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능력은 위기에 처했을 때 비로소 최대치가 된다고 한다. 요리 능력도 그런 것 같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먹고살 길을 찾아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낸 모습을 보면 경이로움까지 느껴진다. 모래언덕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서 그런 인류의 위대함을 목격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거대한 사막인 사하라. 처음 사하라를 밟았을 때는 마냥 신기했다. 뜨거운 붉은 언덕에 올랐던 맨발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한데, 마치 불시착한 비행조종사가 된 것마냥 그곳에 서서 어린왕자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빠졌더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보이는 것은 온통 붉은 모래뿐이요, 벌레 소리 하나 없는 완벽한 정적이 계속되자 덜컥 겁이 났다. 살아있는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땅,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 홀로 남겨진다면 어떨까. 처음의 낭만과는 달리 물통을 실은 커다란 자동차 두 대가 반드시 함께 다녀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 바로 사막이었다.
하지만 사막 어딘가에는 반드시 오아시스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근처에서 우물형 오아시스를 발견했고, 거기서 오아시스만큼이나 반가운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막을 떠돌며 수천 년을 살아온 유목민, 베르베르족이었다.
“매일 이곳에 와서 물통 세 개를 꽉 채워서 가져가요. 이 물로 우리 가족이 하루 동안 씻고, 마시고 요리를 하지요.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물을 절약하는 법이랍니다.”
이들은 사막에서 수천 년을 살아오며 요리할 때마저 물을 아껴 쓰는 지혜를 터득해왔다. 심지어 아주 적은 양의 물을 가지고도 넉넉한 국물 음식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그 비밀은 베르베르인들이 만들어낸 특별한 냄비 ‘타진(Tajine)’에 있단다. 대체 어떤 냄비기에 그런 놀라운 마법의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걸까. 그 마법의 요리를 직접 눈과 입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오래 머물 수 없었던 촬영 여건상 타진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헤어져야 했다.
아쉬움도 잠시, 사막을 빠져나와 찾아간 모로코의 시장에서 운명처럼 타진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시골 시장에서 양은 냄비를 쌓아놓고 팔 듯, 모로코 시장 어딜 가나 타진들로 가득했다. 그만큼 모로코에서는 중요한 조리도구였다. 타진 가게 아저씨가 고깔 모양의 뚜껑을 들고 보여주며 말했다. “원뿔 모양의 뚜껑이 달린 속이 얕은 토기 냄비가 바로 타진입니다. 모로코에서 말하기를 타진은 ‘냄비’라는 뜻인데 조리도구도 타진, 그 냄비로 만든 요리도 타진이라고 불러요.”
물을 적게 넣어도 국물이 넉넉하게 불어나 깊은 맛의 국물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신기한 냄비. 이것을 이용해 만드는 타진요리는 주로 고기를 넣어 끓인 스튜형의 요리라고 했다. 다행히 아저씨에게 타진요리를 잘하기로 소문난 한 아주머니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타진요리의 대가로 알려진 바키세 아주머니를 만나러 간 곳은 새벽녘의 들판. 어두컴컴한 들판 사이에 구부정한 자세로 무언가를 열심히 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바구니를 들여다봤더니 사프란(Saffraan)의 원료가 되는 크로커스 꽃으로 가득했다. 꽃밭에 파묻혀 일하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어 촬영팀을 맞았다. 체구는 작지만 단단하고 다부진 인상이 고단하고 힘겨운 삶 속에서도 꿋꿋이 자식들을 키워낸 우리네 어머니와 겹쳐졌다.
“저희 부모님 대 때부터 사프란 농사를 지었고 저 역시 열 살 때부터 사프란 농사를 지어 4남 4녀의 자식들을 키워냈어요. 직접 수확한 사프란은 물론, 이 지역에서 나는 신선한 식재료로 모로코 요리를 만들어 아이들을 건강하게 길러냈죠. 우리 애들이 잘 자란 것은 내 요리솜씨 덕택이에요.”
바키세 라크비라 씨는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모로코의 강인한 어머니였다. 다짜고짜 찾아와 타진요리를 보여달라는 촬영팀의 부탁에 ‘나를 따르라!’라는 듯 시원스레 허락해주었다. 주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신선한 고기 덩어리부터 꺼내 들었다. 바키세 아주머니가 타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로 꼽는 ‘양고기’였다. 양은 건조한 기후에 잘 적응하고 아무 풀이나 잘 먹어 사막 유목민들에겐 더없이 소중한 가축이기도 하다. 한국 사람들은 누린내 때문에 양고기를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더니, 냄새에 예민하다면 향신료를 풍성하게 사용하는 게 좋다며 그녀의 보물 같은 갖가지 향신료들을 보여주었다.
“양고기에 올리브 오일을 듬뿍 뿌린 뒤에 향신료를 넣어야 맛과 향이 잘 배죠. 직접 농사짓고 말려낸 사프란부터 강황가루, 커민, 칠리페퍼 등 저는 35가지 정도를 섞어서 저만의 독특한 맛을 만들어요.”
이렇게 블렌딩이 된 향신료는 요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풍성한 향으로 입맛을 돋워줬다. 특히 아주머니가 직접 수확하고 말린 황금빛깔의 사프란이 듬뿍 들어가니 빛깔도 고와지고 향긋한 내음이 기분까지 좋게 만들었다. 그렇게 향신료에 재운 양고기를 타진에 담고 조리를 시작했다. 옆에 편리한 가스불을 두고도 힘들게 구부리고 앉아 화로에 숯불을 넣고 타진을 올렸다. 왜 불편하게 굳이 숯불 화로를 고집하시는 걸까. 정말 몰라서 묻는 나에게 아주머니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가스불보다 숯불 화로에 뭉근하게 끓여내야 맛과 향이 은은하게 잘 우러나요. 모로코에서 타진요리를 할 때는 대부분 숯불 화로를 쓰는데 타진 화로라는 게 따로 있을 정도랍니다.”
타진 뚜껑을 덮기 전, 고기를 살짝 볶아 풍미를 살려준 뒤 채소들을 쌓아 올렸다. 제대로 된 모로코 타진요리를 만들기 위해 이 지역에서 나는 재료로만 요리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더 신선해 보이는 감자, 호박, 토마토, 줄기콩, 그리고 사막에서 ‘생명의 나무’라 불리는 대추야자의 열매까지 빠짐없이 타진에 들어갔다. 대추야자 열매는 타진요리에 은은한 단맛을 내준다. 이제 여기에 물을 조금 넣어주면 모든 재료가 다 채워진 셈이다.
마지막 남은 과정은 뾰족한 원뿔 모양의 뚜껑을 덮는 것이었다. 물을 조금만 넣어도 마법처럼 국물이 불어나게 하는 뚜껑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대체 어떤 원리일까. 바키세 아주머니가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타진 속에서 재료가 끓으며 나온 수증기는 높은 뚜껑 위로 올라갔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뚜껑 위에 맺혀요. 그리고 물방울이 되어 다시 흘러내려와 국물이 되는 거죠. 재료에서 빠져나온 수분이다시 국물이 되니 음식 맛도 깊어져요.”
적은 물로도 국물 요리를 넉넉하게 만들 수 있었으니 사막에 최적화된 냄비임에 틀림없다. 그 옛날, 이 냄비를 만들어낸 사막의 유목민들, 그리고 조상들의 지혜를 물려받아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이어오고 있는 모로코인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뭉근하게 끓여 타진이 완성됐다. 바키세 아주머니의 소박한 뒷마당에서 작은 파티가 열렸다. 바키세 아주머니 가족들과 촬영팀이 둘러앉아 타진요리를 맛봤다. 향신료의 풍성한 향과 채소의 맛이 깊게 우러난 국물이 정말 진했다. 거기에 담백한 빵을 계속 찍어 먹다 보니 고기를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바키세 아주머니의 권유에, 전통방식에 따라 손으로 고기를 집어 들었다. 타진에 끓인 양고기가 얼마나 연한지,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고기가 저절로 찢어졌다. 부드러운 고기에 향신료의 풍성한 향이 배어들어 독특한 그 맛을 입안에서 오랫동안 음미할 수 있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넉넉한 국물의 요리를 먹고자 했던 사막 유목민들의 지혜가 담긴 타진. 그리고 모로코의 식재료와 독특한 향신료들의 풍성한 맛을 담아낸 바키세 아주머니의 요리에 홀딱 반해 모로코 시장에서 타진을 한가득 사고 말았다. 무게도 있고 깨질 위험이 커 한국에 가지고 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진 냄비들을 싸들고 왔다. 덕분에 지금도 바키세 아주머니의 요리가 생각날 때면 타진을 꺼내 요리를 한다. 뾰족한 뚜껑을 가진 마법의 냄비, 타진만 있으면 나는 언제든지 그때의 모로코와 거대한 사막으로 떠날 수 있다.
사막 유목민의 냄비이자 요리, 타진
타진은 적은 수분으로도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원뿔 모양의 뚜껑이 있는 냄비, 그리고 이 냄비로 만드는 요리를 말한다. 북아프리카에서 사하라 사막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떠돌며 살아가는 사막 유목민, 베르베르족이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원뿔형의 독특한 뚜껑에 얕은 본체로 구성된 냄비인데, 뚜껑의 구조 덕분에 재료에서 나온 수증기가 높이 올라갔다 식어서 다시 수분으로 변한다. 그 물이 뚜껑을 타고 내려와 재료에 스며들기 때문에 영양분 손실이 적고 맛이 잘 우러난다. 야채찜, 나베 등 전골이나 찜 요리에 적합한 형태의 냄비다. 냄비의 본체가 얕아서 접시에 옮기지 않고 그대로 테이블에 내기도 하는데, 보통 화려한 문양의 타진은 접시 대신 사용한다.
- 재료(2인용)
- 주재료
양고기(어깨살) 250g, 소금 1작은술, 후추 1/2작은술, 올리브 오일 3큰술, 당근 1개, 감자 2개, 양파 1개, 토마토 2개, 마늘 3쪽 - 향신료
생강가루 1/2작은술, 커민가루 1작은술, 카앤페퍼 2작은술, 강황가루 1/4작은술, 사프란 1꼬집
◉ 양고기 타진
1. 양고기는 한입 크기로 자른 후 소금, 후추를 뿌리고 향신료, 올리브 오일을 잘 섞어 약 30분간 재운다.
2. 당근, 감자, 양파는 껍질을 벗겨 굵게 자른다.
3. 토마토도 굵게 자르고, 마늘은 반으로 잘라 준비한다.
4. 타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고기를 넣어 겉면이 익을 정도로 볶아준다.
5. 4에 당근, 감자, 양파를 넣어 볶다가 토마토와 마늘을 넣고 볶는다.
6. 5에 그린빈과 대추야자를 올리고 물을 넣은 후 뚜껑을 닫고 약불에서 약 1시간가량 조리듯 끓여준다.
7. 고수 잎을 올려 마무리한다.
◉ 쿠스쿠스
1. 타진이 거의 완성이 되면 국물 1/4컵을 덜어낸다.
2. 냄비에 물 1/4컵과 타진 국물 1/4컵을 넣고 끓인다.
3. 불을 끄고 쿠스쿠스 1/2컵을 넣어 뚜껑을 덮는다.
4. 5~7분 후 뚜껑을 열어 고슬고슬하게 저어준다.
5. 접시에 쿠스쿠스를 담고 그 위에 양고기 타진을 얹어 먹는다.
‘이욱정 PD의 요리인류’는 KBS, 그리고 예담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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