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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서울 내곡동 예비군
훈련장서 예비군 총기난사 후 자살
13일 오전 10시53분쯤 서울 서초구 내곡
동 육군 52사단 211연대 예비군 훈련장
에서 동원훈련 중이던 예비군최모(23·서
울 송파구 거주)씨가 K2 소총을 난사해
최씨를 포함해 3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
했다.총기를 난사한 최씨는 현장에서 스스
로 목숨을 끊었으며 총에 맞은 예비군 중
박모(24)씨는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된
직후 숨졌다. 목 관통상을 입고 삼성서울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은 윤모(24)씨
도 이날 밤 끝내 숨졌다.
육군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예비군들이 실
탄 10발이 든 탄창을 지급받아 축소사격
이 시작된 직후에 벌어졌다. 최씨는 이중
1발을 발사한 뒤 돌아서서 8발의 실탄을
난사했다. 2, 3, 5사로에서 ‘엎드려 쏴’ 자
세로 엎드려 사격을 하던 예비군과 옆에서
사격을 돕던 부사수 예비군들이 총탄 에
맞았다. 이날 밤 ‘다 죽여버리고 나는 자살
하고 싶다’고 쓴 최씨의 유서가 최씨 바지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최씨는 군 복무 시절 B급 관심병사로 분류
돼 부대의 중점 관리를 받았고, 그의 이웃
들도 최씨가 평소 동네에서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고 증언해 이날 사건이 정신적 문제
를 겪던 최씨가 저지른 계획범죄라는 분석
이 나왔다.
오전 8시30분부터 시작된 사격훈련은
예비군 20명이 한 조가 돼 한 조가 사격
장에서 사격을 하면 3~4m 떨어진 곳에
다음조가 대기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사고 당시 현장에서는 강동·송파 지역 예
비군 50여명이 훈련 중이었다.이날 예비군
훈련장에는 예비군 545명 입소해 있었다.
이들은 2박3일 간의 합숙 동원훈련을 받고
있었으며, 14일 퇴소할 예정이었다.사격
당시 현장에 있던 통제 장교 3명과 조교
역할을 맡은 사병 6명은 대피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교들은 최씨가 총을 쏘자 사격장 아래
언덕으로 몸을 던져 피했고, 통제탑 반대
편에 몸을 피해 있던 중앙통제관은 난사가
끝나고 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사태
수습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20분 사이에
119 신고와 구급 조치까지 취해졌지만,
피해자 2명은 끝내 목숨을 잃었다.
한편 육군은 14일 오후 사건이 일어난 예
비군 사격장의 모습을 공개했다. 최씨가
총을 난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1사로
총기 거치대 부분에는 검붉은 피가 고여
있었다. 숨진 윤모(24)씨가 쓰러진 부사수
자리 앞에는 주인을 잃은 방탄 헬멧과 벗겨
진 군화 한 쌍이 놓여 있었다. 52사단 관계
자는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자행한 살인의
현장이다.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없다”고
말했다.
▶2012년‘바이올린 명장’
재일 한국인 진창현씨 별세
끝내 한국국적 지킨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바이올린 제작 명인)’
일본서 막노동하며 독학… 정경화·아이작 스턴도 애용, 2008년 日교과서에 실려
일본서 막노동하며 독학… 정경화·아이작
스턴도 애용, 2008년 日교과서에 실려
바이올린 제작의 세계적 명인인 재일 한국인 진창현(83)씨가 지난 13일 일본 도쿄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진씨는 인력거를 끌고 토목 인부 등으로 고학하며 메이지(明治)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영어 교사가 되려 했지만 재일 한국인이란 이유로 차별을 받아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방황하던 그는 우연히 한 강연에서 “20세기 최첨단 기술로도 300년 전 바이올린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자극받아 바이올린 제작 외길을 걷기 시작했다.
재일 한국인이란 이유로 제자로 받아주는 스승이 없어 막노동을 하며 귀동냥과 독학으로 바이올린 제작 기법을 익혔다. 돈이 없어 건설 현장 폐자재로 바이올린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당시 일본의 3대 바이올린 연주자로 꼽히던 시노자키(篠崎弘嗣)가 사용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安益泰) 선생도 일본에 연주여행을 올 경우, 진씨의 집에서 머무는 등 교분을 맺었다.
고인은 1976년 제2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부문 중 5개 부문 금메달을 받았으며, 1984년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감독 및 검사 없이 바이올린을 제작할 수 있다는 ‘마스터 메이커’ 칭호를 획득했다.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는 세계에 5명밖에 없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불렸다. 정경화와 강동석, 아이작 스턴, 헨리크 셰링 같은 세계적 명연주자도 그의 바이올린을 애용했다.
하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 후 고향인 김천을 방문했다고 간첩혐의로 조사받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진씨는 끊임없이 국적 변경을 권유받았지만, “귀화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한국 국적을 지켰다. 그는 자식들에게 “너는 재일 한국인이다”라는 점을 계속 주지시켰을 정도로 조국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그는 “당신의 바이올린은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내느냐”고 일본 사람들이 물으면 “고추와 마늘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 바이올린 소리는 재일교포로서 타국에서 겪은 설움과 고통, 절망의 벽을 뚫고 살아내야만 했기에 낼 수 있었던 소리”라고 했다.
▶2012년애국지사 태윤기 변호사 별세
애국지사이자 법조계 원로인 태윤기(太倫基·94) 변호사가 13일 오후 9시 57분 별세했다. 함남 풍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나와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특별간부훈련반을 수료했다. 1945년 한미합작 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서 교육을 받은 뒤 국내정진군 함경도반 1조에 배속돼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1955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군사독재시절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진보당 사건, 10·26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을 맡았다.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임위원,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 한국광복군동지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건국훈장 애족장과 충무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2006년'한국의 햄릿'으로 불린 배우
김동원씨 별세
▶2001년인기 댄스그룹
H.O.T. 사실상 해체
인기 댄스그룹 H.O.T. 가 멤버 가운데 세 명이 그룹을 탈퇴, 사실상 해체됐다. H.O.T. 멤버인 토니안(안승호), 이재원, 장우혁은 2001년 5월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이 끝나 5월 11일 ‘예전미디어’와 전속계약을 맺었다”면서 “팬들과 함께 영원히 H.O.T. 로 활동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로써 H.O.T. 멤버는 강타, 문희준 2명만 남게 됐으며, H.O.T. 는 1996년 9월 데뷔 이후 4년 8개월 만에 사실상 해체됐다.
H.O.T. 의 해체는 그동안 재계약을 둘러싼 잡음이 커지고 강타와 문희준이 솔로 데뷔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소문만이 무성했으나 이날의 발표로 해체가 사실임이 확인됐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10대 여학생 300여명이 서울 청담동에 있는 SM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 몰려가 도로를 점거한 채 ‘H.O.T 해체 반대’를 외치며 3시간 동안 항의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H.O.T.의 남은 멤버 강타와 문희준도 6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8월과 10월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에서 각각 솔로 앨범을 낸다”고 발표함으로 이들의 재결합에 대한 일각의 기대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H.O.T가 이어지길 간절히 원했고, 지금도 원한다“며 “그러나 재계약은 SM과 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1년이탈리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야당 승리
▶1997년북한 두가족 서해로 귀순
북한 주민 두 가족 14명이 어선을 이용해 북한을 탈출 1997년 5월 13일 새벽 3시36분 인천항을 통해 귀순했다. 국방부는 이들이 평안북도 신의주를 출발 선박을 타고 남하하다 12일 오후 4시30분쯤 서해안 백령도 서남방 5.7마일 해상에서 표류중 초계중인 우리 해군에 의해 발견돼 13일 새벽 인천항으로 들어왔다고 발표했다. 북한 주민들이 배를 이용해 북한을 탈출 우리측에 바로 귀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귀순자들은 이 배의 선장인 안선국(49)씨 가족 6명과 기관장 김원형(57)씨 가족 8명이며 성인 남자 5명, 성인 여자 5명과 아이들 4명이다. 이들은 안씨 가족이 먼저 지난 5월 9일 오전 선박을 이용해 신의주를 출발 압록강을 타고 내려와 5월 11일 오후 평북 철산군 통천리 부두에서 김씨 가족과 합류했고, 이들이 타고 온 배는 32t 목조어선으로 귀순을 숨기기 위해 중국 어선군에 섞여 남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선박을 이용해 우리나라로 직접 귀순한 첫 `보트피플`로 꼽히게 됐다.
▶1994년헬륨원소보다 2.5배 무거운
`헬륨10` 세계 최초 발견
일본 이화학 연구소는 질량이 통상적인 헬륨원소의 2.5배로 헬륨의 동위원소로는 가장 무거운 헬륨10 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1994년 5월 13일 발표했다.
이 헬륨의 원자핵은 + 전기의 양자 2개와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 8개로 구성돼 있다. 보통의 원자핵과 달리 헬륨10은 중성자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은 것이 특징이다. 자연계에는 헬륨4, 극미량의 헬륨3이 대기 등에 존재하고 있으며 인공 동위원소로 헬륨6과 헬륨8이 발견돼 있다.
우주에 있는 항성의 수명이 다하면 초신성 폭발을 일으켜 중성자성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중성자성의 지각 부분에는 양자가 약간 남아 있어 헬륨10 과 같은 구성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돼 왔었다. 연구팀은 헬륨10의 수명은 1조분의 1초를 다시 1억분의 1정도로 쪼갠 만큼 짧다고 밝혔다.
▶1994년이스라엘, 요르단강 서안의
중심지 예리코시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정식이양
▶1993년독일, 1955년 연방군창설이래
처음으로 유엔소말리아전후복구작전에
파병개시
▶1993년일본 사회당, 사회주의노선
포기하고 한국정부의 미-일 안보조약
인정하는 획기적 내용의 당강령개정초안
마련
▶1993년간첩활동으로 수감 중인
황인욱씨, 다른 조직원을 통해 비밀문건을
밀반출하려다 적발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으로 구속된 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비판하고 자신의 간첩활동을 참회하는 장문의 반성문을 제출했던 황인욱씨가 영등포 교도소에서 풀려나는 조직원을 통해 안기부의 수사기밀 등을 담은 비밀문건을 밀반출하려다 적발됐다.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 중인 황씨가 1993년 5월 13일 밤 10시쯤 함께 수감 생활을 하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석방되는 조직원 황한석씨(27)의 항문 속에 비밀문건을 넣어 몰래 반출하려다 출감 절차과정에서 적발됐다. 이 문건에는 황씨가 작년 안기부 수사 당시 신문 과정에서 알게된 간첩수사 방법을 비롯, 수사 당국에 적발되지 않은 조직원들에 대한 지령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주요 사건 관련자 7~8명을 거명, 안기부가 내사중이라며 행동에 조심하라는 경고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황씨는 1987년 서울대 대자보 사건으로 2년 간 복역한 뒤 자신의 형인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에게 포섭돼 중부지역당의 편집국장을 맡는 등 핵심요원으로 활동하다 구속 기소됐다.
▶1990년`5.9사태` 배후혐의로
김근태씨 검거
▶1988년행정개혁위원회 발족
▶1988년가락동농수산물시장 개장
▶1987년이재형 국회의장 피선
▶1985년12대 국회 개원
▶1983년정부 수도권정비 기본계획
시안 공개
▶1981년교황 바오로2세 총격받고 부상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1년 5월 13일 베드로 광장에서 터키출신 극우 테러리스트 메흐멧 알리 아자가 쏜 2발의 총격을 받고 부상했다. 교황은 5시간 반의 긴급수술을 받고 회복됐다
아자는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됐다. 그는 기독교 세계를 저주하는 회교 광신도적 정신상태에서 범행을 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사건은 테러리즘과 황폐한 현대문명에 대한 경종이 되었다. 아자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후 교황이 그를 방문, 용서해 주었다.
▶1979년이란 혁명 최고재판소
전 팔레비 국왕에 사형선고
▶1975년긴급조치 9호 선포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9호` 일명 긴급조치9호를 1975년 5월 13일 선포했다. 이는 앞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겪을 시련을 의미했다.
4월 17일 크메르가 공산 게릴라에 항복하고, 4월 30일 월남이 공산화되자 박 정권은 고조된 안보 위기의식에 편승,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긴급조치9호를 선포, 5년7개월에 걸쳐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긴급조치9호는 헌법 비방이나 반대, 유언비어 유포, 허가없는 학생시위ㆍ집회 금지 등을 주요 골자로 이전의 긴급조치1호에서7호까지의 내용을 거의 포괄하고 있었다.
긴급조치9호가 시행됨으로써 한국사회는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비상체제로 진입했다. 박 정권은 반정부활동을 언론이 보도하거나 전파하는 일까지 금지했고 조치 위반자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ㆍ구금할 수 있게 했으며 이 조치를 비방하는 행위 역시 1년 이상의 징역형에 10년 이상의 자격정지가 부과됐다.
긴급조치9호 발동 후 그 강압적인 기세에 눌려 반정부운동이 잠시 잠잠지는 듯 했으나 같은 해 5월 22일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주동으로 시작된 학생시위를 기점으로 민주 인사들의 ‘민주구국선언’ 등을 통해 다시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다.
결국 긴급조치9호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같은 해 12월 8일 0시를 기해 해제됨으로써 끝이 났다. 5년7개월간에 걸쳐 시행된 이 조치로 1천20명이 연루됐고 이 가운데 5백30명이 구속됐다.
▶1972년일본 오사카서
백화점 화재 118명 사망
▶1971년통혁당 재건기도
간첩단 11명 검거
▶1970년정경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협연
▶1965년동부 파키스탄에 태풍
12,000여명 사망, 이재민 10만
▶1964년시경 경향신문
편집국장등 7명 구속
▶1961년민자통 주최 남북학생회담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
▶1958년알제리 시민들 완전독립을
요구하며 프랑스 정청 습격
▶1954년미국 수폭실험 완료 발표
▶1940년근대 헬리곱터 원조인
시콜스키 VS300 첫 비행 성공
▶1930년일본 소설가
다야마 가타이 사망
▶1930년 ‘북극 탐험가’이자
‘난민 인권 외교관’ 난센 사망
1909년에 피어리가 북극점을 처음 정복했지만 북극 문을 처음 두드린 사람은 `진짜 바이킹`이라 불린 노르웨이 탐험가 프리드티오프 난센이었다. 난센은 불굴의 탐험가로 또 외교관으로 `최초`를 개척한 사람이다. 1888년에 52일간 썰매를 타고 세계 처음으로 그린란드를 동서로 가로지른 것도 난센이었다.
난센이 오랫동안 꿈꿔온 북극 탐험에 나선 것은 1893년 6월, 유빙(流氷)에 대비해 배도 자신이 직접 설계했다. 3년 만에 만들어진 배 이름은 ‘프람(Fram)호’, ‘전진’이라는 뜻이었다. 난센은 북동쪽으로 배를 몰았다.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긴 1895년 3월, 1년 9개월 만에 북위 84° 4′, 동경102° 27′ 지점에 내린 난센은 요한센 만을 대동한 채 개썰매와 카약을 번갈아 타며 인류사상 최초로 북극점을 향해 달렸다.
1895년 4월 8일, 그때까지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가장 북쪽 지점인 86° 14′까지 전진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하루 30km 속도로 달려왔는데도 1주일 전보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달리고 있던 얼음이 서서히 남쪽으로 흐른 탓이었다. 결국 북극점을 포기하고 발길을 되돌린 두 사람은 1년여를 인근 섬에서 지내던 중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영국 탐험대의 배를 만나 구조됐다.
1896년 8월,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노르웨이의 영웅이었다. 탐험가의 길을 접은 후에는 난민(難民)을 위한 인권 외교관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1차대전후 러시아에 수감된 43만명의 독일군 포로를 풀려나게 했으며 난민 신분증명서인 `난센여권`을 처음 창안, 동유럽에서 방랑하는 러시아 난민을 도왔다. 이 공로로 19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30년 5월 13일 사망했다.
난센의 노벨평화상 수상
1918년에는 국제연맹의 노르웨이 대표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시베리아에 수용되어 있는 포로의 본국 송환·난민 구제 등에 힘썼으며, 1921∼1923년 러시아 적십자 기근 구제사업의 총관리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평화 사업에 공헌한 업적으로 19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27년에는 국제연맹 군축위원회의 노르웨이 대표가 되었다.
난센증명서, 난센여권 [ Nansen passport ]
1921년 8월에 국제연맹에서 제1차 세계대전 후 발생한 '유럽에 있는 러시아 난민의 문제에 관하여 국제연맹을 대표하는 고등판무관’(러시아 난민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된 난센(Fridtjof Nansen, 1861~1930)이 러시아 난민을 위해 각국 정부에 발급을 요청한 여권을 대신한 여행증명서이다. '난센여권’([영어] Nansen passport)이라고도 한다. 러시아ㆍ아르메니아 난민을 대상으로 1933년에 체결된 국제난민지위조약에서는 체약국은 난센증명서의 발급에 동의하였다. 1951년의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서 여행증명서(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28조)는 난센 증명서에 기원을 갖는다.
난센국제난민사무국 [ Nansen International Office for Refugees , ─國際難民事務局 ]
노르웨이의 북극 탐험가이자 해양학자·동물학자·외교관·인도주의자인 난센(Fridtjof Nansen)이 제1차 세계대전 후 43만 명에 달하는 전쟁포로를 소련으로부터 송환하고, 이후에도 기아에 허덕이는 러시아에 대한 구제사업 등 활발한 난민 구호사업을 펼치다 1930년 사망하자, 그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1931년 창설한 국제적인 봉사·구호단체다.
이 단체는 창설되면서부터 난센의 난민 구호·구제사업을 계속 전개하였는데, 1917년에는 러시아혁명 때 국외로 망명한 백계(白系) 러시아인(人)과 터키 출신의 아르메니아인들을 수용하고, 후에는 독일 출신의 유대인들까지 보살피는 등 난민 구제사업에 힘썼다.
특히 정치적인 이유로 전세계를 유랑하며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천 명의 난민들을 구호하는 데 주력해, 1938년 정치가 지향해야 할 더 높은 행동목표를 제시하고, 인류의 가슴에 인간의 권리와 고귀함에 대한 인식을 일깨웠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본부는 스위스 주네브에 있다.
난센 여권
▶1926년 조선박람회 열림
▶1918년 세계최초의 항공우편 우표,
미국에서 발매
세계최초의 항공우편 우표는 이탈리아? 미국?
세계 최초의 항공 우편은 1859년 미국의 존 와이즈의 기구 주피터 호(Jupiter)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또 본격적인 항공 우편은 11년 뒤인 1870년 9월 23일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프로시아군에 포위된 파리에서 기구로 사람과 우편물을 수송한 것에 기원하며 4개월 동안에 250만 통을 수송했습니다.
하지만 기구가 아닌 항공기를 이용한 최초의 항공 우편은 지난 1911년 2월 18일 인도에서 실시되었습니다. 또 항공기를 이용한 본격적인 항공 우편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 5월 9일 미국의 우정국이 시카고-뉴욕간에 실시한 것이 효시라고 보는 정설입니다.
* 또 다른 기사
항공 수송수단으로 체송할 때 사용하기 위한 우표로서 이태리에서 1917년 5월에 로마에서 토리노까지 최초 비행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것이 세계 최초의 항공우표입니다.
항공우표가 없는 경우에는 다른 종류의 우표에 가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1914년 미국의 복싱 선수
조 루이스 출생
▶1913년 도산 안창호 주도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창립
1913년 5월 13일, 흥사단(興士團)이 도산 안창호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됐다.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민족부흥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창립 취지였다.
도산 안창호
일제하에서 인격수양과 실력양성을 강조하다 보니 ‘싸움을 회피하는 준비론’이라는 비판론도 제기됐지만 흥사단은 언제나 있어야 할 곳을 묵묵히 지켰다. 3·1운동 후에는 상하이에 원동위원부를 조직,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고, 서울과 평양에는 수양동맹회(1922년)와 동우구락부(1923년)를 결성, 국내에서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두 단체는 이후 수양동우회(1925년)로 통합됐다가 다시 동우회(1929년)로 개칭됐으나 1937년에 불어닥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명의 회원이 검거·투옥돼 강제해산되는 비운을 겪었다. 광복 후에는 본부를 국내로 이전했고 1969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07년 스웨덴 보통선거 실시
▶1906년 소설가 현민 유진오 출생
▶1905년 인도의 대통령(1974-1977)
아메드 출생
▶1902년 원산에 협무회사 설립
▶ 1882년 입체파 발전에 공헌한 프랑스의 화가 브라크 출생
▶ 1857년 온들(Oundle) 학교를 재조직한 영국의 교육학자 샌더슨 출생
▶ 1856년 사진미학의 이론을 정립한 영국의 사진가 에머슨 출생
▶ 1832년 프랑스의 동물학자 퀴비에 사망
▶ 1762년 영조, 사도세자 뒤주에 감금
사도세자사건[ 思悼世子事件 ]
1762년(영조 38) 5월 사도세자가 부왕인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질식사한 사건. 임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애 임오옥(壬午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노소당인(老少黨人)들의 정쟁(政爭) 과정에서 노론에 의해 세자가 희생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조선 후기의 당쟁은 탕평책이 추진되는 속에서도 보다 심각한 국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영조는 진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게는 소생이 없었고 영빈이씨 소생으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가 있었다. 효장세자가 요절하였으므로, 영조는 1749년에 사도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하게 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까지는 영조와 성격상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효심과 우애심이 두터웠고, 왕세자로서의 도량과 덕을 겸비하여 영조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리청정에 임하게 되면서 세자는 행동에 형평을 잃고, 비정상적인 성격이 나타나 영조로 하여금 세자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하였다.
이보다 부자간의 대립 관계가 표면화된 것은 영조가 병석에 있을 때 신하들이 세자에게 약을 권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절한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영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少論)의 영수였던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받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된 때부터이다.
1761년 세자는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 순행하고 돌아오자 윤재겸(尹在謙) 등이 상소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영조가 세자를 참살한 또 다른 계기는 1762년 5월에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고발하는 나경언(羅景彦)의 무고 사건과 문소의(文昭儀) 등의 부자간의 이간책 등이 작용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 세자와 영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영조가 뒤에 이를 후회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으로 보아 사건의 계기가 된 부자간의 불신과 이간은 노소론의 당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남인·소론 등이 부왕 영조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세자를 앞세워 보수적인 성격이 짙은 노론 정권의 전복을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1618년 선조때 정치가 백사 이항복,
유배지 북청서 사망
이덕형과 함께 ‘오성과 한음’ 으로 널리 알려진 백사 이항복이 1618년 5월 13일 유배지 북청서 향년 64년의 나이로 별세했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선조를 의주까지 수행하면서 왕조의 위기를 넘긴 충신이었다. 그는 당시 관료사회에 만연했던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초연했을 뿐만 아니라 재정·회계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 나라의 어려운 살림을 잘 꾸려 나갔다.
백사 이항복
임진왜란 때는 장인인 도원수 권율 장군을 거느리고 병조판서의 소임을 훌륭하게 해내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백사 이항복의 진면목은 환갑을 넘어 중풍으로 쓰러져 누운 몸으로 임금(광해군)에게 패륜의 잘못을 직언, 젊은 후학들에게 용기와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1617년 폐모론이 제기됐을 때, 그는 병석을 털고 일어나 비장하게 임금의 패덕을 비판하고 폐비의 불가함을 지적하고 나섰다. 반신불수로 쓰러져 누워있는 이항복의 상소문…, 상소 내용이 알려지면서 백관들 사이에는 다시 동요가 일었고, 폐모론에 반대하는 신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폐모론의 주동자이자 권력의 핵심들은 재빨리 3사의 언관들을 동원하여 이항복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결국 이항복은 유배형을 받았고 유배지인 북청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https://youtu.be/7QILiu6aNAM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위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