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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5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마르코 8,1-10
"저 군중이 가엾구나."
교구 평신도 복음화 봉사자들과 1박 2일로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한 어르신 봉사자께서 1970년대 TV에서 방영되었던 사연이라며 말씀해 주신 한 사연이 마음에 와 닿아 이렇게 옮겨봅니다.
6·25전쟁 때 서울에 살던 한 부인이 피난 가다가 가족과 헤어지고 혼자 부산에 도착해 국제시장에서 가게를 세내어 식당을 시작했습니다.
음식 솜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한번 온 손님들이 계속 찾아와 식당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거지가 되어 동냥으로 연명했는데, 그 식당에도 거지들이 찾아와 종업원들과 자주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밥 좀 주세요.”
“너희 주려고 밥장사 하는 줄 알아?”
주인아주머니는 거지들을 볼 때마다 헤어진 아들 생각이 나, 모두에게 밥을 주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적자가 나니 고민이었습니다.
하루는 아주머니가 식당에 큰 통을 갖다 놓고 종업원들에게 말했습니다.
“손님이 음식을 남기면 버리지 말고 전부 이 통에 깨끗하게 모아라.”
그날도 점심때쯤 되어 거지들이 몰려오자, 주인아주머니는 “저녁 9시쯤에 와라. 그러면 밥을 줄게.” 하였습니다.
“정말요? 꼭 줘야 해요!”
9시가 되자 손님들이 끊어진 조용한 식당에 거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밥 준다고 했지요?”
거지들이 스무 명 남짓 식탁에 둘러앉자 주인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내게도 헤어진 너희만한 아들이 있다.
너희를 보면 그 아들 생각이 나 밥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이 식당은 망할 거다.
그래서 오늘부터 손님들이 남긴 밥을 깨끗이 모았으니 이것으로 죽을 끓여주마.”
아주머니는 모은 밥과 반찬으로 죽을 한 솥 끓였습니다.
거지들이 그 죽을 한 그릇씩 받아들고는, 늘 멸시와 천대를 받다가 따뜻한 사랑을 받는 것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줌마, 고맙습니다!” 거지들은 매일 밤 그 식당에서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스무 명에서 서른 명, 마흔 명… 하고 거지들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다 죽을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지 왕초는 이러다가는 저 식당이 망할 것 같으니 이런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몰려가다가는 저 식당이 망하겠다.
이제부터 조를 짜서 요일별로 나누어 밥을 먹으러 가자.”
거지들도 그 아주머니를 위해 배려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식당 벽에는 “손님 여러분, 음식을 깨끗하게 남겨 주십시오.” 하는 글귀가 붙었고, 그 식당에서는 손님이 남긴 음식을 거지들에게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늘 깨끗한 음식이 나오니까 손님도 믿고 먹을 수 있어서 손님이 더 늘어났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거지들이 다치면 약을 발라주고,
거지들도 식당의 부서진 의자나 문짝을 고쳐주고 청소도 해주었습니다.
어떤 거지는 아주머니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운 엄마의 정을 그 아주머니한테서 느낀 것입니다.
그렇게 식당은 점점 사랑의 식당이 되어 갔습니다.
그 해 겨울, 부산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났습니다.
바닷바람이 강해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시장 전체가 불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가장 피해가 작은 한 집이 있었는데 바로 그 식당이었습니다.
이유는 불이 나자 거지들 200여 명이 순식간에 그 아주머니 식당으로 몰려들었고, 그 중 일부는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막고, 물을 퍼붓고, 또 일부는 물건들을 밖으로 꺼내고, 일부는 그것을 지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합판 조각과 박스 조각들을 모아 와 아주머니가 추위를 피할 집을 임시로 만들고
“어머니, 걱정 말고 여기서 주무세요.” 하였습니다.
거지들은 아주머니와 마음에서 하나로 엮여 있었던 것입니다.
참다운 소통은 우리가 모두 한 가족이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영적인 것은 사람을 살리지만 육적인 것에 심으면 죽음이 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영은 생명을 주지만 육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육을 이기기 위해 40일간 단식하고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유혹도 이겨내십니다.
육체의 욕망은 우리가 싸워야 할 세 가지 원수 중 하나로써 죄를 짓게 하는 뿌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의무는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들에게 영적 양식을 나누어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나게 만들면 그만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영적으로는 이미 충분한 양식을 주셨지만 육적으로는 배고파하는 이들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예수님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도 배부르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을 배불리 먹일 음식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책임 중 하나는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적으로 배고픈 이들도 배불려야 하는 것입니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있었던 한 식당 아주머니와 거지들과의 그 ‘소통’, 즉 아주머니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또 거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아주머니를 도왔습니다.
삼위일체께서 성령으로 소통하듯이, 소통은 각자의 희생을 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교도 하나의 소통인데 말로만 성당 나오라고 한다면 배고픈 이들은 오히려 그런 말에 짜증을 낼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도 동시에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 사제로써 이태석 신부님은 물질적으로도 가난했던 톤즈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적인 도움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성당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이라면 배고픈 사람들은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 안에서마저 나눔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배고픈 이들을 보며 마음 아파 했던 예수님을 따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물적으로 내가 누군가 도와줄 생각이 없으면서 말로만 성당 나오라고 권유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소통의 방법이 아닙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 주위 배고픈 이들을 보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 말 없이 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교회가 된다면 오늘 복음에서처럼 남는 빵이 넘쳐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로 성당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5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복음: 마르 8,1-10
라면 다섯 개에 파 송송, 계란 탁!
언젠가 각종 자재를 잔뜩 실은 대형 트럭이 저희 피정 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 울퉁불퉁, 꼬불꼬불한 시골길에, 심한 정체로 기사님과 도우미께서
엄청 고생한 분위기였습니다.
힘을 합쳐 짐을 내리고 나서 두 분 얼굴을 보니 빨리 내려오느라 끼니도 못 챙긴 분위기였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즉시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마르 8,3)
그래서 제가 정중히 두분에게 여쭈었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제가 초스피드로 라면을 끓여드릴 수 있는데,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두분은 반색을 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라면 다섯 개에 파 송송, 계란 탁! 거기다 김치와 밥과 과일과 차까지 내어드렸더니, 두분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철저하게도 하느님이셨지만, 동시에 철저하게도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처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배가 고프면 아무리 좋은 설교 말씀도 안 먹힌다는 것, 뭘 하든 일단 잘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우리 옛말이 있습니다. 배고픈 아이가 있으면 그가 어떤 잘못을 했다 할지라도 우선 먹이고 봐야 합니다.
먹이고 나서 법을 따지든 원칙을 따지든, 야단을 치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이 크게 아프면 만사 제쳐놓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됩니다.
아무리 원칙을 중시하는 단체라 할지라도 사람이 아프면 열 일 제쳐놓고 일단 치료를 받게 하고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예수님은 너무나 인간적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고통당하는 것을 절대로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 각자 모두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한 인본주의자셨습니다.
만물 위에 인간이란 존재를 두고, 그의 성장과 구원, 복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이었습니다.
굶주리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일, 아파하는 한 인간을 치료하는 일, 마귀 들려 죽을 고생을 다하고 있는 한 인간을 구해주는 일, 죽음으로 빠져들고 있는 한 인간을 구해주는 일, 그것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5주간 토요일 강론>
(2025. 2. 15. 토)(마르 8,1-10)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마르 8,1-10).”
1) 군중이 예수님 곁에 머무르고 있었던 사흘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과 군중이 모두 계속 굶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흘 동안에는 먹을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먹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저들을 돌려보내면, 저들은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이고, “집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저들을 먹인 다음에 보내야겠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따로 언급되어 있는 ‘먼 데서 온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 이야기 속에서는 특별히 중요한 뜻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먼 데서 온 사람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군중은 모두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 것이라는 상황.>
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집에 도착하지 못하고 길에서 쓰러지는 것을 걱정하시는데, 바로 그 걱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당신은 왜 걱정하시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 설교의 “걱정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을, “걱정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산상 설교의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의 끝부분에 바로 그 말씀이 있습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이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걱정하지 마라.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은 ‘주님의 힘’으로 하면 된다. ‘주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 맡겨 드려라.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라. 너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걱정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은, 또 예수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예수님께서 먼저 아시고, 사람들이 걱정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걱정하시고,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청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그것을 준비해서 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가엾다는 예수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분명히 ‘걱정’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걱정만’ 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빵의 기적’을 계획하고 계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요한 6,6).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신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3)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라는 제자들의 말은, 표현으로는 “이 광야에서 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인데, 제자들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5-44)을 기억하고서 한 말이라면, 이 말은 “주님의 기적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4)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기적의 빵’은, 집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일용할 양식’입니다.
‘집’을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힘’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부자로 만들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그 나라에 잘 도착하기 위한 ‘힘’ 말고는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사실 세속의 권력이나 부유함이나 명예 같은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되는 것들입니다.
만일에 세속의 권력이나 부나 명예 등을 얻기를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