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시간들에 대하여 1394년 태종이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를 할 시기에 한양의 인구는 10만명이었다. 1919년 삼일 운동이 일어날 즈음의 인구는 25만명이었다가 1936년에는 73만명이 되었고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해외와 이북에서 내려 온 사람들로 급격하게 늘어나 127만이 되었다. 그후 한국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희생자가 많아 65만명으로 감소한 뒤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지금은 1000만명을 넘었다.
이제 서울은 세계 200녀개국 중 20위 안에 드는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에 속하며 우마차가 다니던 거리에 꽉차있는 자동차의 물결과 하늘을 가리게 치솟은 높은 건물들이 빼곡한 세계인들이 모여 살고있는 급팽창하고 급부상한 서울이다. 그 시절의 사람들이 100년 후에 이렇게 변하리라고 도저히 상상도 못했을 아득한 100년전의 사진에 담긴 옛 서울 사람들. 이 자취는 다 사라져 버렸지만 나의 삶에서 이 흔적들은 떼어 놓을 수 없는 맥으로 연결되어 오고 있을것이라 생각이 든다. 1900년 즈음의 사진을 통해 일본의 통치에의한 도시 계획으로 철거가 되어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는 서대문과 서소문의 예전 모습이나 광화문 앞쪽에 있던 해태상을 사진으로 보게된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흰색이 대부분이고 여름에는 삼베나 모시, 다른 계절에는 주로 무명옷에 겨울에는 솜을 두어 만든 두툼한 두루마기 차림도 보인다. 남자는 말총 갓을 쓰거나 삿갓으로 햇볕을 가리는 모습과 신발은 짚신에 맨발이 많이 보이고 여름철의 더운 날인듯 바지를 걷어올린 모습, 여자는 치마 저고리 위에 외출시 입는 장옷을 머리에 걸치고 얼굴만 내놓았고 댕기머리 소년 소녀의 귀여운 모습도 있다. 일제시대 명동거리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들과 양장을 한 멋쟁이 신여성의 모습이 거리의 무명옷을 입은 서민층과의 괴리감도 느껴진다.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서울에 살면서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생경한 모습도 있고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도 보여 나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 어느만큼에 살아온 자취가 스며있음을 느끼며 바라본다.
경성시가의일부, 덕수궁과 석조전
1880년의 경복궁의 정문과 광화문의 옛 모습
광화문 앞에 있는 해태상, 이 해태상은 없어지고 광화문 양 옆에 새로 만들어 놓았다.
광화문앞 교각 광화문 앞에 돌다리 난간이 있고, 다리밑으로 하천이 흘러 빨래 터로 유명하였다.
1900년도의 서대문 일제의 경성시 구역 정리로 철거되었다.
1900년도의 남대문 안쪽 동네 전차 선로를 놓으려 하는것 같다.
1904년 남대문
년도는 알 수 없으나 비교적 이른시기에 촬영된 듯한 남대문 앞 대로의 모습이다. 용산정거장을 향하고 있는 전차도 작은 모습이다.
당시 조선은행 앞에서 바라본 남대문통 거리의 모습으로 비교적 한산한 거리의 모습
남대문 시장,그때에도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장이었네 !
영은문(迎恩門)
영은문은, 이조시대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의 칙사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책봉국 이었던 조선의 역대 국왕들이 중국 황제의 사신을 맞이하던 문이었다. 국왕이 영은문에 까지 마중 나와 칙사에게 아홉 번 고두(叩頭)하는 예를 행하는 장소로 한성 서대문에서 신의주를 거쳐 베이징에 이르는 길목에 있는 현재 서대문구 현저동에 1896년까지 세워져 있었다.
경성 독립문 대한제국이 세워진 후 독립협회는 사대사상의 수치를 씻기위해 영은문을 해체하고 1897년 독립 기념으로 새로운 독립문을 그 자리에 세웠다.
멀리 무악재 고개가 보이고 소 달구지에 볏단이나 나무같은 것을가득 싣고 팔러 나가는 조선민의 모습을 볼수 있다
창의문(彰義門) 태조실록에는 태조 5년 (1396년) 9월에 창의문에 대한 부분이 실려있다고 하는 600년 이상 된 문이다. 한양과 개성을 잇는 주요 통행로 중 하나였던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 장의문(藏義, 莊義), 창의문(倡義門)이라고도 부르던 문으로 현재 상명여대 부근이다.
1883년 조선에 온 초대 미국공사 루서스 푸트 부인인 로즈푸트가 가마를 타고 궁궐로 가는 모습
무악재 고개를 갓을 쓴 사람과 우산을 쓴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오빠생각"이라는 동요에 우리 오빠 말타고 장에 가면은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1895년 종로의 저잣거리,뒤에 북악산이 보인다.
1895년 처음 선보인 전차로 서대문에서 청량리간을 운행했다.
1901년 자전거를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고 다듬이질을 하고있다.
댕기머리 소년이 전봇대 에 붙인 광고지를 들여다 보고 있는듯하다
미국인 버튼 톰스가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1904년 서울 장날
관기의 춤.
1907년 마님의 나들이
한겨울 한강에서 얼음을 깨고 낚시질을 하고 있고 잡은 물고기를 웃으며 보고 있다.
종로에 있는 나무시장에 나무를 팔러나온 나뭇꾼과 손님들
1905년, 토담 쌓기
1919년 남대문 전차 대기소 전차 운전사는 일본식 제복을 입고 단발에 서양식 모자를 쓴 모습이다. 조선사람들은 상투를 틀고 있는데 일제는 조선 사람들에게 단발령을 내렸으나 호응을 하지 않았다.
1910년도 마포 나룻터 새우젖 장사가 모여드는 선착장 주변이다
1920년대 경성 동대문 외통
한강 철교 다리 건설은 1896년 3월, 미국인 모오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취득하여 4년여에 걸쳐 공사를 하여 1900년 7월, 준공되었다. 한강인도교는 조선총독부가 1916년 4월에 조선총독부의 주관하에 기공식을 올렸다고 한다
청계천(1904년) 청계천은 서울의 중심을 흐르는 하천으로 물이 맑아 빨래터로 이용되었다.
소 등에 싣고 온 나무를 팔려고 앉아있는 삿갓 쓴 사람과 멀리 양산을 쓰고 가는 아낙네도 보인다.
1900년대의 종로, 김장때면 서울 시내가 임시 채소 시장으로 바뀌다시피 했다.
땔감을 말에 실고와서 팔고있다.
뎐당국(전당포) 앞에서 갓을 고치는 노점상
1899년 우리나라 최초 경인선이 개통되어 모갈1호가 운행됐다.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 개통 시 운행되었던 열차로 시속 20㎞/h로 33.8㎞를 1시간 30분 만에 주파하는 기록을 남겼다. 모갈(mogul)이라는 이름은 탱크형 증기기관차에서 따온 이름으로 거물과 거인을 뜻한다. 모갈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당시 사람들은 불을 떼서 간다고 하여 화차, 화륜차라 불렀다. 모갈 1호는 3량의 목재 객차로, 1등 객차는 외국인 전용, 2등 객차는 일반 내국인용, 3등 객차는 여성용으로 나뉘었다.
경부선 열차
경성과 부산을 오가던 특급열차 일본의 상류층과 고관들이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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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제중원의 직원들과 에비슨씨
수표교 (水標橋 ) 청계천에 수표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1441년으로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보수를 하였다.
원래 청계천 위에 놓여 있던 다리를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 공원으로 옮겼다.
경성 장교 이 석교는 조선시대 청계천에 놓여진 다리 중 하나이다. 다리위를 오가는 댕기머리와 한복 차림의 다양한 사람들이 보인다.
창경원 식물원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1910년에 창경원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1983년 창경궁이 되었다.
1910년 상인들
대한제국 당시의 환구단과 부속건물 모습 1897년, 고종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조선이 자주국임을 알리기 위해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꿨던 우리 근대사에서 유서 깊은 곳이다.
손탁호텔 독일인 손탁여사가 경성에 지은 호텔로
구한말 고종의 후원을 받아 손탁호텔을 운영했고, 손탁은 외국 고위 사절과 조선 황실의 외교 통로 역할과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우리나라 독립에도 역활이 컸다고 한다.
1919년, 고종의 장례식을 보려고 종로에 나온 사람들
1930년대 광화문 통 (현 세종로 )에 있던 경성일보 건물이다.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라고 볼 수 있는 경성일보는 현재 프레스 센터 자리에 있었다.
'1901년 서울을 걷다 '에 실린 1900년대 서울의 모습
1800년대 중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에 살면서 활동을 하였던 동시대, 메리 카사트의 그림의 배경과 인물들에게서 보여지는 미국의 생활상과 어려운 형편에도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고흐,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속의 화려한 의상과 집들, 그리고 모델이 배우라는 특수직업이기는 하지만 에드워드 스타이겐의 사진 속의 풍요로움을 보면서 우리의 그 즈음은 결코 이들 같지는 못했겠지만 우리들 선조들의 백년전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던지 살펴보고 싶었다. 그래서 버튼 홈스 ( Elias Burton Holmes )의 '1901년 서울을 걷다'와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대해 씀 '서울은 깊다'라는 책을 읽으며 서양 사람의 눈에 비추인 옛 서울과 서울 사람들에 대한 느낌을 보게 되었다. 버튼 홈스가 제물포에서 서울로 들어서면서 본 서울에 대한 인상은 '서울로 가면서 지나치는 시골 풍경은 매력적이지 못했다. 산은 벌거숭이었고 길가에 있는 촌락들은 장래성이 없어 보였다' 라고 써 있다. 만약, 그가 다시 서울을 방문했다면 지금 서울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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