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제 제게는 분명하고 또 분명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얽히게 되고 베 짜는 사람의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문자 풀처럼 엉키어서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 각묵스님, 「디가니까야 2」(초기불전연구원 2006), 115면
대인연경은 9지연기로 연기법을 설하는 경이다. 이 경은 아난다가 연기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세존께서 그 견해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데 위의 인용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각묵스님의 번역본으로 이 대목을 읽어보면 아난다와 부처님 간의 대기설법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
부처님은 아난다의 말에 대하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부정하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읽히려면, 이후 부처님의 말씀은 아난다의 말을 부정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도 아난다와 동일하게,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물론, 아난다의 “그러나 이제 제게는 분명하고 또 분명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는 뒷말만을 부정하는 것으로 읽을 수는 있다. 즉, 연기는 참으로 심오한 것이어서 너의 수준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각묵스님은 이 해석을 지지하여, “연기는 부처님들의 영역에 속하는 심오한 가르침인데 이를 두고 아난다가 자신에게 이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하자 부처님께서 아난다 존자의 그런 성급한 말을 제지하시면서 연기의 가르침에 대한 부처님의 심오하신 설명은 시작된다”고 각주에서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각묵스님의 해석을 지지하면, 이후 부처님의 헝클어진 실타래, 엉킨 풀이라는 비유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아난다여, 너는 연기법을 분명히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므로 연기법이 분명하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너의 수준으로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서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 이와 같이 부처님이 말씀하셨단 말인가? 그리고 설마하니 연기는 제불의 영역에 속하는 가르침일 뿐,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란 말인가? 참으로 중요한 경인데, 이 경의 서두가 이토록 불명료한 이유는 무엇일까?
번역이 여러 면에서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일차적으로 번역문을 바로 잡자면, “아난다여, 그와 같이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고쳐야 한다.
각묵스님이 “이와 같이”, “그렇게”라고 번역한 evaṃ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여시아문)의 “이와 같이”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대개의 경우처럼 “이와 같이”는 후술할 내용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대목을 콜론을 사용하자면, “이와 같이 말하지 말라: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로 옮겨야 하며, 우리말의 어순을 고려한다면,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된다”로 옮겨야 한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그리고 참으로 심오하게 드러난다”고 말해서는 안되는가? 연기를 본 자는 “연기는 심오하게 드러난다”, “연기는 명료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연기는 이렇다”고 직접 드러내어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문을 가지고 좀더 분명히 설명하자면, “yāva gambhīro cāyaṃ, bhante, paṭiccasamuppādo gambhīrāvabhāso”는 “세존이시여, 참으로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하게 보입니다”, 또는 “세존이시여, 참으로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로 옮겨야 한다. avabhāsa는 영어로는 appear, 독일어로는 sheinen에 가장 가까운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난다는 연기법을 체득하거나 깨닫지 못한 채 이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연기는 이렇다”고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하게 보입니다”, 혹은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 하며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여,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여, 이 법을 통찰하지 못하여, 이와 같이[네가 말한 바와 같이] 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지고 엉키게 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연기를 본 자는, “연기는 심오한 듯합니다”, “이제 제게는 연기가 분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연기를 보지 못하고 그저 듣고서 이해한 자는 “연기는 심오하고 심오한 듯합니다. 연기는 참으로 분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아난다는 후자의 위치에 있었고, 부처님의 후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을 향하여 설법했다. 연기에 대하여 그와 같이 말해서는 안된다고, 알면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요 모르면 침묵하라고, 추정과 짐작과 감상에 의거해 연기를 말하면 필연적으로 엉킨 실타래처럼 풀 길이 없을 것이요 윤회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각묵스님의 해석은 서양언어에서 be/apper, sein/sheinen이 얼마나 다른 차원의 것인지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안목의 결여 때문이겠지만. . . 그리고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나는 각묵스님의 초기경전 번역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전재성의 초기경전 번역을 신뢰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존경받아 마땅한 그분들의 원력과는 별개로, 후세의 진취를 위해서는 이런 비평과 탁마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불가사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연기는, 세존이시여,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제 연기는 제게 명료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여,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여, 법을 깨닫지 못하여, 법을 통찰하지 못하여, 이와 같이 사람들은 엉킨 실타래처럼 되고 먼짓덩이처럼 되고 문자풀과 바빠자 풀처럼 되어 고처, 악취, 악처의 윤회를 넘어서지 못하느니라.”
스스로가 체득한 바에 의거하지 않고 다른 것, 다른 권위에 의거하여 연기를 이해하고 말하는 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의 수레바퀴를 벗어날 길이 없다.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고 심오한 듯합니다” 하는 아난다의 고백은 얼핏 연기에 대한 예찬론처럼 보이지만, 실은 연기를 모르는 자의 고백, 남이 체득한 바를 자신의 개념으로 환치시킨 사례, 그리하여 실타래를 더욱 엉키게 하고 먼짓덩이를 더욱 부풀리는 언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개념의 놀이, 희론을 좋아하는 학자들은 이 언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말한다: “연기는 참으로 심오하다.” — 이와 같이 말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초기경전을 찾아 읽다가 저 역시 답답한 면이 많았던 차에 고싱가님의 글을 읽으니 조금 실마리가 잡히는 듯합니다.
초기 경전 관련하여 추천해 주실 만한 번역서가 국내에 있는지요?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삼독
2012년 03월 26일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마음에 흡족한 번역서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왜 이렇게 만족이 안되는 것일까 가끔씩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 아마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첫째, 번역어의 선택이 사사건건 걸립니다. 팔리어에 대한 깊은 이해(단순한 어학차원의 이해가 아니라 몸에 깊이 스며든 차원의 이해)가 돋보이는 역자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거의가 영어나 독일어의 필터를 거쳐 겨우겨우 소화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로, 문체가 거의 영어식 문체인데다 매우 거칠어서 저로서는 도저히 경전의 문체로 수용하기가 힘듭니다. 모래알 씹는 느낌입니다.
셋째로, 전통적인 불교용어(구체적으로는 구마라집 스님 이후의 역경 언어)를 존중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이 듭니다. 그 용어들을 되도록 탈피하고 현대어를 채택하여 좀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이기는 한데, 사실 그 선택된 용어들의 기원을 살피면 일본식 조어한자이거든요. 물론 그럼으로써 의미가 더 잘 파악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찬동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의미가 더 불분명해지고 경전의 깊이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얕아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넷째로, 번역문을 가지고는 경전의 내용을 명료하게 파악하기 힘듭니다. 학자의 성실성과 필력은 갖추었으되 그 차원을 넘는 안목과 필력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인지, 읽다보면 과연 역자가 경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많이 듭니다. 경전의 내용이 일이관지로 파악되지 않고 지리멸렬한 내용으로 흩어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리어 경전이 번역된다는 것은 고맙고도 고마운 일입니다. 마음에 드는 번역본을 만나기까지는 한두 세대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마침내 그런 번역본이 나온다면, 당연히 현재 번역하신 분들의 원력에 기댄 바가 클 것입니다.
고싱가
2012년 03월 28일
저는 고싱가 님의 위 덧글에 조금 반대합니다. 언제까지 구마라집과 현장의 언어를 쓸것인지 답답합니다. 팔리어 번역하면서 각묵 스님과 전재성 박사께서 선택하신 용어들이, 물론 통일도 안 되어있고, 때로는 오히려 불분명한 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런 시도가 무턱대고 “전통을 존중”하는 것보다 몇 배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쓰는 전통적인 불교용어라는 것은 실은 그냥 중국어입니다.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한 단어나 각종 애매하던 단어들을 쓰다가 어느 순간 空이라는 한자를 이용했다는 것 자체가 중국인이 가지고 있는 불교 이해의 큰 도약을 의미하듯이, 한국인이 아직까지도 중국 단어를 쓴다는 것은 제가 볼 때는 전통의 존중이라기 보다는 한국인의 미천한 불교 이해를 대변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정말 불교를 이해하고 체화한다면 우리들의 말로 불교를 새로 표현해야합니다. 저는 20대 후반의 젊은이 입니다. 제 또래 중 불교에 관심있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아니, 관심이 있더라도 접근을 못하죠. 왜 그럴까요? “전통”을 가장한 “중국어”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절에서 한문으로 독경하는 것은, 성당에서 전통을 중시한답시고 라틴어로 미사보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상황입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많은 사람들이 “개콘”급으로 생각하더라구요. 특히 뜻도 모르고 그냥 외운다는 점에서 더더욱.) 고싱가님께서는 종종 숭산스님을 언급하시던데, 숭산스님이야말로 끊임없이 쉬운 우리 일상어로 불교의 핵심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런 점에서 함석헌 선생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 선생을 높게 평가합니다. 물론 그분의 글을 보면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법이나 팔정도 같이 매우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냄새는 별로 나지 않지만, 다석 선생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씹고 또 씹어서 순 우리말로 뱉어낸 말이라는 느낌이 확 다가옵니다. 특히 도덕경 번역을 읽으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고싱가님께서 “거의가 영어나 독일어의 필터를 거쳐 겨우겨우 소화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저 같은 사람이 바라보는 한국 불교는 “중국어의 필터도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권상일
2012년 03월 29일
권상일님의 좋은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 논의는 대단히 깊고 넓은 차원에 속하는 문제라서 댓글에서 이루어질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제가 댓글에서 이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자칫 반발과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는 생각도 듭니다.
권상일님의 의견대로 불교의 가르침을 철저히 현대적 언어로 소화해야 된다는 점에는 저도 십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경전 번역은 다르다고 봅니다. 경전은 현대와는 대단히 다른 정신적, 문화적 소산인데다, 어느 한 시대의 수행자들과 불자들이 지성으로 독송해왔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후대의 불자들은 선대의 수행자들이 소화해냈던 역사적 텍스트를 그 시대의 정신적 풍경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 하나를 두고 무수한 위인들이 달리 묘사한 다채로운 풍경을 엿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경전을 번역하는 것과 경전의 경문을 오늘날의 언어로 풀어서 가르치는 것은 별도의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철저히 현대적 언어로 소화해내야 한다고 보는 반면, 경전번역은 경전이 품고 있는 깊은 함의를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 함의를 다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현대인에게 낯선 전통언어라도 동원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전통언어에는 무수한 선각자들의 체취가 묻어 있기도 합니다.
저는 불교의 경전에는 현대적 언어로 소화해 내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깊이가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부처님의 유언 중에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흔히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부지런히 정진하라”로 번역됩니다. 당연히 후자의 번역문이 현대인이 소화하기에는 쉽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appamāda”를 “방일하지 말라” 대신 “게으르지 말라”로 번역하면 무슨 손실이 있을까요?
appamāda는 알아차림을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알아차림을 놓치면 업의 흐름에 휩쓸려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appamāda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늘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아 세간의 흐름을 거슬러가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각자들은 “놓을 방(放)”, “편안할 일(逸)”을 결합하여 “방일하지 말라(불방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대에도 “방일하지 말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적어도 경전번역에서는요.
이는 일반론적인 하나의 사례에 불과합니다만, 이 기준을 토대로 볼 때, 제가 보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즉 경전의 깊은 함의를 훼손할 정도로) 전통용어를 버렸다고 판단됩니다. 사실 일본의 경우에는 우리보다 한자를 훨씬 많이 쓰기 때문에 조금은 다를 수도 있지만, 남전대장경을 번역할 때 최대한 현대언어로 번역하면서도 마땅히 존중해야 할 전통용어를 그대로 살린다는 합의가 번역자들 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 것을 존중한다”는 의미의 “尊重古”라는 번역 원칙을 분명히 세우고 번역 작업을 했지요.
권상일님과 저의 견해가 조금 다릅니다만, 사실 텍스트를 하나하나 놓고 함께 검토해보면 의외로 견해가 같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권상일님께서 불교에 접근하시면서 도무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난해한 경전들 투성이여서 고생한 이력이 이와 같은 의견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돌아보니 어려운 것은 어려운 대로 가치가 있고 쉬운 것은 쉬운 대로 또 가치가 있습니다. 불교학자 마스타니 후미오가 고백했지요, 젊었을 때에는 다라니와 같은 주력이 “개콘 버전” 이상으로 어이없고 미신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학문적 이력을 모두 마친 뒤 비로소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요. 이제 늙어서는 매일 입에 올리고 있다고요. 불교의 전통 안에는 이처럼 성숙을 요하는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다라니만 하더라도 미신적이고 말도 되지 않는다며 치부하고 무시하기에는 대단한 가르침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오직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안목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다라니에 얽혀 있는 무수한 생들을 생각해 봅니다. 불교경전에 통달할 정도로 대단히 세련된 사고를 갖춘 지성인들이, 과연 뜻도 모르면서 그 다라니를 염송한 분들보다 청정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지성을 통하여 청정함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할 것이요, 다라니를 통하여 청정함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생들이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 안에는 그 무수한 스펙트럼을 다 감당할 수 있는 가르침과 수행방식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들 모두를 제대로 소화하여 쉽게 가르치는 수행풍토가 일반화되지 않아서 아쉬울 따름이지요.
예전에 어느 분께서 금강경의 “과거심 불가득, 미래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에서 “얻을 수 없다”는 번역은 모호하다, 영어의 “이해할 수 없다”는 번역이 훨씬 쉽게 이해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거심 불가득”을 “과거심을 이해할 수 없다”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왜 그런지는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그저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아무튼 이런 논의와는 별개로, 팔리어 경전 번역은 대단히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구마라집 스님을 예로 들면, 안목이 투철했지요. 아공법공을 체득했으니까요. 이런 안목이 있었기에 그전의 역경사업을 일거에 정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후대의 명안종사들이 두고두고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팔리어 경전 역자들 중에 그 정도의 안목이 있는 분이 있을까요? 그 정도의 안목은 아니더라도 수다원과 증득이라도 된 분이 있을까요? 과문해서인지, 아직까지 저는 성실한 학자의 안목을 훤출하게 넘어서는 역자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안목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까요? 천만에요! 불교 경전의 번역에는 무엇보다 이 안목이 우선한다고 봅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 보니 권상일님의 의견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듯합니다. 특히 아함경은 상대적으로 전통 경전용어와 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막상 구체적으로 경을 읽으며 의견을 검토하다 보면 제가 일반론적으로 말씀드린 위의 의견들이 좀 과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불교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의견에는 저도 십분 동의합니다. 한국불교의 진보와 혁신이 그만큼 더디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불교 자체가 성숙을 요구하는 종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십대가 되어야 비로소 불교를 감당할 만한 나이가 된다고 하시는 분들도 꽤 계시더라구요. 저 역시 삼십대 후반이 되어서야 불교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덕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불교 공부에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는 원칙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남을 보지 말라, 오직 스스로와 싸우라!
고싱가
2012년 03월 30일
답변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물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인데, 물론 연구도 힘들지만, 사실 이 동네 사람들의 대화는 다 영어 단어에 토씨만 한글이거든요.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저도 결국 그렇게 되더라구요.
“이해”와 “표현” 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최근에 열심히 보는 책이 도덕경인데, 이것은 정말 번역의 종류가 많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가도 비상도”에서 “도”는 그냥 “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알기로, 딱 세 명의 예외가 있는데 함석헌, 류영모, 젊은 시절의 김용옥 입니다. 이 분들은 “도”를 “길”이라고 했죠.
“도”라는 것에 수많은 역사와 깊은 의미와 각종 뉘앙스가 들어있지만 그것이 “도”라는 글자 안에 원래 있던 것일까요? 학자들이야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보통 사람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그 역사와 의미 모든 것은 배우거나 혹은 자신이 체험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 그 뒤에는 솔직히 “도”이건 “길”이건 그건 큰 상관이 없어지죠. 그럴바에는 “길”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의 핵심은 “역사성이나 깊은 의미나 이 모든 것은 단어 밖에서 배운 뒤에 나중에 단어로 돌아와서 느끼게 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요새 니체 번역가들이 “위버멘시”라고 쓰는 것을 보고는 저는 실망을 넘어서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위버멘시가 이런저런 깊은 의미들을 담고 있다고 설명은 하지만,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이유로, 저는 그 단어가 “의미를 담고 있다기”보다, 학자들이 “의미를 담아서 단어를 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초인” 혹은 “넘어선 사람” 이런 종류의 번역이 배척받아야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空”이라는 단어도 그냥 그 단어를 썼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이용하던 “空”이란 단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불교 이해가 깊어졌다”는 맥락에서 중요한 것이잖아요.
저는 번역이 단순히 멋진 단어를 선택하는 것보다, “우리 일상어에도 깊은 의미를 불어넣으면서 읽을 수 있게 되도록” 일부러라도 일상어 혹은 쉬운 우리말을 신경써서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어가 표면적인 쓰임을 넘어서, 많은 의미를 껴안을 수 있고, 그런 여러 느낌과 뉘앙스가 우리 삶에 녹아들 때, 진정한 사고의 도약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권상일
2012년 03월 31일
안녕하세요 걸식이라고 합니다.
저희 카페에 윗글 중 대인연경에 대한 고싱가님의 새로운 해석이 일부 발췌되어 있어 링크따라 들어왔습니다.
바른 번역은 바른 법을 확립하고 그것을 체득했을 때 가능합니다.
물론 고싱가님처럼 언어적 재능이 있으신 분들이 한다면 훨씬 뛰어난 번역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언어적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법이 제대로 체득되지 않았을 때는 깨닫기 전 아난존자처럼 ‘이런 것 같습니다, 저런 것 같습니다’라는 추측성 발언을 내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다라니에 얽혀 있는 무수한 생들을 생각해 봅니다. 불교경전에 통달할 정도로 대단히 세련된 사고를 갖춘 지성인들이, 과연 뜻도 모르면서 그 다라니를 염송한 분들보다 청정하고 정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지성을 통하여 청정함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할 것이요, 다라니를 통하여 청정함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생들이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 안에는 그 무수한 스펙트럼을 다 감당할 수 있는 가르침과 수행방식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들 모두를 제대로 소화하여 쉽게 가르치는 수행풍토가 일반화되지 않아서 아쉬울 따름이지요.”
고싱가님의 위의 견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부처님말씀은 대인연경에서 해석하신 것처럼 모두 언어로 이해가능한 내용들입니다. 주문으로 얻어질수 있는 지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인간과 다른 차원의 생 그런 것 없습니다. 경전에 올려져 있는 온갖 신들에 관한 내용들은 힌두교, 자이나교 등의 외도들의 경전이 불경에 뒤섞여 전승된 내용으로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기존의 경전을 아무리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더라도 그 내용이 불법에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를 가려낼 수 없으면 그 번역은 불법의 참된 의미를 살려내지 못하게 됩니다. 선법과 불선법을 가려내는 이러한 지혜를 택법각지라고 하지요. 칠각지(깨달음에 의해 증득되는 지혜의 요소들)중 하나입니다. 바른 언어(정언)란 법에 대한 바른 견해(정견)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것으로서 언어 자체에 특별한 권위나 이해할 수 없는 청정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다고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바른 견해 역시 인간의 참본성, 우주적 절대성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4성제를 제대로 확립한 견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외도의 주장 경(A3:61), 시와까 경(S36:21), 나체수행자 깟사빠 경(S41:9) 등을 잘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고싱가님의 위의 견해는 잘못된 견해”라는 걸식님의 견해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저는 님의 견해와 관련된 해묵은 논쟁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인간과 다른 차원의 [천신과 같은] 생”을 이야기한 바 없는데, 이는 제 댓글을 오해하신 듯하여 언급해 둡니다. 제 댓글에서는, “우리(저와 권상일님)”와는 다른 인생들도 있다는 점을 언급했던 것이거든요.
고싱가
2012년 07월 27일
고싱가님이 말한 ‘다른 차원의 생’이란 표현은 너무 모호하여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안, 이, 비, 설, 신, 의에 의존한 이 세계를 넘어선 다른 세상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려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부처님은 유(욕계, 색계, 무색계)에 대한 상정이 곧 생의 원인이 되며 그 생에 기인하여 모든 괴로움이 생겨난다고 설하셨지요. 즉 아무리 수준이 높고 차원이 다른 생이라도 그러한 생은 감각접촉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범망경 참조), 자아취착(오취온)에 기인한 것이며(대념처경 참조), 자아취착에 기인하여 모든 괴로움을 받게 됩니다. 이를 오취온고라고 하지요 바른 언어는 ‘저는 당신의 말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자신의 견해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면 왜 존중하는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밝혀주시는게 필요합니다. 대인연경에서 해석하신 것처럼 지혜는 심오한 것 같아서 심오한 것이 아니라 체득되었기 때문에 심오한 것입니다. 뜻도 모르는 다라니를 외우는 사람들에게서 심오함을 찾는다면 앞에서 대인연경의 번역을 하신 취지와 전혀 맞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언어 자체는 해묵었거나 신선하다거나 정해서 말할수 있는게 없습니다. 그 언어에 대해 자기가 의미부여하는 것이 해묵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합니다.
http://cafe.daum.net/realbuddhism
링크된 카페를 방문해 보니 대문에, “카페의 자료들이 자신의 견해와 상충돼서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옳다·그르다’ 시비 말고 조용히 다른 곳으로 떠나십시오”라고 써 있네요. 그 권고문대로 조용히 떠났습니다. 걸식님과 저는 견해가 상충되는 듯하여 논의하기보다는 각자의 공부길을 가는 게 서로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됩니다.
고싱가 2012년 07월 28일 http://www.gosinga.net/archives/2911/comment-page-1#comment-2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