데 그걸 귀족에 갖다붙이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5. 다 됐고 이사부는 어때?
어떤분은 '이사부'로도 추정하시던데
적어도 언어학적 견지에서는 타당성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1) '이사'까지는 그럴듯 하지만 '부'와 '지'는 언어적으로 상관성이 없다
(2) 금관총에서 신라도가 발견됐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3) 칼은 왕들도 하나 이상씩 가졌던 위세품이다
옛날에는 무장뿐만 아니라 국왕이나 황제도 위세품으로 보검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 분의 무장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계림로에서 발견된 황금보검 역시 어느 장군의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삼국시대 어느나라 왕 치고 전쟁에서 칼 한번 안 휘두른 왕이 있던가요?
그럼 그 왕들이 전쟁터에서 휘두른 칼은 장군의 칼을 잠시 빌려서 휘두르고 되돌려 주었을까요?
왕권을 상징하거나 왕이 소지했던 칼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면 오히려 본말이 전도될수 있다고 봅니다.
명문의 서예 솜씨는 낙제급이었지만 그래도 왕은 왕입니다^^;;
6. 정 안되면 화랑세기로 들이대 볼까?
국내 학계에서는 고대사 연구에서 화랑세기가 항상 무슨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되는 경향이 있군요.
예전에는 제 전공에만 파묻혀 살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는데
이번에 문제의 화랑세기 들추어 봤더니 수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1) 필사의 원본부터가 확인 불가능한 의문점은 일단 둘째치고
(2) 지난번 발견된 집안 마선비처럼 신라시대의 향찰이나 고유어가 하나도 없음
(3) 왕호나 이름을 설명하면서 조선시대에나 썻을 법한 표현을 쓰는 구석이 몇 군데나 보임("구리다" 등)
역사학게에서는 아직도 논란중인지 모르겠사오나
외람되게도 언어학적 견지에서 제게 발언권을 주신다면 저는 가차없이 위작이며
따라서 화랑세기를 논거로 삼은 어떤 주장도 의심받아야 옳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화랑세기 너무 과신 또는 남용하지 마시기를 간곡하게 조언합니다^^;;
7. 마지막으로 고대사 연구자들께 당부의 말씀
지난번 집안 마선현의 정체불명의 비석이 발견됐을 때도 번번히 느꼈습니다만
이번의 금관총 신라도 해프닝도 그렇고
또 마지막에 덧붙인 화랑세기 논란도 그렇고...
우리 국사학계가 언제부터 그렇게 무모하고 용감해졌는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명색이 학계 아닙니까 그것도 대한민국의 자존심인 국사를 담당하는 사학계?
제가 아무리 문외한이지만 상식적으로
마선비나 신라도의 실체나 연대 소유주 성격 의미 등의 문제들은
학계에서 정식으로 논문을 발표하고 오랜 논쟁과 검증을 통해서 결론을 내려야 할 중요한 사안입니다
만장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합의된 상태에서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최소한의 안전 검증 절차도 거치지 않고 무턱대고 언론 플레이에 매달릴 수 있습니까?
연구와 장사를 겸하는 중국 학계 수준은 둘째치고
우리 학계가 요즘 너무 경거망동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학자적 양심이나 국가적 자존심은 집어치고 일단 한번 내질러서 먹히면 실적으로 올려서 승진하고 출세하자"
마치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작심하고 달려드는 것 같습니다.
학자가 무슨 연예인입니까 장사꾼입니까?
이런 식으로 연구를 할거면서 재야 사학자들 욕은 왜 합니까?
제발 학자들끼리 피 튀기는 논쟁을 통해서 어느 정도 정리된 답안이 나오면 그때 기자를 불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다른 분야도 그렇습니다만
학문의 근본이라고 할 인문학계마저도 학문이 목적이고 본업이 아니라
영달과 출세를 위한 일종의 수단이고 아르바이트라고 착각하는 몰지각한 인사들이 한둘이 아닌것 같습니다
요즘 국내에서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는데 거기에 일조한게 누구인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당선생은 한 나라의 역사는 그 민족의 얼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남아일언중천금(사나이의 한마디는 천금보다 무겁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마디 말을 천금으로 여기고
자신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학문을 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요..
첫댓글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나 참고하시라는 생각에 간단히 한말씀 적어보겠습니다. 신라에서 금관이 꼭 최고위층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단적인 예로 황남대총 북분에서 나온 금관은 남성의 것이 아니라 여성의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성이 상위이다라고 운운 할 수 있지만, 왕으로 추정되는 남성은 금동관을 썼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으로 금관이 가장 높고 금동관이 그 다음이라는 인식에 있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칼이 있다고 해서 무관으로 보는 견해는 저 또한 동의하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무령왕릉에서도 환두대도가 나오니 말이죠.
황남대총 이야기가 나와서 여쭙습니다만
북분과 남분의 관계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라기보다는 여왕과 왕공의 관계로 이해할 수는 없는지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와 그 남편 필립공처럼
당시 신라에서 아무리 여성의 사회지위가 높았다 해도
단순히 여성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황금관을 배장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양자의 사회적/정치적 위계에 분명하게 차등이 있어서 황금관과 금동관으로 따로 배장한 것 같은데요
부부사이가 돈독해서 나란히 능을 조성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신라에는 여왕이 3명이라고는 합니다만..
제가 만주와 내몽골 일대를 다녀 보니까
만주-퉁구스계 족속의 남녀 샤만들이 쓰던 관들이 대체로 크고 화려하더군요
신라관처럼 만주-퉁구스계 샤만의 관에도 대부분 좌우에 사슴뿔이나 다른 뿔이 장식돼 있더라구요
그래서 처음에는 여성 샤만이어서 황금관을 배장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봤습니다만
황남총은 쌍분이어서 부부사이일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왕과 왕공의 관계로 보기에는 해당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라에서 여왕은 어쩔 수 없이 즉위하게 된 경우로, 그의 남편이 있는 경우에는 오히려 남편, 즉 선대 왕의 기준으로 볼 때 사위가 즉위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경문왕이 그러한 상황에 해당하죠. 게다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신라의 고분은 적석목곽분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주로 5~6세기 정도에 조영되고, 그 전후는 다른 양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시대가 한정되어 있고, 여기에 여왕은 없었지요. 사실 금관 문제 때문에 황남대총을 가지고 여왕의 존재를 상정한 견해도 있었으나, 지금은 왕비로 보고 있는게 통설입니다.
그렇군요 비사인님 가르침 덕분에 참 많은걸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화랑세기에 대해서 학계에서 전가의 보도 처럼 인식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로선 좀 동의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학계에서도 화랑세기에 대해서는 위서로 보고 있는 성향이 강하며, 일부 학자들의 경우만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오해를 푸셨으면 합니다.
또한 향후 논문으로 말씀하시겠다는 부분에 대해선 전 옳으신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게 카라바타르님으로서도 연구업적으로 남는 것이고, 진정한 학계의 논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화랑세기를 추종하는 분들이 학계에서도 일부임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그것을 둘러싼 역사담론이 역사 다큐나 사극 등으로 통해서 계속 확대재생산 되면서
마치 그것이 진품인양 포장되고 그렇게 믿는 일반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실제로
화랑세기 내용을 소재로 활용한 선덕여왕 등 몇년사이에 제작된 삼국 관련 드라마를 보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화랑세기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고 주입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학계에서는 소수의 의견이지만 사회적으로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취지에서 한 말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논문 관련 격려 말씀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역사 다큐에서는 사실 그렇게 많이 다루진 않지만 사극에서는 많이 다루죠. 문제는 사극 제작자들이 사학자들의 말을 별로 믿지 않고, 고대사는 밝혀지지 않은게 많다는 이유로 많이들 창작해냅니다. 그런 소스로 화랑세기를 많이 이용하고, 또 그게 대중들에게 상업적으로 잘 먹혀들어가기 때문에 많이들 선호하는 것이죠. 사극에서 사학자나 고고학자의 자문에 충실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한게 우리나라의 현실이죠.
그러게 말씀입니다
시청률 의식해서 점점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변해가는 사극에 대해서
사학자들이 강하게 이런저런 문제를 제기하고 고증을 책임져야 하는데 딱합니다 정말
물론 고증이나 자문에서 국어학자들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건 마찬가지지만...
전 2번 부분에 대해선 생각이 좀 다릅니다. 갈문왕을 주장하려면 어느 갈문왕인지, 갈문왕이 무엇인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사지왕'이 갈문왕일 가능성을 밝히는데 그와 같은 의문은 불필요한것 같습니다. 오히려 갈문왕이 '왕'으로 표현된 경우가 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갈문왕이 왕으로 표기된 바가 있다면 '이사지왕'도 갈문왕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냉수리비에선 지도로갈문왕을 표기하고 이하에서는 왕으로만 표기하고 있습니다. 저도 단순히 고위귀족의 가능성은 부정하지만 왕의 근친인 갈문왕 정도의 지위라면 금관총이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검에 대해서도 좀 생각이 다른 것이, 이번 검은 무령왕릉이나 황금보검과는 성격이 다른것 같습니다. 무령왕릉 환두대도나 황금보검은 분명 위세품이 맞습니다만, 금관총의 검이 위세품일까요. 저도 사진으로만 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환두대도는 고리의 장식으로 그 지위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관총 환두는 장식이 굉장히 단순하지요. 금관총 주인과 격이 맞지 않는것 같지만 이것은 오히려 주인이 실제로 전쟁에서 사용한 실전용이라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요. 게다가 글자가 삐뚤하게 새겨져 있는 점, 숫자가 표시된 점을 보면 소위 보급품 전투장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금관총 주인정도가 단순히 위세품으로 검을 넣었다면 격이 맞는 검과 정성들여 이름을 새긴 검을 넣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지금은 이로보나 저로보나 시기상조인건 맞는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시급한건 다른 유물에 대한 정리가 아닐까 합니다. 혹시 또 제2의 이사지왕과 같은 글자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환두대도의 경우 고리의 장식은 어느정도 지역성도 반영하긴 합니다. 신라의 경우 삼엽문환두대도로 보이고, 백제와 가야는 용봉문환두대도가 많이 보이죠. 환두대도의 경우 아예 실전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급 전투장비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삼국시대 당시의 왕들은 군사적인 성격인 강한 왕들이었기 때문에 저런 칼을 지니고 있는 건 사실 이상할 것은 없지요. 환두대도의 장식은 자루 끝 장식의 세공을 살펴보기도 하지만, 칼자루에 새겨진 장식 등을 보기도 합니다. 또한 글자가 삐뚠 것은 왕흥사지사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왕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죠. 이는 금속유물의 특성 상 글씨 새기기가 어렵기에
세밀하게 글씨가 새겨지기 힘들기 때문으로 보는게 더 낫습니다. 이번 칼에 대해서 사실 군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이러한 장식성이 오히려 뛰어난 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칼과 비교해 보시면 어렵잖게 아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의 칼이 맞기는 하나, 그 왕이 누구이며, 어떤 성격의 왕이었는지에 대해 알아가는게 오히려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당시 칼은 전쟁에서 쓰는 주요 장비가 아닌, 보조적인 성격이나 의장용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오히려 당시 전쟁에서는 칼보다 창과 활을 더 많이 쓴 것으로 보고 있죠.
사진으로 봤을땐 장식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는데 그렇군요. 물론 검과 같은 단병기가 병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안악행렬도에도 환도수들이 대략 10% 차지하고 있는데 전투장비로 보기 힘들다는건 좀 지나치지 않을까요? 암튼 왕릉급이면 보통 용이나 봉황문양이 나오는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군요.
어디까지나 주된 무기는 창이나 활이 된다는 것이지 칼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는 것이죠. 집단으로 몰려서 싸움을 할 겨우 사실 창이 좀 더 효율적이고, 칼은 소규모 전사들끼리 숲 같은 울창한 공간 등에서 쓰이기가 좀 더 유용했겠죠.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칼을 쓰는 모습들이 더러 보이기에, 실전에서 아예 배제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주요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을 볼 때, 출토되는 칼의 경우엔 실제 전쟁에서 사용된 피가 묻은 칼이라기보다 의장용으로서 위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게 좀 더 맞다고 여겨집니다. 국립대구박물관에서 『한국의 칼』이라는 도록을 낸 적이 있는데, 혹시나 보신다면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책 추천 감사합니다~
돌부처님
지적 말씀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갈문왕이 '왕'으로 표현된 경우를 찾아본 후
그 기록을 토대로 역추적해 가면 이번 신라도의 주인을 찾아낼수도 있을 것 같네요
다만 한 가지..
왕의 근친으로서의 갈문왕이 금관총의 주인이라면 경주 지역에 고분의 갯수가 너무 적지 않나 싶습니다
비사인님
감사합니다 환두대도와 위세품에 대한 말씀은 저보다는 님께서 전문적으로 잘 설명/소개해 주셨네요
동시에 제가 모르던 사실/내용들도 많이 알게 되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번 신라도의 성격에 대한 제 입장은 비사인님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따로 답변 올리지 않겠습니다
경주 지역에 있는 고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적석목곽분은 그 시대가 한정되어서 조성되었습니다. 이는 기록과 출토된 유물의 편년을 통해서 알 수 있죠. 5~6세기의 짧은 기간 동안 지금 남아있는 여러 고분군들이 조성되었기에, 사실 연대만을 따지자면 결코 적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다 왕릉으로 볼 수는 없고 일부는 귀족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보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갈문왕의 무덤이 왕릉급으로 조영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크게 의문시 될 부분은 없습니다. 때문에 이번에 국왕이 아닌, 신라 귀족들 중의 왕이라고 볼 경우에 현재까지 밝혀진 부분들에 대해서 상당한 재조사가 필요한 것이죠.
참고로 현재 발굴된 적석목곽분보다 발굴되지 않은 적석목곽분이 훨씬 많습니다. 적석목곽분은 그 구조상 도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두 그 유물이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으리라 보고 있지만, 현재 김씨와 박씨의 선조가 되기 때문에, 그 문중에서 발굴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발굴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와 군사정권 시절로, 이때는 누가 나서서 반대 할 수 없었기에 그대로 발굴이 진행된 것이죠. 게다가 다른 발굴에 비해서 그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기에, 쉽게 엄두를 못 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몇개 조사 안된 무덤들에서 상당수가 금동관이나 금관이 나오기 때문에 이를 모두 왕릉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동안 말이 많은 것입니다. 앞서 언급되었지만 황남대총 또한 2개의 무덤에서 모두 금동관과 금관이 나왔기에, 꼭 왕이 아니더라도 최고위층 신분이라면 금관을 쓸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이런 점에서 금관이나 금동관을 무조건 왕만이 쓸 수 있다고 단정짓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발굴을 반대하는 그런 상황도 있군요. 문중 입장에서야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지만...국민으로서는 안타깝네요. 실체진실을 밝히는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아무튼 지속적으로 발굴성과가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일단은 금관총의 다른 유물부터 빨리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또 다른 단서가 발견될지도...여러모로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문중의 반대로 발굴을 못한다는건 선뜻 납득이 안되네요
어느 능이 어느 집안 출신자의 능인지도 모르는 상황일텐데 그게 가능한건지
그럼 박씨 김씨 이씨가 연대해서 반대하는 거겠군요?
이미 1천년도 넘은 옛날옛적 고분이고 나라의 역사인데 너무 그 문중의 입김이 센 듯 합니다
돌부처님 말씀처럼 참 안타깝고 딱하네요
어떤 의미에서는 고분에서 무엇이라도 나오면 그게 오히려 가문의 영광일텐데...
아뭏든
비사인님 돌부처님
두 분의 가르침 정말 고맙고 많이 배웠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경주지역의 왕릉급의 무덤을 발굴하지 않는 것은 여러가지 사유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중의 반대도 있지만, 기존에 발굴된 것들도 아직 처리되지 못하고 흙더미채로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더 이상 경주지역에는 보관할 곳이 없다는 것이고 경주이외의 지역으로 반출되는 것을 경주시가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꼭 학술발굴이 필요하다면 그 당위성을 문화재청에 요구하여야 하고 이는 역사 및 고고학자들이 그 필요성을 충분히 설명해야 합니다.
문중의 반대는 그 과정중에 하나의 걸림돌인 것 같습니다.
남당유고(화랑세기) 진위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傳미추왕릉을 발굴해 보면 그 결과가 속시원히 드러납니다. 제가 그 때문에 문화재청, 경상북도, 경주시에 발굴 건의를 한적이 있고 문화재청으로 들은 답변이 학술대회를 통해 그 필요성을 충분히 검증받아오라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금관총에서 이사지왕 명문대도의 출토를 통해서 "황남대총"의 유물중에서 명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실성왕이라는 명문이 나온다면 남당유고(화랑세기)에 대한 검증은 충분할 것이라고 봅니다. 금관총은 90년을 기다렸지만 황남대총은 그 절반의 시간을 기다리며 피장자가 밝혀지기를 기원합니다.
정성일님
1. 님 말씀대로라면 왕릉 발굴 문제에는 온갖 사유가 얽히고 설켜 있군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없는 유물까지 만들어내는 판국에 우리나라는 그저 답답할 따름입니다 ㅠㅠ
2. 매사에서 답을 정해놓고 거기에 끼워맞추는 식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자칫 전혀 별개의 두 사실을 동일한 사건과 유물로 짜맞추다 보면 결국 나머지 사실관계까지 헝클어지니까요
연구자들의 탐욕 때문에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지난번 마선비 논쟁에서도 똑똑히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언어적 측면에서만 봐도 조선시대 이상으로는 소급할 수가 없습니다
한문은 비슷하게 짜맞출수 있지만 고유어만은 아무리 조작해도 티가 나거든요
화랑세기의 필사자(혹은 저자라고도 함) 박창화는 자신의 글 "강역개론"에서 "우리나라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이다. 삼국사기 이전은 약간의 전설뿐이다. (중략) 이 전기를 記한 고기가 今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아니함으로 삼국유사같이 허황한 기록이라도 유일한 사료로 참작하는 것이나 이것도 또한 개찬된 흔적이 있다"고 하여 화랑세기 박창화 저작론에 불을 붙인 것이 사실입니다. 남당이 일본 궁내성(또는 동양문고) 등지에서 母本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였을 까 의심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하지 않은 목록중에 "만력(1592)이전조선고간본의목록"이라는 책이 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뒤장에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왕실의 고간본과 관련된 기록을 발췌한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에 박창화의 도장이 군데군데 찍혀 있어 박창화가 후견인으로 받은 책을 박창화가 공부하면서 추가했다고 볼 수 있는데, 박창화는 이를 근거로 조선에는 삼국이전의 사서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삼국사"라는 기록이 보이지만 통설은 "삼국사기"로 해석하기 때문에 박창화는 조선왕실에 "삼국사"가 비장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박창화의 말대로라면 권근의 "동국사략"이나 서거정과 김종직의 "동국통감"과 "삼국사절요"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없어야 되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조선왕실에 "삼국사"가 비장여부의 사실과 그 내용이 추정하는 문제는 다음의 내용을 삼국사기와 비교해 보시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자 : 서거정
四佳文集卷之四 三國史節要序
四佳詩集卷之三○第三 讀三國史
四佳文集補遺二 進三國史節要箋
四佳文集補遺二 進東國通鑑箋
저자 : 김종직
佔畢齋集彝尊錄 先公譜圖第一
정성일님
서지적인 정보들은 "화랑세기"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제2의 삼국사에 관한 것들이니 별개의 문제지요.
제가 화랑세기를 위서로 보는 가장 큰 근거는
거기에 군데군데 언급되고 있는 언어적 단서들입니다
예를 들어 "구리지"를 "측간"과 결부시키는 발상부터가 삼국시대와는 동떨어진 추론이라는 거지요
"구리다", "구린내", "고린내"... 이런 표현은 삼국시대부터 전승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선시대 또는 그보다 훨씬 이후의 어투입니다
그런데 삼국시대에 기술된 역사책에서 "구리다"라는 표현이 나왔다? 그리고 "측간"과 결부시켰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또하나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는 않았고 발췌독을 하긴 했지만
임의로 펴서 읽은 여러 쪽에서 "기존의 삼국사기 등에 언급된 단어들을 제외하고는"
향찰로 된 신라어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논문으로 어원학 관련 글을 쓸 때 언급할 예정입니다만
제가 지금까지 포착한 삼국시대의 언어현상이나 독음변화의 양상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과 언어적 증거들을 감안할 때
적어도 언어적으로 본다면 화랑세기는 진품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거지요
화랑세기 내용이 실제 사서와 얼마나 일치하느냐는
제가 역사학자가 아닌지라 그에 관한 언급을 유보하고자 합니
동감합니다 용어가 좀 후대적입니다. 삼국사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