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5) 루터주의에 대한 편견
루터주의에 대한 편견
1523년 한 해 동안 신학부에서는 101 번의 회의를 했다. 이는 한 해 30 번 남짓한 통상적인 회의 횟수를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이렇게 회의를 자주 한 이유는 거리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고 이름도 생소한 마르틴 루터 때문이었다. 루터의 사상은 파리시와 대학과 교회에 폭풍을 몰고 올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루터주의는 실제로 도시와 대학의 업무를 마비시켰고, 파리시에서 학식 있는 사람 중에 루터의 사상을 한 번도 접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일찍이 1519년에 파리 엘리트 지식인들 가운데 마르틴 루터의 저술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는 독자층이 상당히 탄탄하다는 사실이 동시대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의도는 선했으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선정적인 종교 가십으로 자주 왜곡되고 과장된 버전이 유통되었고, 심지어 진짜 루터의 사상보다 더 널리 퍼져 나갔다.
도시와 대학 곳곳에서 사람들이 계속 루터의 사상에 매혹되자 이 새로운 사상에는 곧 '이단'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1523년 7월 14일에 소집된 신학부 회의에는 역대 최고로 많은 인원이 참석했고, 이 자리에서 피에르 리제(Pierre Lizet)는 왕을 대신해 루터주의의 해악을 규탄했다. 그로부터 3주 뒤, 루터의 저작을 읽고 논평했다는 죄목으로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 장 발리에르(Jean Vallière)가 화형을 당했다. 1526년 12월 4일에는 일곱 사람이 악마 복장을 하고 파리 시내를 행진했다. 여자 한 명이 말을 타고 선두에 섰고 신학 박사 복장을 한 남자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옷 앞면과 뒷면에는 ‘루터 교도'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루터주의에 대한 우려가 처음 제기된 때는 15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터와 요한 에크(Johann Eck)가 벌인 라이프치히 논쟁의 여파였다. 이 토론에서 루터는 가톨릭의 핵심이 되는 가르침들을 문제 삼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입장에 대해 에르푸르트대학교와 파리대학교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에르푸르트대학교는 이 절차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파리대학교의 경우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파리대학교가 이 문제에 연루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다. 파리대학교는 로마 교황권의 간섭을 거부하고 프랑스 교회의 완벽한 자유를 주장하는 '갈리아주의'의 중심지였다. 볼로냐 협약(1516)이 너무나도 소중한 '프랑스 교회의 자유'를 훼손하고, 파리대학교와 파리 파를러망(고등법원)의 독립성을 희생시켜 프랑스 국왕과 교황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았다. 파리대학교는 볼로냐 협약의 인쇄 및 배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결과 1518년에는 교황의 권한 문제가 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다. 교황권의 본질은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다룬 주요 쟁점 중 하나였고, 이 때문에 파리대학교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만약 교황의 권한을 문제 삼은 루터를 비난하면, 수세기에 걸쳐 고수해 온 갈리아주의 전통에서 한발 물러서는 것처럼 보일 우려가 있었다. 당대의 기록들은 1520년에 교수회가 여러 번 소집되었고 난항을 겪었음을 보여 준다." 루터의 등장으로 파리대학교가 안고 있던 내부 문제는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루터는 1520년에 개혁을 주장하는 세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파리대학교는 루터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1521년 4월 15일, 104가지 항목으로 루터를 조목조목 비난하는 문서가 최종 승인되었다. 오늘날 파리의 <결정 Determinatio〉으로 알려진 문서다. 파리대학교는 이 문서를 통해 루터가 마르키온, 아리우스, 위클리프와 같은 이단의 대열에 합류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옛 이단들을 부활시키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뻔뻔스럽게도 새로운 이단을 만들어 냈다고 힐난했다. 파리대학교 신학부에서는 루터를 옛 이단들과 하나로 묶는 논박 전략을 택했다. 그래서 이미 이단으로 의심해 온 사상들과 루터의 사상 사이에 역사적·신학적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파리대학교의 <결정>이 라이프치히 논쟁의 핵심 쟁점이었던 교황의 수위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당연한 결과다).
파리대학교의 <결정>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1524년에는 라틴어판이 아홉 번이나 재판을 찍었고,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파리대학교에서 루터를 비판하고 나서자 역설적으로 루터의 사상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높아졌다. 칼뱅이 파리대학교에 다니던 때에 루터 문제는 신학부의 주요 의제였고, 당연히 회의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장황하고 신랄한 비판이 오갔으며, 최소 15명의 교수가 이단 혐의를 받았다(전체 숫자가 80명을 넘지 않았다). 정작 루터가 불러일으킨 위협의 성질과 의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신학부는 루터로 말미암은 위협 앞에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단결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루터의 사상과 인문주의자 또는 개혁 성향의 프랑스 성직자의 사상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을 전자가 정통이라는 징표로 보지 않고 후자가 이단이라는 징표로 보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하여 보수적인 교계에서는 루터의 이름만 들어도 증오심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비판에 맞서 인문주의를 옹호하던 프랑수아 1세도 시간이 지날수록 루터주의가 왕국의 안정에 위협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태도가 행동으로 표출되는 계기가 된 것은 1534년 10월 벽보 사건이지만, 기원을 따져 보면 칼뱅이 파리에서 공부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럼에도 파리대학가에서 루터의 사상을 접할 기회는 아주 많았고, 이에 대해 신학부는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칼뱅이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루터주의를 피해 다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루터주의를 만들어 낸 색슨족 출신의 신비로운 인물에 관한 각종 추측과 소문도 접했을 게 틀림없다. 파리 시내에서 참회 행진과 시위 행진, 이단 공개 처형이 이루어졌고, 신학부에만 국한되지 않고 파리대학교 곳곳에서 루터주의를 격렬히 비판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라서 젊은 칼뱅이 비록 왜곡된 형태였을지라도 타국에서 건너온 이 이단의 근본 사상들 가운데 적어도 몇 가지는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칼뱅은 루터주의에 관한 대중의 관심과 보수적인 파리 학계의 반감을 모두 보고 듣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칼뱅이 루터의 사상을 언제 어떤 형태로 처음 접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점이다.
칼뱅의 파리 시절을 논할 때는 늘 '불확실함'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칼뱅이 파리에 머문 시기도 불확실하고, 파리에서의 학창시절이 경력과 사상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만큼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불확실하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칼뱅이 일반적인 패턴과 일치하기를 바라며 쉽게 일반화하고픈 유혹을 계속 받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파리 학창 시절이 칼뱅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라고 추측할 만한 근거가 있다. 몇 줄 안 되는 칼뱅의 회고에 따르면, 칼뱅은 파리대학교를 라틴어를 익힌 곳 정도로만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칼뱅의 추론 능력과 분석능력은 파리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유명론을 대표하는 선생들에게 엄격한 훈련을 받은 덕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칼뱅이 파리 대학교에서 상당히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조를 흡수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조는 그 시대의 관습적인 학술지식의 소산일 뿐이었고, 여기에서는 훗날 칼뱅에게서 나타나는 급진적인 성격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니 이제 오를레앙대학교와 부르주대학교로 시선을 돌려 보자. 아마도 칼뱅은 이 두 대학을 통해 전혀 다른 지적 세계에 발을 들였을 것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바로 이 시기에 칼뱅이 그의 정신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과 방법론과 사상을 접하고 결국 개혁에 뜻을 품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