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학맥을 이은 이색(함창김씨 외손)은 대유학자로 정신적 스승이다
정신적 스승 대유학자 이색도 불교경전 대장경을 간행했다
태조 이성계도 고려의 대유학자 이색을 숭상하였다
고려 공민왕 시대 대유학자 이색은
조선학문의 맥이다
조선 학문의 맥은 함창김문에서 싹을 틔었다
가정(稼亭) 이곡(李糓)은 영해 향교 교수 金澤의
(함창 9세 대문장가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따님과 결혼하였다
이색은 외가 영해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金澤은 함창 9세 대문장가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영해 향교 교수로
외손자 이색을 가르쳤다
외삼촌 重大匡贊成事 咸寧君 金饒(함창 10 이색의 외삼촌)가 이색을 가르쳤다
1361년(공민왕 10) 10월 다시 홍건적이 칩입하니 공민왕이 남쪽 안동으로 피난하게 되니
함창 10세 김요와 생질 이색이 왕을 모시고 의성 삼춘을 지나 안동으로 피난하여
김요와 이색의 계책으로 홍건적을 물리치고 1362년 안동에서 일직,
의성 삼춘을 지난 개성으로 돌아가시다(삼춘을 봄사리 라 한다)
홍건적의 난을 슬기롭게 물리친 김요에게는 함녕군, 이색은 한산군으로 봉직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중국 원나라에 유학하였다
고려 때에 졸옹(拙翁) 최해(崔瀣), 가정(稼亭) 이곡(李糓),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흥령군(興寧君) 안축(安軸)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韓山)의 향리(鄕吏)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星山鄕吏)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同年 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馬彦翬)와 학사(學士) 부자통(傅子通)에게 시를 지어 보내며 교류 하였다,
조선학맥의 중심 함창김씨
조선 학문의 맥 공자(BC551~, 맹자(BC 336- 주자(1130~1200에서 시작
신라 원효, 설총(아두), 최치원(해동공자)
고려 (주자) 안향-우탁/백이정, 권보(안동)-이제현(경주)-목은 이색,
조선 학문의 맥을 이은 함창 김문
함창 9세 金澤자(함창 9세 배 영양남씨),
金澤의 사위 가정 이곡李穀, 목은 이색[牧隱(李穡) 한산이씨
사위 청송심씨 2세심용-(3세심덕부-4세 심온(세종의 장인)
* 남중(예조판서), 남택(형조판서)
10세 함녕군(咸寧君) 金饒는 (함창10세 배 의성김씨),
* 조선 개국의 요직에 함창인이 큰 일을 하였다
(영양남씨, 한산이씨, 의성김씨, 청송심씨 척관계를 유지)
목은 이색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에게 학문을 이어주었다
조선 학문은 정도전, 권근-김숙자-김종직(선산)
김굉필(서흥 도동서원), 정여창(一蠹 鄭汝昌(咸陽 濫溪書院 두 번째 서원),
김일손(金海 濯纓 金馹孫.靑溪書院), 손중돈에게 이어지고
김굉필이 조광조에게 이어지고
이언적, 이황(1501-1570)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이율곡에 이어져 기호학파로 나누어 학문이 성장 하였다
신라 원효, 설총(아두), 최치원(해동공자)
고려 안향-우탁/백이정, 권보(안동)-이제현(경주)-목은 이색,-정몽주,이숭인,길재/
조선 정도전,권근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선산)-김굉필(서흥 도동서원),정여창(一蠹 鄭汝昌(咸陽 濫溪書院 두 번째 서원),김일손(金海 濯纓 金馹孫.靑溪書院),손중돈-조광조, 이언적—이황(1501-1570) 이어진다
영남학파-경상좌도 이퇴계, 경상우도 남명 조식
기호학파 이율곡으로 이어진다
4은 이색(목은), 정몽주(포은), 길재(야은), 이숭여(도은)
조선 5현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퇴계
태조 이성계도 고려의 대유학자 이색을 숭상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 직후 불교 대장경을 인쇄·출간하고자 뜻을 굳히고는
첨서중추원사(지금의 비서실장 격) 정총에게 발원문을 짓게 했다.
그런데 정총이
“어찌 불사(佛事)에 그리 정성이십니까. 불교를 믿지 마십시오”라며 타박하는 게 아닌가. 태조가 달래었다.
“유학(儒學)의 종사 이색도 불교를 믿는다.
믿을 것이 못 된다면 이색이 어찌 불교를 믿겠는가.”
정총은 굽히지 않았다.
“이색이 높은 학식에도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태조가 노해서 말했다.
“그럼 이색이 그대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
조선왕조(태조)실록에 생생하게 묘사된 장면이다.
이색(1328~1396)은 여말선초 최고의 지식인이자 사대부들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대유학자였는데, 그럼에도 불교를 멀리 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대장경도 간행했다.
자신의 부모와 고려 공민왕을 추도하기 위해 나옹 화상과 함께 대장경 간행을 발원했는데, 그 내용이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의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에 전한다.
이색은 불교의 가르침이 유교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그 가르침의 집적체가 대장경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넓다.
경(經)·율(律)·론(論)으로 대표되는 방대한 그 가르침을
결집해 문자로 남긴 것이 대장경이다.
대장경은 불교가 전해진 나라마다 따로 간행됐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정밀하다고 평가받는 게 1251년 간행된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이다. 합천 해인사 법보전에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은 8만 1250여 장의 목판에
1530여 종의 불교 경전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의 진정한 가치는 그 엄청난 판각 자체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삶의 진리에 있다 할 것이다.
역대 고승들이“팔만대장경도 부수고 들어가야 법이 된다”고 일갈했다.
문화재청이 팔만대장경을 온라인 공간에서 쉽게 볼 수 있도록
디지털 자료로 구축하는 사업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해당 서비스는 이르면 2027년께 개시될 전망이다.
현재 일반인이 팔만대장경 경판이라도 볼라치면,
미리 해인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예약해야 그것도 일요일에 겨우 한 번 가능하다.
그러니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접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온라인으로 제 자리에 앉아서 그 가르침을 접하게 된다니!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삶의 진리가 담긴 팔만대장경을 읽고 가르침을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대장경
1087년 초조대장경 (불경으로 외침을 막음)
대구의 부인사(符仁寺 : 지금은 없음) 초조대장경은
《대반야경》 6백 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 권을 목판
1073년(문종 27)부터 1090년(선종 7)까지 수집 1096년(숙종 1)에 완성
1,010부 4,740여 권이며,
1232년 대구 부인사 초조대장경 거란의 칩입으로
1235년(고종 22년) 거란(몽골)과의 병화(兵火)로 황룡사 9층목탑과 함께 소실
《팔만대장경》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1236년(고종 23)에 착수하여 1251년(고종 38)에 완성 총 81,137장
1248년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 8만 4천 법문(法門) 글자 수는 총 5200만자
해인사에 수장 보관 세계문화유산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