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지금까지 오랫동안 즐겨 찾던 곳, 자칭 불암산 생태계의 보고라고
여겨왔던 곳이 공원 개발의 명분으로 완전히 땅속으로 묻혀버렸다.
얼마 전에 찾아가 파해쳐진 모습을 보고 가슴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허전함을 느꼈었다.
마음에 아끼던 집을 잃었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이젠 어디를 가서 그 많은 꽃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들과 더불어 살던 수많은 생명들의 모습을 어이 볼 수 있을까?
내 마음 갈 곳을 잃었어라.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예 살기가 좋으니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방세계 먼 곳에서 찾아와
모여 살게 되었던가
조개나물, 현호색, 토종할미꽃, 애기풀꽃, 장대나물,
솜방망이꽃, 각시붓꽃, 수영, 가락지나물, 외대으아리,
토종패랭이꽃, 하고초, 산해박, 광대싸리, 전동싸리,
솔나물꽃, 타래난초, 좀꿩의다리, 며느리밑씻개, 그령,
무릇, 짚신나물, 쥐손이풀, 이질풀, 꽃향유, 선밀나물,
옹굿나물, 층층잔대, 오이풀, 벼룩아재비,...............
아, 정든 얼굴들
얼마나 많았던가
헬 수가 없구나
쉽게 만날 수 없는 귀한 생태의 보고였는데.............
하나,
어느 날부터 흑구름 덮이고
한순간에 파헤쳐지고
귀한 생명들 그 장구한 사연들 깊이 묻혔어라
철 따라 사랑방처럼 자주 들러
그 얼굴들 바라보고
곤충들 새들 사는 모습 살폈는데
마음 갈 곳 잃었어라
사람의 욕은 도도하여
마구잡이로 天緣을 끊어놓고
그 규모 실로 막대히 쌓이니 문득
급박한 緣起의 소용돌이 두려워라
이제 어이 해야 하는가
내 마음 갈 곳을 잃었어라
茫然自失한 겁먹은 눈망울
거처를 잃은 딱새가 운다
글, 사진 / 최운향. 2024. 3.
■ 불암산 생태의 보고 이렇게 사라지다
▼ 2006년 모습. 밤꽃이 필 무렵이었다.
▼ 2023년 늦가을 모습
▼ 2024년 3월 6일 파헤쳐진 모습. 서울형 숲길을 조성한단다.
■ 그리운 얼굴들
이곳에는 어림잡아 100여 종 이상의 식생들이 살고 있었다.
하나 이젠 완전히 사라지고 산철쭉 동산이 될 것 같다.
그간 담아두었던 모습들 중 일부를 그려본다.
이 중에는 희귀종도 있다.
▼ 세잎양지꽃과 털보등에
▼ 솜방망이꽃
▼ 선밀나물
▼ 꿩의밥과 토종 할미꽃
▼ 붓꽃
▼ 애기풀꽃
▼ 솔나물꽃
▼ 깊은 사랑에 빠진 부전나비
▼ 애기붓꽃
▼ 타래난초
▼ 좀 꿩의다리
▼ 무릇과 짚신나물
▼ 산해박 / 꽃잎이 없는 꽃이다.
▼ 옹굿나물과 무릇
▼ 토종 패랭이꽃과 멍석딸기
▼ 하고초
▼ 엉겅퀴
▼ 층층잔대
▼ 수영
▼ 외대으아리
▼ 오이풀
■ 옛 추억 하나
으아리꽃(외대으아리) 모습이 소박하고 소복을 입은 여인을 연상케 한다.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고결함'이다.
으아리꽃
6월이 왔다.
호화로운 계절 5월 내내
문 닫아걸고 은거하던 여인, 으아리
비로소 방문 고리 풀고 나와 먼 하늘 본다.
여전한 소복차림
이슬 맺힌 두 눈
싸리문 밖 에워싼 극성스런 멍석딸기 넝쿨 너머
그령풀숲 저만큼 핀 패랭이꽃을 유심히 살핀다.
폭염이 계속되건만
오히려 불꽃을 피우고 주홍부전나비와 놀아나는 금계국
쥐똥나무 꿀 빨며 사랑을 속삭이는 배추흰나비
개망초 꽃 속에 숨어 달콤한 꿀 마다하고 육식하겠다는 거미
고삼 대롱꽃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라 식량자루를 채우려는 꿀벌
참나무 새순 진을 빠는 진딧물 똥구멍을 핥는 장구개미
누군가에 밟혀 꽁무니가 터져 죽어가는 불운한 암사슴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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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 향기 산자락 넘쳐흐르건만
그 모든 걸 그러려니 체념(諦念)하고
소복 자락 누렇게 바래도록
오로지 기다린다.
가냘픈 몸매
피로에 지치고 떨다가
끝내 못 견디고 방으로 들어
다시 문고리 잠그고
깊은 잠에 빠진다.
저 아랫동네 모퉁이 돌아
들려오는 사물 패 가락
먼 이국 어사모(御史帽) 쓰고
어성초 피었는데..............
글(2013.6.16), 사진/ 최 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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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최운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