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안견(1418~?)
본관은 지곡(池谷). 자는 가도(可度)·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주경(朱耕).
1400년경을 전후하여 태어나 세종 시대에 활동하고 세조 연간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화원으로 종6품 선화(善畵)를 거쳐 정4품 호군(護軍)에 올랐다.
1442년 안평 대군(安平大君)초상을 비롯하여〈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1443)·〈팔준도八駿圖〉(1446),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대소가의장도 大小駕儀仗圖〉(1448)·〈동궁의장도 東宮儀仗圖〉(1448) 등을
그려 세종 시대 화단의 제일인자로 활약했다.
사람됨이 총민하고 정박(精博)했으며, 안평대군의 후원으로 옛 그림들을 많이 보면서 그 요체와 여러 대가들
의 좋은 점을 취하고 절충해 자신의 화풍을 이룩했다. 인물·화훼·매죽(梅竹)·노안(蘆雁)·누각(樓閣)·경작(耕作)·
말[馬]·해청(海靑) 등을 잘 그렸으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려 당시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에 소장되어 있는 〈몽유도원도〉만이 확실한 진작으로전하고있으며,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사시팔경도 四時八景圖〉 등은 전칭작으로 알려져 있다.이 그림들은 북송대의 이곽파(李郭派) 화풍을 토대로 하고 있는데, 경물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구도적 특색을 비롯하여
공간개념과 필법 등에서 한국적인 특징을 짙게 띠고 있다.
이러한 화풍은 당시 많은 화가들이 추종하여 조선 초기의 대표적 화파인 안견파를 형성시켰으며, 석경(石敬)·정세광(鄭世光)·신사임당(申師任堂)·이상좌(李上佐)·이불해(李不害)·강효동(姜孝同)·김제(金褆)·이정근(李正根)·이흥효(李興孝)·이정(李楨)·이징(李澄)·김명국(金明國)·이성길(李成吉) 등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의 화가들에게까지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한 슈우분[周文] 등을 통해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수묵산수화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정선(1676~1759)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난곡(蘭谷)·겸재(謙齋).
호조참판에 추증된 시익(時翊)의 맏아들로 한성 북부 순화방(順化坊)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3대에
걸쳐 현관(顯官)을 배출하지 못해 몹시 가난했으나 성품이 온화하고 부모에게 효도했으며 남과 사귐에
결코 화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등 점잖은 군자적 풍모를 지녔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어려운 생계를 돕기 위해 이웃에 살던 대신 김창집(金昌集)에게
청하여 그의 권고와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가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세자를 보위하는
위수(衛率)를 비롯하여 한성부주부·하양현감·청하현감·훈련도감낭청·양천현령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는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화명을 통해 당대의 명류들과 교유했으며, 이병연(李秉淵)·조영석(趙榮祏)·유척기(兪拓基) 등의
노론계 인사들과는 백악산(白岳山:북악산) 밑에 이웃해 살면서 평생지기로 절친하게 지냈다. 말년까지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현재 전하는 작품들은
친자연적(親自然的) 초속의식(超俗意識)과 풍류의식에 기초한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정형산수와 산수인물
및 진경산수화가 대종을 이루는데, 특히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진경산수화에서는 현실감넘치는독
창적인 화풍을 완성하고 성행시킴으로써 한국적 회화 발전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전국의 명승지를 탐승하면서 우리의 국토미와 그 특색을 파악하기 위해 무덤을 이룰 만큼 많은 붓이
닳도록 사생을 하며동 국진경(東國眞景)을 대성시킨 그는 자기집 주변의 서울 사철경관과 명승·명소를
비롯하여 금강산과 지방 수령으로 임했던 지역 주변의 풍경들을 즐겨 그렸다. 인왕산과 백악산 등의
바위덩이를 표현하기 위해 넓적한 붓으로 짙은 먹을 여러 번 칠하는 적묵법(積墨法)을 개발하고, 금강산의
개골암 등을 나타내기 위해 예리한 각필(角筆)의 수직준(垂直皴)을 창안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절파화풍(浙派畵風)의 수묵법과 새로운 남종화법을 음양의 원리에 융합시킨 독특한
필묵법과 함께 대상의 특색 포착을 통한 인상주의적 감각에 의해 형성된 강렬한 바위주름법과 편필(便筆)
의 소나무 묘법, 부감법의 대각선 구도 등으로 생동감 넘치는 화법을 창출함으로써 중국 산수화풍의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온 한국회화사에 일대 변화를 주었으며, 조선 후기 화단에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그의 이러한 진경산수화풍은 실경사생의 모범이 되어 당대화가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화가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정황(鄭榥)·장시흥(張始興)·정충엽(鄭忠燁)·
김응환(金應煥)·김석신(金錫臣) 등으로 정선파 라 불린다(→ 색인 : 정선파).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금강전도 金剛全圖〉·〈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호암미술관)를 비롯하여 〈청풍계도
淸風溪圖〉·〈인곡유거도 仁谷幽居圖〉·〈경교명승첩 京橋名勝帖〉·〈해악전신첩 海岳傳神帖〉(간송미술관)·
〈정양사도 正陽寺圖〉(국립중앙박물관)·〈만폭동도 萬瀑洞圖〉(서울대학교 박물관)·〈육상묘도〉·
〈연강임술첩 漣江壬戌帖〉(개인 소장) 등이 있다.
3.김홍도(1745~?)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김해.자는사능(士能),호는단원(檀園)·서호(西湖)·취화사(醉畵士)·고면거사(高眠居士)·첩취옹(輒醉翁)·
단구(丹邱).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손자인 석무(錫武)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원 집안인 외가로부터
천부적 재질을 물려받은 듯하다. 어려서는 경기도 안산에 칩거중이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이며 이론가인
강세황(姜世晃)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20대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으며, 28세 때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했다. 1777년 별제(別提)로
있으면서 강희언(姜熙彦)·김응환(金應換)·신한평(申漢枰)·이인문(李寅文) 등과 함께 그림 제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1781년에는 한종유(韓宗裕)·신한평 등과 함께 정조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 도사(圖寫)의 동참화사로
활약하고 그 공으로 경상도 안동 부근 안기(安奇)역의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무렵부터 명(明)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했다.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고 그곳의 명승지를 수십 장(丈)이나
되는 긴 두루마리에 그려 바쳤다. 1791년에 다시 어용화사로 선발되어 정조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그해 겨울 충청북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 정월까지 봉직했다.
현감 퇴임 후의 만년에는 지방의 권농(勸農)을 지내기도 했는데,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 속에서
여생을 마쳤다. 1810년경을 전후하여 타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4.장승업(1843~1897)
본관은 대원(大元). 자는 경유(景猷), 호는 오원(吾園)·취명거사(醉瞑居士)·문수산인(文峀山人). 선세(先世)가
무반(武班)이었으나 어려서 머슴살이를 했다고 한다. 서울에 정착한 후 수표교에 살던 이응헌(李應憲) 또는
역관 출신의 변원규(卞元奎)로 알려진 사람의 집에 기식하게 되면서 어깨너머로 글공부와 원(元)·명(明)
이래의 명적들을 접하고 스스로 익혀 어느날 문득 화리(畵理)를 터득하고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화명은 날로 높아져 왕실에서는 그를 대령화원(待令畵員)으로 불러들여 그림병풍을 제작하게
했으며, 이때 감찰이라는 정6품 관직을 임시로 제수받기도 했다.
그러나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했고, 특히 어떤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궁궐에서 3번씩이나
도망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40대 무렵부터는 오경연(吳慶然) 등의 역관 중인계층과 김영(金瑛) 등의
여항문인(閭巷文人)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창작활동을 했으며, 녹청색 창의(彰衣) 차림의 특이한 모습으로
그림 판 돈을 술집에 맡겨놓고 매일 들러 마시면서 취한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이러한 기질은 강렬한 필법과
묵법, 그리고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設彩法)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산수·인물·영모·기명절지(器皿折枝)·사군자 등 여러 분야의 소재를 폭넓게 다루었는데 전반적으로 문기
(文氣) 어린 격조보다는 뛰어난 기량이 돋보인다. 산수에서는 원말4대가(元末四大家)와 청초(淸初)의
4왕오운(四王吳惲) 계통의 각종 남종화풍과 각체의 북종화풍을 함께 소화하여 그렸으며, 중년부터 특유의
기이하고 웅장한 외관, 복잡한 구도와 더불어 점차 북종 원체적인 장식화의 경향을 나타냈다.
인물과 영모에서도 역동적인 구도, 사실적인 묘사와 화려한 설채를 특징으로 했는데 만년으로 갈수록
전문적인 기교를 강조하는 화풍을 보였다. 기명절지에서는 청말의 조지겸(趙之謙)·오창석(吳昌碩) 등의
화풍과 근대감각이 깃든 음영법을 수용했다. 한편 선지(宣紙) 사용법의 보급과 함께 이에 적합한 부드럽고
긴 양털붓 기법을 개발하여 전파했다.
그의 이러한 작품세계와 화풍 등은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이도영(李道榮) 등에게 계승되어 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전통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삼인문년도 三人問
年圖〉·〈산수도〉·〈귀거래도〉와 호암미술관 소장의 〈노안도 蘆雁圖〉·〈호취도 豪鷲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