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고려의 흔적이 산해관에서 출발하여 부여까지 쌓은 고구려 천리장성 근처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만주지역에 대한 고려강역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전부를 연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려사의 의문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함께 풀어본다는 차원에서 본 글을 올려드립니다
다함께 연구해 보자는 의미입니다
감사합니다
(강감찬 구주대첩의 장소는 어디인가 ?) (오재성)
* 구(龜) : 3가지 뜻이 있음. 나라이름 “구”, 거북 “귀”, 틀 “균”
강감찬의 구주대첩지인 “구주”가 왜 원나라 심양로에 포함되어 있을까 ?
만주에서 고려땅을 확인 할수 있는 자료가 아닐까?
과연 강감찬 장군의 구주대첩 장소는 어디인가 ? 만주 인가 한반도 인가 ?
우리는 지금까지 강감천의 구주대첩을 평안북도에 어느 지점으로 비정하여 왔다. 과연 그러한 것이 사실이었는가 ?
현재 교과서 역사부도(1)에서 그 위치를 찾아보았다 아래와 같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요나라 이후에 건국한 원나라의 지리지에서 다음과 같은 “이상한 점”이 발견되고 있다.
원나라의 지리지에
요양로, 광령로, 산북요동도, 동령로, 심양로, 개원로
등 만주에 접한 지명들이 있었다.
현재 확인할수 있는 지명으로 요양, 광령, 심양, 개원 이 있는데
북쪽으로 개원 그 남쪽에 삼양이 있고 그 남쪽에 요양이 있고 요양의 서쪽에 광령이 있다,
동령로는 “고려의 서경”이 “동령부”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동령로의 지명이 한반도에 있다고 주장하여 왔다. 그원인은 고려인 최탄 등이 60여성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한 지역인데 서경을 동령부라 하였기 때문에 서경을 현재의 평양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동령부지역을 한반도내로 보아온 것이다
그런데 심양로 또한 고려인 홍복원이 40여성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한 지역이다
지금까지의 입장대로라면 심양이 고려 서경보다 북쪽에 있으니 심양로는 동령로보다 북쪽에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동령로 속에 포함되지 않은 “구주”가 “심양로”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구주가 동령로에 포함하지 않고 심양로에 포함되어 있다면 “구주”는 심양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강감찬의 구주대첩이 만주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연구되어 질수 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기록에서 “요심”이 고려땅임을 표현된 곳을 찾을수 있다
요심의 서쪽에 송령이라는 산맥이 있음을 지도상 장성지역에서 찾을수 있다 “송령”은 고려가 성을 구축한 지명으로 나오고 있다
고려 서북쪽의 지역을 이렇게 찾을수 있다면 동북쪽은 선춘령과 윤관비지도를 통하여 만주지역에서 찾을수 있을 것이다
강감찬의 구주대첩 그 지역을 정확히 찾아야 한다 210만의 고려인들의 활동무대를 함께 찾아보자는 것이다
(원사지리지 원문)
(오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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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강감찬 姜邯贊 [948~1031]
고려시대의 명장. 본관 : 금주 별칭 : 초명 은천, 추충협모안국공신 주요저서 :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
본관 금주(衿州:서울 관악구 봉천동), 초명 은천(殷川).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조신(朝臣)들은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반대하고 하공진(河拱辰)으로 하여금 적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서경유수·내사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이듬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위에 쫓겨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개선할 때 영파역(迎波驛)에서 왕의 영접을 받았으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3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國侯)에 봉해졌다.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다.
< 귀(구)주대첩(龜州大捷) >
고려시대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구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싸움.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 소손녕(蕭遜寧)에 의한 거란의 제1차 침략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6주(州)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성종(聖宗)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하고 자주(慈州)에서도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구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1) 흥화진(興化鎭) (2) 귀(구)주(龜州) (3) 영파역(迎波驛) (4) 자주(慈州) (5) 서경(西京) (6) 신은(新恩) (7) 연주(漣州) (8) 위주(渭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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