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피시번 주연의 영화 '에어 이글'(Tuskegee Airmen, 1995)을 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미국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종사들을 길러냄으로써 인종차별의 장벽을 허문 제332 전투비행단 얘기를 그린 영화다.
1941년 7월 19일 미 육군 항공대는 처음으로 흑인 조종사 선발을 시작해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터스키기에서 992명의 흑인 조종사를 배출해 이 가운데 450명이 해외 참전을 경험했다. 이들은 1500회 이상 출격해 적기 111대를 격추시켰고, 지상에 있던 적기 150대를 파괴했다. 150명의 흑인 조종사가 훈련이나 전투 중 산화했다. 흑인 조종사 비행단이 탄생하게 된 데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의 각별한 애정이 작용했다. 그녀는 흑인 조종사 교육이 시작된 뒤 9개월 만에 흑인 조종사와 함께 비행하기도 했다.
미 육군 항공대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투기 조종사로 마지막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예비역 중령 해리 스튜어트 주니어가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AP 통신이 5일(현지시간) 전했다. 터스키기 에어멘 국립역사박물관은 고인이 지난 2일 미시건주 블룸필드 힐스의 자택에서 평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고인은 1945년 4월 1일 도그파이트(dogfight, 전투기의 꼬리를 물어 격추시키는 공중전) 끝에 독일 항공기 석 대를 격추시켜 공중전 수훈 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아울러 1949년 미 공군의 탑 건 비행 선발대회를 우승하고도 몇 십년 뒤에야 공인 받은 터스키기 에어멘 팀 4명의 조종사 중 한 명이었다.
이 박물관의 브라이언 스미스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고인을 “2차 세계대전에서 우리 조국을 위해 싸운 뒤에도 오랜 기간 도드라진 복무 경력으로 많은 성취를 이룬 친절한 남성이자 깊이 있는 캐릭터였다"고 안타까워했다.
1924년 7월 4일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찍이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책 ' Soaring to Glory: A Tuskegee Airmen’s Firsthand Account of World War II'에 따르면 라과디아 공항을 뜨고 내리는 항공기들을 올려다 보며 하늘을 날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했다. 진주만 공습 와중에 열여덟 살 스튜어트는 흑인 군 파일럿을 양성한다는 소식에 제332 전투비행단에 자원했다. 그 부대는 P-51 머스탱의 꼬리에 붉은색을 칠한다는 이유로 레드 테일스(Red Tails)로도 불렸다.
그는 지난해 CNN 인터뷰를 통해 2차 세계대전에 대해 “당시 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의 중압감을 알아채지 못했다. 난 그 때는 그저 내 의무라고만 느꼈다. 그냥 의무감으로 벌떡 일어선 것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다문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앨라배마주를 비롯해 짐 크로 법이 통용되던 남부에서의 흑백 분리와 차별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지만, 교육 과정을 끝내고 스스로 날개를 펴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앞의 책에 털어놓았다. 훈련을 마친 뒤 흑인 조종사들은 유럽에 미군 폭탄을 떨어뜨리는 임무를 맡았다. 터스키기 에어멘은 다른 전투비행단보다 불발 폭탄을 덜 떨어뜨린다는 평판을 들었다.
고인은 2020년 WAMC 인터뷰를 통해 “말하자면, 난 눈앞에 수백 대의 전폭기와 수백 대의 전투기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파노라마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정말로 즐기게 됐다. 그것은 하늘에서 펼치는 발레 같은 것이었으며, 정말로 커다란 어떤 것에 속한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의 책에 따르면 스튜어트는 때때로 너무 비행하는 것을 즐기는 데 바빠 역사를 만든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군을 떠난 뒤 민간 항공기의 파일럿이 되고 싶어 했지만 인종 때문에 거절 당했다. 해서 뉴욕 대학에서 기계공학 학위를 땄다. 나중에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회사의 부회장으로 은퇴했다.
스튜어트는 2019년 미시건 공공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근래 들어 민간 항공기를 조종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파일럿을 볼 때마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비행기 안에 들어갔을 때 조종석 안을 들여다보는데 두 아프리카계 미국인 파일럿이 있었다. 한 명은 기장, 다른 한 명은 부기장이었다. 그뿐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여성이라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난달 미국 공군은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항공기 사고가 잇따른 데 대한 대응으로 다양성과 평등, 포용(DEI) 정책에 대한 단속을 강화할 조짐을 보이자 터스키기 에어멘과 여성공군서비스파일럿(WASP) 얘기를 담은 동영상들을 삭제했다가 당파를 초월한 후폭풍이 일자 재빨리 복원했다고 AP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