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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가온해
서양의 세계 지배에 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경합 중이다. 하나는 서양의 지배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장기고착’ 이론이다. 다른 하나는 서양과 동양은 비등하거나 혹은 동양이 더 앞서 있었는데 모종의 우연적 이유로 서양이 산업혁명을 먼저 일으켜서 앞서나갈 수 있었다는 ‘단기우연’ 이론이다. 이언 모리스는 그의 책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 이 두 이론을 문제의식의 단초로 삼는다.
이언 모리스 ㅣ 최파일 옮김 ㅣ 글항아리 | 2013 |
그리고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라는 의문이 서양에서, 또 동양에서 폭발했듯이 동양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이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달성하고 조선을 끝내 식민화 해버리자, ‘왜 일본이 지배할 수 있었는가?’에 관한 의문에 한·일 양국의 지식인은 답을 찾고자 했다.
대체로 일본인들은 ‘장기고착론’을, 한국인들은 ‘단기우연론’을 지지했던 것 같다.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는 마르크스 사적 유물론의 영향을 받아 중세 봉건제를 거친 일본이 근대 자본주의로 넘어가기에 훨씬 유리했다는 설명과 함께 조선을 정체된 국가, 실질적인 생활상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은채 지도층 간의 소모적 권력 나눠먹기만 있던 나라라는 묘사가 지배적이었다. 사실 여부는 일단 차치하고, 이는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반면 한국인들은 이런 장기고착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 일본은 한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던, 그러니까 ‘가르침을 받던’ 후진지역이었고, 절대 일본의 우위는 고착된 것이 아니었다. 대신 한국의 많은 사학자들은 조선의 사회적 역동성과 조선 후기의 경제구조의 변화를 찾아내려 애쓰며 조선도 나름의 가능성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즉, 일본은 우연히 페리 제독에 의해 먼저 개항하여 메이지 유신이라는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해서 일찍 근대화를 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 가능성을 원천봉쇄하여 식민지로 전락시킨 것이었고, 이는 고착된 우위가 아니라 그저 단기적인 우연이 작용한 결과일 뿐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이하 ‘책’)는 이 문제에 대하여, 장기고착론을 따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단기우연론은 확실히 배격하는 책이다. 다시말해 막말(幕末: 에도 시대 말기) 유신을 즈음으로 하는 19세기에 일본과 조선이 서로 다른 운명의 갈림길을 걸어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상목 | 뿌리와이파리 | 2017 |
일본과 조선의 갈림길은 최소한 17세기로 소급된다. 당시 일본은 에도 시대(일본 최후의 막부인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잡은 1603년~1868년까지 265년간의 시대)에 거대한 소비도시가 중심이 되어 전국적 물류 네트워크를 갖추고 생산력과 서민문화의 팽창을 경험했다. 특히 이 시기 관의 지배 영역 바깥, 즉 시장을 활용하는 민간의 힘이 급성장해 근대화를 위한 동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는 에도는커녕 오사카에도 비견될 소비 도시도 없었고, 물류 네트워크는 한참 빈약했으며, 국가권력 바깥의 공간은 너무 제한적이어서 민간 영역에서 생산적 에너지가 분출되지 못했다. 17세기~19세기에 축적한 역량의 차이는 서세동점(서구 열강의 동양 진출)의 시기에 서구 세력에 대응하는 역량의 차이로 곧바로 이어졌다. 바로 여기에 ‘왜 일본이 지배하는가’라는 답이 존재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의 나머지는 ‘그래서 대체 그 에도 시대에 축적된 게 뭔데?’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에도 막부가 국가를 안정화하고, 에도(도쿄의 옛 이름)라는 거대한 소비도시를 만들고 상업과 물류 이동이 촉진되고 나타난 결과물들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전통 농업경제보다는 근대화된 도시경제에 익숙한 것이었다.
전투식량인 미소를 확실히 공급하고자 한 노력이 평화의 시대에 소비도시를 만나자 품질 경쟁 및 원가 경쟁으로 이어졌다. 치안이 안정화되고 교통이 편해지자 명소관광이 활발해지고 각지에 숙박업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도시가 낳은 정보에 대한 새로운 수요는 출판문화 붐으로 이어졌고 판권을 보장하고 저작권 단속과 렌탈 서비스가 탄생했으며 신문과 광고지가 등장했다. 민간 교육도 발전했다.
도시경제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고자 한 이들은 민간교육기관인 데라코야(寺子屋: 서민을 위한 실용 기술 위주의 학원 )를 찾았고, 전통적 세계관 너머를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주쿠(塾: 지식인을 위한 이론 위주의 학원)를 찾았다. 서구와의 접촉을 이어온 막부의 정책 덕분에 많은 지식인이 다른 문화권의 더 우수한 지식을 접하면서 일본에 공급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국가적으로 사전을 만들기도 했다.
에도 시대 실용 교육의 산실 역할을 한 사설학당 ‘데라코야’ |
지방정부끼리의 경쟁은 민간 영역의 발전을 더 촉진했는데 다이묘(大名: 넓은 영지를 가진 무사 계급의 봉건 영주)들의 후원 아래에 성장하여 서민층까지 확산되어 다양해진 도자기가 대표적인 예였다. 또한, 도시 경제가 한 번 불을 당긴 소비와 자기 표현에 대한 욕구는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우회하여 활활 타올랐는데, 세 가지 색만 허용하자 수십가지 미묘한 색감의 차이를 찾아낸 일본의 섬유와 의류 산업이 그러했다.
그러나 막부 체제는 이 번영하는 소비 경제를 태동시킬만큼 선진적이었으나 그 발전을 감당하기에는 후진적이었다. 고도로 상업화된 화폐 경제는 전통적 농업에 근간한 지배 세력에게 새로운 도전을 안겨다준 것이다. 대외 무역이 극히 제한된 닫힌 계였던 일본은 화폐의 원천이 되는 귀금속 유출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이는 악폐(惡幣: 귀금속 함유량이 기준보다 낮은 화폐) 발행이라는 악수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국가의 명목상 근간은 쌀이었으나 실질적인 경제 활동은 화폐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괴리가 지배층인 사무라이의 경제적 기반을 계속해서 약화시켰다.
한편 지역의 번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공간을 활용하여 독자적인 화폐를 유통시켰다. 이런 모순들로 말미암아 막부 체제는 아래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경제발전으로 전통의 지배질서가 해체되던 상황에 절묘하게 들어온 외부의 위협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지방의 번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것이 메이지 유신이었다. 에도 시대에 일본이 260여년 간 축적해온 성과는 구질서를 와해시켰고, 신질서는 그 축적의 성과를 바탕으로 근대화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했다.
결과적으로 메이지유신의 서막이 된 ‘대정봉환’. 대정봉환(大政奉還)은 1867년 11월 9일 도쿠가와 막부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는 것을 선언한 정치적 사건이다. (그림 무타 탄료) |
나는 역사를 넓고 크게 보는 것을 좋아한다. 굳이 따지자면 산에 올라가서 경치를 내려다보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경치 속으로 들어가 풍경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져야 과거에 대한 총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평소에 잘 신경쓰지 않던 돋보기식의 미시적 관점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색다른 시각으로 재밌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뭔가 크고 넓게 조망하는 것을 좋아하는 버릇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책 내용을 나만의 관점으로 다시 검토해보고자 한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다. 과연 당시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빚어낸 것은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 그 내용인데 왜 답을 못 찾고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민간, 시장, 상업이 에도 일본의 발전을 이끌던 견인차였다는 내용 아닌가. 그러나 내가 궁금한 것은 ‘그렇다면 왜 조선에서는 민간, 시장, 상업이 발전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의 답이다.
에도 시대 신분을 묘사한 그림. 다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는 법적 신분제는 아니었다 |
조선의 지적 지형은 폐쇄적이었고, 지도층이 근시안적이었으나 일본은 과감하고 실용적이었기에? 책을 읽어보면 그런 뉘앙스가 어느 정도 느껴진다. 아니면 에도라는 거대 도시를 만들고 인프라를 갖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요즘 유행하는 소위 ‘마중물’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참근교대(參勤交代) 와 천하보청(天下普請) 이라는 이에야스의 독특한 아이디어가 모든 것의 시작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책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책의 포커스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단기우연적인 일보다 더 근원적 차이가 양국에는 있었고 그것은 에도 시대로 소급된다’에 맞춰져 있지, ‘무엇이 에도 막부와 조선의 차이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부족하다. 상업이 발달하고 시장에서 기회를 찾는 민간 영역의 팽창은 에도 막부와 조선의 차이 그 자체이지, 차이의 궁극인이 될 수 없다.
제도에서 답을 우선 찾는 것이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각 나라들의 경제적 성과를 가르는 핵심 요인은 제도라고 지적했다. 경제는 포용적 경제제도 하에서 성장할 수 있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구성원들에게 혁신을 하고 경쟁을 고무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점이나 지대추구 행위들이 제약되어야 하며, 재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 최완규 옮김 |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 |
그러면 신규 행위자들과 기존 행위자들이 모두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일일신우일신할 압력을 받을 것이며 이런 포용적 제도 하에서 경제는 계속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신규 행위자들의 진입을 방해하고, 재산권을 무단으로 침해하면 경제활동에 뛰어들고 경쟁과 혁신을 할 인센티브는 사라져 경제는 정체되고 기득권들만 계속 배를 불려갈 것이다. 이런 경제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와 대비되는 착취적 경제제도다.
그러나 경제제도가 전부가 아니다. 경제제도는 정치제도로 뒷받침되고 반대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포용적 경제제도의 핵심 중 하나인 재산권을 보호하려면 법이 자의적으로 행사되면 안 되고, 어느 정도 확실한 치안과 여러 공공재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 국가가 필요함과 동시에, 그 국가 내에서는 다원적 정치질서가 공존해야한다.
바로 이것이 포용적 정치제도다. 반대로 중앙집권이 형해화된 소말리아 같은 곳이나 독재권력이 모든 힘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곳은 착취적 정치제도를 가진 곳이다. 이 제도들은 되먹임 효과를 가진다. 포용적 경제제도 하에서 여러 세력들이 성장하면 다원적 정치질서가 생기기 좋다.
한편 포용적 정치제도가 공공재를 공급하고 재산권과 법치를 보장하면 그 위에서 경쟁과 혁신의 인센티브가 돌아가 포용적 경제제도가 정착한다. 착취적 경제-정치 제도는 정반대의 되먹임 효과를 갖는다. 자의적으로 재산권을 빼앗거나 국가권력이 경제활동의 진입장벽을 치는 곳이라면 다원적인 경제주체의 경쟁은 언감생심이고, 착취적 기득권이 모든 자원을 독점할 것이다. 그러나 다원적 경제주체들이 등장하지 않으면 그 착취적 기득권을 견제할 다원적 정치세력이 등장할 수 없어 악순환이 이어진다.
에도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 포용적 제도가 일본에서 최초로 등장한 시기였다. 막번체제(幕藩體制: 무사계급에 의해 조직된 지배체제)에서는 발전하는 조카마치(城下町: 영주의 거점인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로부터 조세를 자의적으로 수취할 수 없었는데, 후에 쌀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사무라이보다 훨씬 잘 사는 상인들이 등장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민간 영역의 활기를 더욱 북돋아주었고, 도시경제에서 이윤을 향한 인센티브가 제시되니 상업과 제조업이 팽창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등장했으며 숱한 직종들이 더더욱 전문화, 분화될 수 있던 것이다. 책 내용에 나온 섬유와 의류, 신문과 광고지, 출판, 요식업은 모두 이런 도시경제의 발전, 분화, 전문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때 그 근간에는 포용적 경제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조카마치’는 일본에서 센고쿠 시대 이래로 영주의 거점인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로, 성의 방위시설이자 행정도시, 상업도시 역할을 했다. ‘성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뜻 |
그리고 이 포용적 경제제도를 뒷받침 해준 것은 역시 에도의 상대적으로 포용적인 정치제도였다. 포용적 정치제도의 대표격이라고 할만한 명예혁명 이후의 영국과 맞먹는 수준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다원적 정치세력의 존재와 중앙집권을 통한 안정적인 공공재 공급을 에도 막부는 모두 충족하고 있었다. 일본의 정치세력들은 우선 다원적이었다. 각 번이 어느 정도 독자적인 활동공간을 가진 상태에서 에도 막부는 자신의 권력을 절대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대신 그 위에서 펼쳐진 번들의 경쟁은 일본의 경제적 발전을 더더욱 뒷받침 해주었다. 때문에 급속히 발전한 상업으로 인해 막부 통치체제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었을 때도 에도 막부는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에도 도시민들도 술렁였을 것임은 물론이요 내부 교역망으로 재정을 충당하던 숱한 번들이 막부에 단체로 반기를 들 경우 막부 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에도 막부의 권력은 엄청났으나 절대적이지 않았기에 그 사이에 포용적 경제제도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에도 막부의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았으나 엄청났기에 당대 일본은 번영할 수 있었다. 여행이 엄청나게 확대되고 또 십여년에 걸쳐 정교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측량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일본의 치안이 굉장히 안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도카이도 중간에서 산적떼를 만나서 목숨을 잃거나 가진 물건을 모두 털리는 일을 상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는 에도 막부가 막강한 중앙권력을 바탕으로 일본 열도에 통일된 질서를 부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전국시대여서 중요한 도로가 교역로 대신에 군사원정을 위한 전략도로였다면 에도 시대만큼 상업이 발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며 여행은 더더욱 바랄 수 없었을 것이 틀림 없다. 에도 막부의 강력한 힘으로 다이묘들은 기존의 군사적 경쟁을 경제력 경쟁과 소비 경쟁으로 돌릴 수 있었고, 이 안정기 위에서 전국적 물류네트워크의 중심지인 오사카와 소비의 블랙홀인 에도가 만들어질 수 있던 것이다.
반면 조선은 달랐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중앙집권능력이 굉장히 강한 국가였고, 지방에 어떠한 정치적 공간도 남겨두지 않았다. 500년 역사에서 그나마 유의미한 지방세력의 도전이 기껏해야 홍경래의 난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조선의 중앙통치질서가 얼마나 견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너무 일원화 되어 있기에, 조선에서는 다원적인 경제주체들이 등장하는 것이 제약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활발한 상업활동은 돈을 돌게 하고 돈이 돌면 그 돈을 힘으로 전환하려는 이들이 생긴다. 만약 중앙권력이 ‘도전 받지 않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고 있다면 새로운 도전자들의 형성을 차단하기 위해 상업을 억제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포용적 경제제도 하에 민간영역이 발전할 공간 자체가 없었다. 이는 포용적 정치제도로의 전환을 가로막는 악순환이 되었다.
조선 말기는 에도 말기처럼 질서가 와해되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화폐개혁을 마음대로 단행하여 이익을 편취하는 것이 일본의 경제체제에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왔고 막부 체제를 대신할 웅번들이 서남지역에서 꿈틀대던 것과 조선을 비교해보자. 조선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체제를 다시 정비하는 것으로 체제의 위기를 거의 극복했다. 조선이라는 정치체제가 위기를 겪을 때도 그 공백을 파고들 세력도 형성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그 위기가 심원하지 않은 이유는 조선의 착취적 정치제도와 착취적 경제제도의 되먹임에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1820년 12월 21일 ~ 1898년 2월 22일) |
그러나 이런 제도들은 조선 왕조의 유지를 위해서 높은 안정성을 제공해주고 변동성을 최소화해주었을지는 몰라도 근대화라는 거대한 도전을 헤쳐나가는 데는 전혀 도움되지 못했다. 근대화의 대응을 결정한 것이 에도 시대와 조선 시대에 벌어진 축적의 차이에 있다면 그 차이의 원인은 정치제도와 경제제도에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또 다시 의문이 생긴다. ‘왜 에도 막부와 조선의 제도는 차이를 빚은 것일까?’ 이번에야말로 조선 지도층의 무능함이나 이에야스의 과단성 혹은 일본 문화의 우수성 때문일까? 아니면 양반 문신 정권과 사무라이 무가 정권의 차이 때문일까? 이런 질문들에 또 답하지 못한다면 ‘제도가 원인이다’라는 말은 새로운 의문만 만들고 끝낼 일이다.
처음에 시작했던 이언 모리스로 돌아와보자. 나는 여기서 답을 찾아볼 생각이다.
그는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는 서양과 동양의 역사를 사회발전지수라는 도구로 분석한다. 사회발전지수는 자연환경이나 사회집단에 부과할 수 있는 힘의 크기를 뜻한다. 에도 막부와 조선 사이에 빚어진 차이는 결국 사회발전의 차이다. 모리스는 그의 ‘사회발전지수’에서 네 가지 척도를 제시한다.
1800년 경이 되자 에너지 사용량 측면에서도, 최대 도시의 크기에서도, 문해율에서도, 군사력에서도 조선은 모두 열세였다. 누가 이를 측정해서 비교한 적은 없지만 이미 두 국가의 사회발전지수 차이는 상당히 벌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한양 인구 20만과 에도 인구 80만(혹은 100만)의 차이가 사실 모든 걸 입증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모리스는 사회발전의 차이를 빚어내는 원인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렌즈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생물학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 종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개개인은 매우 다르지만 집단으로 볼 때 결국 엇비슷하다. 인간들은 모두 ‘게으르고 겁에 질려 있고 탐욕스러운데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게으름을 이겨내고 탐욕을 채우고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각자의 수많은 행동들이 모여내 알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가 바로 더 많은 에너지 획득, 더 큰 도시의 건설, 더 많은 정보의 유통, 그리고 더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어진다. 생물학은 사회가 왜 발전하는지 알려준다.
둘째는 사회학(사회과학)이다. 사회학은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혹은 퇴보하는지 알려준다. 사회발전은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힘을 만들어내는데, 더 고도화된 사회일수록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더 튼튼한 기반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농업사회가 맬서스 트랩(Malthusian Trap: 맬서스의 인구 이론)으로 한계에 달했을 때는 산업혁명으로 그걸 돌파해내야 했다.
토마스 맬서스 (1766년 2월 14일 ~ 1834년 12월 23일) |
그러지 못한 사회는 고꾸라지고 문명을 박살내는 묵시록의 다섯 기수(인구 이동, 전염병, 기후변화, 국가실패, 기근)이 찾아와 사회발전은 후퇴한다. 마치 달리지 않으면 쓰러지고마는 자전거와 같이, 인간 사회는 늘 이런 도전들에 일상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 그리고 집단 규모에서 인간은 결국 비슷하기에 큰 틀에서 조건이 비슷하면 대체로 해법도 비슷했다.
세번째는 지리학이다. 지리학은 왜 어떤 사회가 더 빠르게 발전하는지를 알려준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유라시아 사회들이 지리적으로 가축화, 작물화하기 좋은 생태계를 갖추고, 대륙의 동서축을 통해 활발한 교류를 할 수 있었기에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사회를 앞질렀다고 주장했다. 식량 생산을 하여 많은 인구를 부양하는 것은 어떤 전통사회에 있어서나 근본적 도전이었지만 지리적 조건의 차이로 어떤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더 유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지리적 우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사회 발전은 인간의 자연환경을 활용하는 능력을 바꾼다. 따라서 사회 발전은 지리의 의미를 바꾼다. 산업혁명 전과 후에 석탄 산지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본디 후진적인 지역에서, 달라진 지리의 의미로 새로운 사회발전의 돌파구가 마련되곤 한다. 이것이 ‘후진성의 역설’이다.
모리스는 이 패턴들이 모여서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에도 막부와 조선은 어땠을까?
우선 에도 막부를 살펴보자. 저자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에서는 에도의 건설과 참근교대제의 도입이 역사의 우연이었다고 말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거대한 소비도시 에도의 등장과 참근교대제와 천하보청을 통한 인프라 구축 및 소비 촉진은 일본이 포용적 경제제도로 나아가는 불씨를 당겼다는 점에서 에도 시대의 번영을 설명하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역사의 우연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필연은 아니다. 그러나 에도와 참근교대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포용적 제도가 수립될 개연성이 굉장히 높았다는 점은 당대 일본의 역사와 지리가 설명해준다. 반대로 착취적 조선의 정치경제 제도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에서 종종 짐작할 수 있듯이, 에도 시대 번영의 근저에는 전국시대의 군사적 경쟁이 있었다. 군사적 경쟁은 일반적으로 혁신을 촉진한다. 전투에서 승리하여 살아남고, 다른 국가를 집어삼켜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더 강한 군사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위해서는 더 탄탄한 경제적 기반이 필요했다.
따라서 플레이어들은 경제를 개발하고 새로운 군사 교리를 채택할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여러 참여자들이 혁신적인 해법을 도입하면 다른 참여자가 곧바로 모방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참여자는 패배하여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사회의 수준은 급속도로 발전한다.
센고쿠 시대(전국 시대)에 조종을 울리고, 에도 시대의 기틀을 세운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도 (에도 시대) |
오다 노부나가가 사실상 모든 걸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일찍부터 상업을 중시하여 서양 세력과 교역을 텄고 철포(조총)를 대거 도입하여 군사적인 우위를 확보해냈다. 이런 혁신으로 말미암아 오다는 일본사에서 신화적인 성취를 이루어냈다. 뒤를 이은 히데요시도 마찬가지의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오다의 혁신은 이전부터 다이묘들 간에 이루어지던 경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 각 다이묘들은 적극적으로 광산을 개발했고 농지를 개간했으며, 더 견고한 성을 짓기 위해 축성술을 발전시켰고 기술자들을 중용했다. 한 세기가 넘는 이런 경쟁의 결과는 임진왜란에서 매우 잘 나타난다. 소위 ‘왜성’이라고 하는 당시 일본군 요새의 견고함이라든가 조선군의 혼을 빼놓은 철포대는 진공에서 나타난 게 아니라 일본인들끼리 서로 살육하여 피로써 배운 성과물들이었다.
임진왜란 직전 나가시노 전투(1575)에서 오다군이 사용한 철포대 |
이런 군사적 경쟁은 이후 에도 시대에 중앙집권적 질서가 어느 정도 부여되자 경제력 경쟁과 소비 경쟁으로 전환되는 것은 앞서 논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리고 군사적 경쟁이 촉진시킨 상업은 평화의 시기에 자체적인 동력을 갖고 날아가기 시작했으며, 당대에 발전한 토목기술은 에도와 같은 거대한 도시를 운영하는 기반시설의 뿌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어째서 지방세력의 경쟁은 커녕 독자적인 자립도 용인하지 않았던 조선과 달리 일본에서는 이렇게 활발한 내전이 펼쳐질 수 있던 것일까?
그 답은 일본의 지리에 있다. 코네티컷 대학의 생물학자 겸 역사연구가인 피터 터친은 변경(邊境: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 땅)의 존재가 구성원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준다고 주장했다. 변경에서 이질적인 문화집단과 마주치면 내부 분열은 억제되고, 그대신 응집력 있는 구심점이 생긴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은 에미시가 9세기 야마토 정권에 최종적으로 흡수되고, 13세기 여몽연합군의 침공이 좌절된 이후 변경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피터 터친 | 윤길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 |
따라서 응집력 있는 중앙권력이 창출되기보다는 끝없는 불안정 상태가 이어졌다. 몽골의 침공 이후 가마쿠라 막부는 이후 사실상 붕괴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하지만, 무로마치 막부도 단명하고 전국 시대에 돌입하게 되는 이유는 외부의 압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일본 열도의 위도상 넓은 지역에 분포된 모양새와 육로 교통을 가로막는 산의 존재, 또 물류 이동에 엄청난 역할을 하는 큰 강의 부재는 일본 영토의 통합성을 저해하는 요인이었다. 따라서 전국 시대 일본은 숱한 지방 세력들이 할거하기 딱 좋은 경기장이 된 셈이다.
실제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인으로서 사실상 일본의 절대적인 권력자나 다름 없었지만, 그들의 권력 기반은 매우 취약하였고 2대를 넘기지 못했다. 이는 그들이 일본 열도 전체에 질서를 부과하고 모든 지방세력을 철저히 통제할 역량이 없었음을 뜻한다. 히데요시도 끝내 도쿠가와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에도 막부는 어떻게 일본을 통일하고 안정된 정치체로서 수세기를 버틴 것일까? 여기서 “사회 발전은 지리의 의미를 바꾼다”는 문장이 빛을 발한다. 에도가 원래 있던 곳은 늪 지대다. 그 근방은 율령 66국 제도 하에서 무사시국이었는데 이 무사시의 어원도 원래 선주민인 에미시 언어로 ‘잡초로 가득한 습지’에 있다고 한다. 이에야스를 전통의 세력권인 미카와에서 무사시로 보낸 것은 확실히 정치적 라이벌을 견제하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계산이 맞았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군사적 경쟁을 거치면서 일본에 축적된 토목기술과 개간 능력은 무사시라는 땅의 의미를 바꾸어냈다. 간토 평야가 본격적으로 개척되기 시작하자 이곳은 변방의 미개척지에서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일본 최대의 곡창지대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나는 바로 여기서 이후의 일본을 통합해낼 구심력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전국 시대 경쟁의 결과로 일본의 농업생산력은 크게 확대가 된다.
현재는 일본의 수도권과 동의어로 쓰이는 ‘간토’ (평야)는 도쿄 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 밀집지역이다 |
예컨대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는 영지 개발에 전념하여 석고(石高: 코쿠다카. “석”이라는 단위를 써서 토지 생산성을 나타낸 수치)를 실질적으로 100만 석 가까이 늘리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하는데, 이는 당연히 오래 전부터 농지로 활용되어 추가적인 개간의 잠재력이 바닥난 관서(간사이) 지역보다는 관동, 동북(간토, 도호쿠)에 유리한 구도였다.
따라서 개간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전통적인 일본의 권력 지형은 바뀔 수밖에 없었는데, 자연스레 촌으로 취급 받던 관동과 동북의 다이묘들 쪽으로 힘의 무게추가 쏠리게 된 것이다. 특히 역사가 오래된 규슈, 기나이 지역은 영지의 구획도 엄청 많았고 자리를 잡고 있던 다이묘의 수도 많았다. 여기서 수 세기를 지속해나갈 확고한 권력기반을 갖추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간토와 도호쿠는 상대적으로 자리잡고 있던 다이묘들도 많지 않았고, 새로이 석고를 확대해나갈 잠재력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 시대 일본 전역을 통틀어 2,000만 석에서 도쿠가와는 순전히 자신의 것으로 250만 석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착실히 간토 평야 개발에 힘 쓴 결과물이었다. 이는 빽빽하고 경쟁이 치열한 서쪽에서 성장한 오다와 도요토미의 석고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게 에도 막부 정권은 도쿠가와가가 들고 있는 250만 석에 동맹으로 150만 석을 더 확보해서 어림잡아 400만 석 규모의 권력 기반을 세울 수 있었다. 이는 일본 역사에서 전례 없던 새로운 종류의 중심을 창출해냈다. 바로 이곳을 거점으로 일본의 새 통치자들인 에도 막부 쇼군은 중앙의 의지를 각지에 관철하고, 숱한 개역(改易: 다이묘, 하타모토 등 무사에게 내리는 처벌로 무사 신분을 박탈하고, 영지와 성을 몰수)을 강제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위에서도 강조했듯이 ‘엄청난 것이긴 했으나 절대적이진 않았기에’ 각 번들은 여전히 독자적으로 활동할 공간이 있었다. 간토 개간으로 에도 시대는 포용적 제도들이 자리잡을 ‘골디락스 존'(천문학에서 ‘생명 가능 지대’)으로 들어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에도의 등장과 참근교대제의 정착은 어디까지가 우연인 것일까? 천하의 영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간토의 촌구석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히데요시 정권이 이어지고 불안정한 평화 혹은 저강도 분쟁이 이어졌을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 것이다.
전국시대의 불균형 상태는 어떤 형태로든 균형을 찾아갔을 것이다. 사회가 기나긴 전쟁으로 엘리트층이나 서민층이나 할 것 없이 피로해졌고, 상업과 군사력의 발전으로 이제 점차 일본 전역에 질서를 부과할 세력이 등장할 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에 그랬다. 오다와 도요토미와 도쿠가와가 동시에 급사했다면 다테든 모가미든 호조든 누군가 등장해서 일본을 통일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 되었든 간토를 개간하여 그 엄청난 농지를 확보한 이가 천하의 균형추를 갖고 그곳에서 거대한 소비도시와 안정된 정권을 만들어내고자 했을 것이며, 이 과업에 성공한 이가 쇼군으로서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만약 간토가 개간되지 않았다면, 통일을 위한 균형추가 없는 일본의 군사적 경쟁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 경쟁은 그 속성상 개간과 상업을 촉진하기에, 분명 누군가는 다른 이들에게 먹히지 않고자 혹은 다른 이들을 먹기 위해 간토라는 곡창지대의 문을 열어젖혔을 것이며 거기서 전근대 일본의 도시경제는 지금 우리가 바라본 에도와 비슷한 모습으로 태동했을 것이다.
참근교대제도 비슷한 맥락이다. 에도 막부의 권력은 ‘엄청났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았고’ 이 균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이묘들의 힘을 빼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는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먼저 실험해본 적이 있었다. 교토에 주라쿠다이와 같은 호화 주택가를 지었고, 오사카에 다이묘들의 인질을 받아놓은 것이다. 혼란기에는 언제나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져나오고, 비슷한 과제에 처했을 때 인간이 채택하게 되는 답은 결국 엇비슷한 답들이기 마련이다.
참근교대(산킨코타이) 행렬도 중 일부 (난탄 시 문화박물관 소장) |
에도에 일단 권력 중심이 형성되고 나면, 참근교대보다 그 정교함과 승수효과는 떨어질지라도 다이묘들의 에너지를 군사적인 형태가 아닌 경제와 상업을 촉진하는 형태로 발산하게끔 하는 제도를 누군가 고안해냈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에도 시대의 성과의 근저에는 포용적 제도가 있고, 그것은 전국 시대의 군사적 경쟁이 일본의 지리에 맞게 나름의 균형점을 찾아가면서 태동한 것이다.
조선의 지리는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첫째로 한반도는 대륙에 열려 있어 언제나 변경이 형성되었다. 이는 거란, 여진, 몽골, 만주 등의 여러 이민족의 위협으로 이어졌다. 한가롭게 지방세력끼리 경쟁할 상황이 아니었다. 둘째로 일본과 위도가 달랐다. 동경만 해도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인 부산과 위도가 비슷하며, 일본 영토의 상당수는 한반도보다 더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와 비슷한 위도대인 도호쿠를 포함해서 일본 열도 전역은 조선보다 강수량이 높다. 이는 애초에 농업 생산력의 근간 자체가 일본이 더 유리했음을 뜻한다. 이런 점들이 합쳐져 조선은 독자적인 지방세력끼리 경쟁할 공간을 창출해내지 못했고 포용적 제도를 만들어낼 압력 또한 생기지 않은 것이다.
물론 조선의 내부적 상황을 바꿀 가능성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대외적 충격은 때로 내부 변화의 불씨가 되어주기도 한다. 조선의 경우 임진왜란이 그랬다. 실제 이 때 조선은 전국시대 일본의 각 다이묘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전술을 모방하면서 새로운 군사교리들을 학습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전혀 새로운 무기인 조총을 배워서 실전에 투입한 것이 대표적 예라고 하겠다. 또 병자호란에서도 조선은 군사적 패배를 겪어야만 했다.
부산진 순절도(釜山鎭殉節圖) 임진왜란 당시(1592년 4월 13일과 14일 이틀간) 부산진에서 벌어졌던 격전 장면을 동래부 화원 변박이 그린 기록화(1760) |
그러나 이 두 전쟁은 조선 내부에 새로운 변화의 불씨를 지피지 못했다. 이 두 사건은 일본과 중국이 각각 과거의 안정적인 질서가 와해되던 이행기에 벌어진 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해 일본과 중국이 다시 안정을 찾으면 일어나지 않을 전쟁이었다. 다원적 질서 하에서 끝없이 싸워대던 유럽의 국제정치 환경과는 달리 동아시아는 중국이 너무 강력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기에 국제적 경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에서 에도 막부 태평성세가 시작되고 청이 강희제 치세로 들어가 안정기를 구가하자 동아시아의 국제 정치적 변동성은 또다시 닫혀버렸다. 만약 일본과 조선이 이후 계속 싸워댔다면 조선도 나름의 체제 변화 압력을 소화해내거나 혹은 대안 세력이 등장하여 새로운 체제를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중국이라는 막강한 존재가 조선의 안보를 보장해주었기에 벌어지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킬 유인은 적은데 비용은 엄청 컸던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따라서 지리적 조건의 차이에서 빚어졌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위도대에 자리잡고 지방 간 교통이 불편하다는 점, 그리고 변경의 부재는 지방 세력 간 군사적 경쟁을 자극해 혁신을 추동했다. 이후 군사적 경쟁을 통해 쌓은 역량으로 일본은 간토 평야를 열어젖혔고 중앙집권적 질서와 다원적 정치세력을 동시에 갖춘 포용적 제도의 골디락스 존이 되었다. 하지만 변경에서의 압력과 일본보다 통합성이 높은 영토는 조선을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만들어주었다. 그 바깥에는 어떤 자율적 공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착취적 제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일개 천재 혹은 바보의 존재, 지도층의 세계관, 문화적 차이 등등에서 연유한 게 아니다. 이는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연유했다. 바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딛고 있던 땅 말이다. 예컨대 다른 지리적 요인들 또한 일본의 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고대부터 중국에서 가까운 것이 지리적인 유리함이었다. 선진문물의 원천은 언제나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발전이 또다시 지리의 의미를 바꾸었고 이제 서구 문물에 접근하기 좋은 곳이 사실 더 유리한 곳이 되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남중국해 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규슈와 달리 조선은 대륙 쪽에 훨씬 더 들어가 있는 모양새다. 일본 근세사에서 게임 체인저 혹은 와일드 카드로서 서양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던 것도 이런 지리적 차이 때문이었다.
일본 행정구역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는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었다. 평소에 내가 하던 생각과 일치하던 부분이 상당했고 그를 뒷받침해주는 정보를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에도 시대 일본의 성공과 조선의 실패에서 한국인이 교훈을 얻어야한다는 저자의 메시지, 혹은 그런 메시지에 격렬히 거부감을 표하는 몇몇 서평들에 공감할 수 없었다. 당시 일본의 찬란한 발전상과 비교되는 조선의 수준에 자괴감이 느껴진다는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민족주의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운 90년대 생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은 실패한 사회가 맞았다. 최소 근대화에 실패한 사회는 맞았고 일본과 비교하면 더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인이 어리석어서 혹은 일본인이 더 현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사회나 천재와 바보의 비율은 정규분포를 따르고 사람들 대부분은 평범하다. 문제는 이런 서로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인센티브를 주느냐의 문제인데, 이는 상당부분 지리의 문제기 때문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총, 균, 쇠]에서 왜 뉴기니 원주민은 유럽인과 같은 물건을 만들도록 발전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책을 시작한다. 이는 그의 뉴기니인 친구 얄리의 질문이었다. 에도 시대의 발전상과 조선을 비교하면서 교훈을 얻거나 자괴감을 느끼거나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이 나에게 잘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바로 여기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 |
얄리가 [총, 균 , 쇠]를 읽으면서 화려한 제국과 농경 문명을 만든 유라시아인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괴감을 느낄 이유가 있을까? 정체된 뉴기니와 대비되는 유라시아의 발전상에서 교훈을 찾을 이유는 있을까? 아니면 유럽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책이라고 책을 던질 이유는? 뉴기니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이 유럽 수준의 문명과 또 면역력을 갖추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에게 귀책사유가 돌아갈 이유는 없다. 한편으로는 ‘왜 유럽인들은 그런 경쟁력을 갖추었는가’에 대해서 식민주의적 기획이라고 비난할 것도 없다. 그저 사실은 사실일뿐인 것이다.
나는 오히려 에도 막부의 놀라운 발전상과 조선의 처참한 현실이 21세기에 반전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그 점이 바로 역사가 재밌어지는 점이다. 승자의 저주, 후진성의 역설이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했다고 본다. 여기서 문제는 에도 막부의 경제적 성과는 너무 뛰어났다는 점이었다. 또한 에도 막부가 와해되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기 전인 애매한 시점에서 일본이 서양 세력과 맞닦드린 것도 문제였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번사들은 결국 상업세력이 아니라 하급 사무라이들이었다. 이들은 지배층 바깥의 세력이라기보다는 지배층의 주변부에 있던 세력이었고, 사실 메이지 유신은 진정한 혁명이 아닌 지배층 내부의 권력 지형이 (대대적으로) 변동한 것에 가까웠다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이를 통해 메이지 일본은 에도 시대의 화려한 성과를 별다른 체제전환 비용 없이 활용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세계적 열강으로 발돋움하고 조선을 식민화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가니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전통 세력이 세계의 어떤 곳에서도 성취하지 못한 너무나 화려한 성취를 이루어냈기 때문에 사회집단 그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다. 일본 사회가 굉장히 보수적인 사회인 이유, 정치적 역동성이 부재한 이유가 여깄다. 집권세력의 본질이 에도 시대 이래로 거의 바뀌지 않아 집권세력은 지금까지도 통치역량을 축적할 기회를 독점할 수 있었던 반면 저항세력, 반대세력은 통치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에 신뢰를 보내기 힘들다.
반면 한국은 어떤가? 조선이 너무 처참한 실패를 했기에, 나라마저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기에, 이후 한국에는 정치적 정당성을 독점할 전통세력도 같이 사라졌다. 그 정당성을 메우기 위해 집권 보수세력은 반공주의와 경제성장을 들고 왔다. 그러나 진보세력은 그 보수세력의 정당성 문제를 지적하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 결과 한국은 경제성장도 성취하고 이후 저항세력에 의하여 민주주의도 성취할 수 있는 나라가 되지 않았는가?
물론 일본도 민주국가인 점에서 한국이 특히 더 나을 것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밑바닥부터 역량을 축적하여 주기적 정권교체를 이뤄낼 정도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정치적 건전성은 분명 조선의 처참한 실패와 맞닿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민족주의라는 의제와 경제성장이라는 의제를 공산당이 독점하여 어떤 정치적 반대자가 들어설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중국과 비교해도, 또 본성인과 외성인 갈등이라는 정체성에 근거한 정치지형이 민주화에 공헌한 대만과 비교하더라도 한국의 정치적 활력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독보적이다.
과거가 조금이라도 바뀐다면 나라는 인간은 없다고 봐야한다. 인구이동이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면 당장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는 차라리 조선이 실패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이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하여 지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밑바닥까지 처참하게 개박살나서 끝없이 자신을 일신하고자 하는 역동적인 한국에서 사는 게 내 성미에는 훨씬 낫다. 물론 이는 사람에 따라서 가치평가를 다르게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선이 그렇게 처참하게 당하지 않았다면 위안부, 전시 징용 혹은 한국전쟁 등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강력한 조선 왕조의 권력은 근대국가의 힘을 만나서 또다른 종류의 국가폭력을 펼쳤을 것이다. 20세기는 그런 시대였다. 내 조상이 그 피해자가 될지 혹은 가해자가 되거나 이익을 볼지의 미시적인 차원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끼지도,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종류의 의문이 들었다. 에도 시대 경제와 사회가 그렇게 활기를 띠고 문화가 만개한 이유는 일본 전역이 단일시장으로 묶이고 에도의 민간 영역이 자율성을 확보하고 혁신과 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임은 줄곧 지적된 바였다. 조선은 반대로 양반 중심의 착취적 제도가 문제였다. 민간 영역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경제 주체들은 인센티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이 경제 거인으로 성장한 배경, 그리고 그 뒤를 한국이 쫓아간 과정을 되짚어보자. 일본이 온전히 시장의 힘, 민간 영역과 상업의 역동성만으로 성장했는가? 찰머스 존슨 이래로 서구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그와 정반대였다.
조 스터드웰 ㅣ 김태훈 옮김 ㅣ 프롬북스 | 2016 |
오히려 통상산업성과 대장성이 시장에 끊임없이 개입하고 선도 산업에 투자하도록 장려하며 국내의 경쟁을 억제하는 대신 해외의 수출시장으로 들어가도록 지원했기 때문에 일본 경제는 폭발적 성장을 20세기에 이룩한 것이 아니었던가? 섬유나 동양 특산물을 팔던 일본이 중화학 공업, 기계, 철강, 조선, 자동차 등의 2차 산업혁명을 쫓아가서 지금의 산업강국으로 도약한 것에는 경제 주체들의 역할 뿐만 아니라 관료들의 역할도 막대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민간이 활발했던 에도 시대와 국가 주도 경제 개입이 본격화되는 1930년대 사이의 연결고리다. 에도 시대는 근대화를 향한 축적의 시대가 맞다. 에도 시대 이래로 대자산가였던 이들은 메이지, 다이쇼 시대를 거치면서 재벌로 성장했고 , 자유민권의 시대에는 정당을 포획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이에 관료와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재계에 대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이들의 막강한 영향력도 전통 시대로 소급될 수 있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을까?
그렇게 본다면 관료가 중심이 되었던 조선과 상업의 발전으로 역동적으로 성장한 에도 막부의 사이에서 교훈을 찾아야할 나라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닐 것이다. 관료가 이끄는 발전국가가 위기에 처한지도 이제 거의 30년이 다 되어간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모두 국가주도 관료중심 산업화의 경험을 공유하고 그 유산 위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조선 양반의 함정을 피하고 에도 조닌(町人: 도시에 거주하던 장인, 상인. 신분질서상 최하위 두 계층)들의 지혜를 다시 발굴할 필요가 있는 나라는 비단 한국만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 에도 시대 일본의 성취나 한국의 민주화 경험은 모두 동아시아 문명권의 소중한 자산이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조닌 계층의 혁신적인 상업 정신을 상징하는 미쓰이(三井) 포목점. 1673년에 문을 연 미쓰이 포목점은 백화점식 상품 진열, 정찰제, 즉석 옷 제작 등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혁신을 실천했다. 오늘날 미쓰이 그룹의 전신 |
나는 서로가 상대의 부족한 점을 찾아서 비난하기보다는, 없는 것을 만들어내어 초라한 자신을 억지로 치장하려하기 보다는, 자신의 모자람을 먼저 찾아내고 상대에게서 먼저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기를 원한다. 그것이 성숙한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지름길이 되리라 믿는다.
<출처: 슬로우뉴스 /필자 임명묵> http://slownews.kr/656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