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뻐더! 친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뻐더~~뻐드러지다의 경상도 방언)
멀쩡한 나더러 기절을 하라니 이 무슨 낮도깨비
생밤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다.
오래전, 친구가 운전을 배워 중고차를 장만했는데,
운전이 서툴고 길눈도 어두워 운전과 지리에 밝은 나를 옆에
태우고 고향 선배 부친상에 문상 가는 중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에 운전도 서툰 녀석이
왜 차를 가지고 가려 하느냐며 말렸지만,
녀석의 고집은 고래 심줄이고 쇠가죽 이였다.
요즘은 자동기어로 된 차가 대부분이라 출발할 때
꿀렁거림이 없지만 그때는 수동기어로 된 차가 더 많아
운전이 서툴면 꿀렁꿀렁 덜컹덜컹 급정거하거나
시동을 꺼트리는 경우가 많았다.
쓸데없이 급정거를 해대는 바람에 다리를 쭉 펴고
뻗대다 보니 종아리에 쥐가 나고 사타구니에 가래톳이 섰다.
바가지로 물을 퍼붓듯 비가 오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자 녀석이 또 급정거하였다.
앞으로 쏠린 몸이 수습되기도 전에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우리가 탄 차가 앞으로 튕겨져나갔다.
초보운전이고 사고경험도 없는 녀석이라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대소변 못 가리고 허둥댄 사람은 나였다.
쏟아지는 비를 맞고 녀석은 밖으로 나갔다.
목에 충격을 받았는지 침을 삼키니 식도가 따끔거린다.
상황판단을 위해 나가볼까 하다가 따질 것 없이 뒤차의
일방적인 잘못인데다 비가 쏟아지고 있어 그냥 앉아 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녀석이 문을 연 채 얼굴만 디밀고는,
“야! 뻐더! 빨리 기절하란 말이야, 사고를 낸 놈이 만취하여
몸을 못 가눌 정돈데 고급외제차를 탄 젊은 놈이야,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해” 라고 말했다.
음주운전이라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는 것은
속 보이는 수작이었다.
고급외제차를 탄 사람이니 음주사고를 핑계로 나를 혼절시키고
사바사바로 합의금을 많이 받아내려는 우렁잇속이었다.
그런데 주객이 뒤바뀐 느낌이다.
혼절하는 광대 연기는 친구 녀석이 해야 맞다.
만취운전으로 서 있는 차를 추돌했으니 따지거나 우길
일도 없지만, 경험 많은 내가 끝갈망을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득이 되고 착오가 없을 것이다.
이 녀석이 배워야 하는 운전은 안 배우고 상대 약점
잡아 협박하는 것만 배웠나 보다.
안 하겠다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녀석은 문을 닫고 가버렸다.
기절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밖으로 나가 볼 수도
없으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혼절한 사람의 연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걱정이다.
혼절한 사람의 표정은 영화나 티브이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매우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지는 나긋나긋해야하는지 아니면
뻣뻣해야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부처님처럼 자비로운 표정으로 있으려고 했으나
나도 모르게 장구 깨진 무당 상을 하고 비스듬히
누운 것도 아니고 앉아있는 것도 아닌 묘한 자세로 있었다.
기절한 사람의 자세가 이럴 것이라며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연기였다.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빗물이 고였는지 철벅 철벅 발걸음 소리와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리니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린다.
차 문이 휙 열리고 사내 몇 명이 웅성거리는데,
사내 둘이 내 다리 하나씩을 나눠 들고 밖으로 끌어내며
조심하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깨가 의자 끝에 걸릴 무렵 어떤 사내의 손이
내 겨드랑이 속으로 쑥 들어왔다.
긴장하여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었지만 나는 유별나게
간지럼을 많이 타는 체질이라 간지럼을 참느라고
오줌을 저릴 지경이었다.
보통 때 예고 없이 겨드랑이 속으로 남의 손이 들어왔다면
아마도 나는 발광을 하고 오두방정을 떨었을 것이다.
얼굴이 자동차 밖으로 나올 때 또 한 번 놀랐다.
굵은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졌는데 바가지로 들이붓는 것
같았고, 눈두덩 위에 알밤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니
눈이 빠르게 깜박거려졌다.
왜 그리도 빠르게 깜박거려지는지 누가 내 눈을
유심히 보았다면 단번에 들통이 났을 것이다.
앰뷸런스로 옮겨질 때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들창코가 아닌데도 콧구멍으로 빗물이 들어가
사례든 재채기가 연방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고인 빗물을 남몰래 삼켰다. 만약 연거푸 재채기했다면
연극은 그 자리에서 막이 내렸을 것이다.
가슴에 담요가 덮어지고 체온과 혈압을 재는가 하면,
눈꺼풀을 뒤집고 손전등을 비추니 가만히 있고 싶어도
눈동자가 자꾸만 희뜩거려졌다.
대형병원응급실 구석진 곳에 팽개치듯 방치됐다.
앰뷸런스에서 체크한 혈압 체온 눈동자 모두 정상이라고
응급실 담당자에게 말한 모양이다.
그래도 수액 병이 걸리고 팔에 주삿바늘이 꽂혔지만
사지가 멀쩡한 나는 뒷전이었다.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비명을 지르거나,
이름을 부르고 눈꺼풀을 뒤집어도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거나,
젖꼭지를 비틀어도 요동이 없는 사람을 먼저 의사가
배치되는 것 같았다.
간이침대에 누워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자니
오줌이 마려워 죽을 지경이었다.
기절한 사람이니 화장실에 갈 수는 없고 옷에
싸는 방법밖에 없었다.
녀석을 불러 여기서 끝내자고 사정했다.
녀석이 잠시만 기다리라 해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손잡이가 달린 하얀 피브이씨 재질의 병을 들고 왔다.
남자환자용 변기통이었다.
녀석이 불문곡직하고 지퍼를 내려 사타구니에 변기통을 같다
대곤 웅덩이서 메기를 잡아내듯 거칠게 끄집어내 구겨진
채로 변기통에 집어넣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혹시 에이즈 환자가 사용하던 것은 아닌지,
씻기나 했는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이 급했다.
녀석이 허리를 굽혀 가림 막을 대신했지만,
주위가 어수선하니 오줌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응급실 간이침대에서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살포시
잠이 드려는 순간 친구 녀석이 나타났다.
내가 입을 비틀며 노려보았다.
“뭣 하는 짓거리냐?”
“조금만 참아, 그놈 아버지가 오고 있으니 곧 해결될 거야.”
“녹두밭윗머리처럼 팍팍하게 굴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해결해라.”
얼마 후, 주위가 웅성거리기에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초록색 수술 가운을 입은 의사와 열 명도 넘을 사람들이
떼거리로 나에게 몰려오고 있었다.
사고 친 녀석이 고급 외제 차를 탄다더니 방귀깨나
뀌는 집안의 자식인 모양이다.
내가 자해공갈단의 조직원이 된듯하여 괜히 가슴이 뛰었다.
나이 지긋한 의사는 또 눈꺼풀을 뒤집고 앰뷸런스에서 보다
훨씬 밝은 소형 손전등을 초점에 비추었다.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용을 썼지만 희뜩거려지는
눈동자를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의사들은 걸핏하면 눈꺼풀을 까고 뭔가를 확인했다.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그윽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는 다소 걱정스러운 듯 의사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내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떻습니까?”
의사가 내 눈동자를 까보고 묘한 웃음을 짓는 것을 언뜻
보았기에 매우 불안하였다.
의사는 팔다리를 폈다 젖혔다 를 반복하고 난 후,
“안정을 취하고 나면 큰 후유증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십 년 감수했다.
멀쩡한 사람이 혼절한 척하는 거 정말 어렵다.
천금을 줘도 못 할 일이다.
녀석이 나를 광대를 시켜놓고 공연수입을 얼마나
올렸는지 입을 다물고 있다.
녀석이 조삼모사에 능하고, 상대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 가욋돈을 받았나 보다.
녀석이 사흘이 멀다 하고 나를 불러 통닭과 닭똥집
안주로 생맥주를 안겼다.
광대 노릇에 대한 출연료인 셈이었다.
통닭집 주인은 우아한 중년의 여인이었는데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혼자 가기 멋쩍으니 나를
들러리로 세운 것이다.
옷에 닭튀김냄새가 찌들고 코에도 닭똥집냄새가
배도록 드나들었지만, 여인이 눈길 한번 주지 않자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핫바지 방귀 새듯 사라져버렸다.
첫댓글 정성이 가득 담긴 멋진 작품 감상 할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읽어주시고,,고운 댓글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