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이 돌아가셨다 라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순간이 언제든 닥칠 일이었으나 그래도 늘 투병 생활 속에서도 여유로웠던
시인을 생각하면 당장의 일이 아닌 아주 먼 이야기 같았다.
시인과의 인연은 오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직이 편집장이다보니 숱하게 많은 문화예술인들과의 교류는 늘상이었고
그중에서도 각별히 친하게 지내는 작가 군단은 또 따로 있었다.
신경림 시인과 특별히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시인의 사진촬영을 부탁받고 잠시 만났던 기억 이후로
한참이 지나고 나서 절친 시인들과 왕래를 하며 대학로에서 더러더러 만났던 기억이 전부다.
쥔장보다 저 가까웠던 시인들과의 교집합 속에 잠시 함께 했던 느낌이었다.
워낙 그들이 친한고로 어쩐지 원 바깥으로 밀려난 느낌을 가지면서도
시절 인연으로 노 시인과 함께 하는 자리에 동석하곤 했다.
신경림 시인의 단골 장소이자 애착 맥주를 즐겨 마시던 곳에서
시를 논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자주 대하면서는
시인에 대한 존경과 존중은 깊어갔지만 시인 또한 인간적임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던고로 시인에 대한 물리적, 거리적 애정은 높긴했다.
어쨋거나 그렇게 잦은 만남은 아니었어도 절친 시인이 그래도 챙겨가며 함께 동행했던
사석의 만남은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의 저편에 있었다.
하였어도 투병생활중인 시인을 뵈러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어쩐지 민폐일 것 같았다 라는 핑계 끝에
머뭇거리던 순간 시인은 하늘 여행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얼마 전에 안그래도 절친 시인을 만나서 노 시인의 안부를 묻다가
점점 쇠약해진다는 소식만으로도 둘다 어색한 공기 속에 망연자실이었던 기억도 있다.
아마 그 친구는 지금쯤 병원을 찾지 못했던 것에 대해 뼈아픈 후회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노 시인에게 엄청 사랑을 받았던 또다른 절친 시인은 지금쯤 망연자실 일 터.
세상을 다잃은 그런 상황일 것 같아 연락하기도 미안하다.
암튼 이 세상을 하직하고 저 세상 속으로 기어이 떠나버린
시인의 명복을 빌면서 오늘 다시 한번 시인을 기린다.
길지 않은 만남이었어도 언제나 유쾌함을 선사하셨던
시인의 표정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맥주....상징적으로 기억해본다.
굳이 시인의 삶이나 그가 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지녔던 흔적을 말하지 않아도
그를 흠모하거나 추억하거나 가까이 알았거나 멀리서 바라보았거나
다들 그저 이름 석자라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따로 말할 필요는 없을 듯하여
좋아했던 그의 시어 하나 전해본다.
"가난한 사랑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래는 신경림 시인을 보내드리는 이재무 시인의 글을 옮겨왔다.
고이 잠드소서.🙏😢
弔詩
-신경림 시인의 영전에
이재무(시인)
선생님의 구성진 목소리에는
언제나 낮은 서정의 봄비가 내렸어요.
누구하고나 친구가 되어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던 선생님
못난 사람도 잘난 사람도
한 동네 친구로
시시컬렁한 우스개를 즐길 수 있었지요.
이 땅 밑바닥 인생들을
온몸으로 뜨겁게 사랑하고
높지 않은 목소리로
크게 울림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불의 앞에서는 불꽃이 튀기도 했어요.
이 땅의 산하와 가난한 살림과 선한 사람들을
우리 가락으로 노래하신 선생님
글과 사람됨의 차이가 없이 사시더니
불쑥 우리 곁을 떠나셨군요
선생이 떠난 이곳은
막 여름이 시작되는 계절인데도
마냥 으스스 한기가 몰려옵니다.
선생님이 안 계신 인사동은
마냥 쓸쓸하고
선생님이 안 계신 북한산은
더욱 적막하기만 합니다.
이제 술을 마셔도
노래를 불러도 흥이 나지 않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의 스승, 우리들의 아부지/삼촌이고 친구였던 선생님
선생님이 즐겨 부르던 노래
삼포 가는 길을 읊조리며 목이 메입니다.
첫댓글 뉴스를 못보고 들으니 이 소식도 여기서 듣습니다.
그려~! 아깝고 안타깝네요.
나야 비록 그분의 글속에서만 만나뵈었지만... ㅜㅜ
매우 인간적인 분이셨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을 위해 애쓰시기는 했다요.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