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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가족애를 느끼며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추석이 여느때처럼 다가왔다.
역시 보통의 추석때처럼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가득한 집에서 거실에 모여앉아 안부를 묻거나 아이들의 공부 이야기들로 시끄럽던 거실에 새로운 화제거리가 떠올랐다.
"엄마, 엄마도 아빠랑 연애결혼 했어?"
"그럼. 엄마는 싫다고- 됐다고- 계속 무시했는데도 니아빠가 계속 따라붙어서 그냥 속는 셈치고 결혼했지, 뭐."
"무슨 소리야, 당신? 당신이 나 좋다고 맨날 쫓아 다니면서 이것저것 챙겨줄 땐 언제고?!??!"
"어머, 내가 언제? 웃긴다."
"지희야, 니 엄마 말 믿지 마라. 아빤 니 엄마 별로 안 좋아했어."
"뭐? 나도 별로 안 좋아했거든. 난 첫사랑 따로 있었어, 이거 왜이래?"
딸 내외가 열심히 말다툼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손녀, 지희가 다가와 나에게 물음을 던졌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첫사랑은 할머니였어?"
순간 조용해지는 거실. 쏠리는 시선들. 궁금하다는 눈빛들이 어느새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첫사랑은 네 할머니가 아니었단다."
"진짜? 그럼 누구였는데? 첫사랑 얘기 좀 들려줘요, 할아버지."
"그래, 그래. 지희가 듣고 싶다면야, 들려줘야지. 어디보자. 그러니까 그게...."
* * *
그건 아마 1944년 11월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난 10대의 청소년, 그러니까 학생이었지만 이미 애국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사격을 배운 나는 어리지만 꽤 상당한 사격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단체도 처음엔 너무 어려서 안된다고 가입을 거부하다가 내 사격술을 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는지 가입을 허락해 주었다.
혈기왕성한 청소년이었던 나는 그 당시에도 이미 몇 차례의 암살을 성공적으로 마친 유능한 조직원이었다.
그날도 난 또 한차례의 암살을 하기위해 목표물을 향해 접근 중이었다.
암살 대상은 미츠하라 사이토.
그는 일본의 정·재계에서 손 꼽히는 인사 중 한명이었다.
그의 곁에는 딸로 보이는 소녀가 함께 산책 중이었다. 목격자를 만들면 안되었지만 지금 놓치면 암살 기회를 다시 갖기란 하늘의 별따기 임을 알기에, 두명 모두 암살하기로 작전을 변경하였다.
사이토의 심장을 정확히 노리고 한발.
탕.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사이토가 쓰러졌다.
이제 남은 건 그의 딸로 추정되는 소녀 하나.
그 소녀는 약간 놀란 듯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
보통 옆에 있던 사람이 죽으면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소리를 지르거나 심한 경우 기절하지 않던가?
당황하여 잠시 행동을 멈춘 그 순간, 그 소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너무 놀라 울지 못하는 건지, 알수 없는 그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릿 속의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죽여야 하는데... 목격자를 만들면 안되는데....
자, 정신을 차리자.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총을 들어 그 소녀를 향해 겨누었다.
그러나 소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조용히 나에게로 다가왔다.
한발짝, 한발짝.
더 가까워 지기 전에 어서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게 어물쩡대던 사이, 어느새 그 소녀는 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정확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전 미츠하라 히노토라고 합니다. 그쪽은 이름이?"
"아, 전...."
너무 침착한 모습에 하마터면 이름을 말할 뻔했다.
얼굴이 드러난 것 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인데, 이름까지 밝힐 뻔 했다니....
말 끝을 흐린 날 쳐다보는 소녀를 무시하고 그 곳을 빠져나와 다른 조직원들과 모이기로 한 장소로 뛰어갔다.
모임 장소에 도착한 뒤, 나는 조직원들에게 암살은 성공했으나 얼굴이 드러났다고 보고했다.
조직원들이 모두 당황하여 웅성거리던 중, 수장이 도착했다.
수장은 차근히 모든 상황을 들은 후 나에게 한동안 근신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소녀의 모습이 어른거려 사라질 줄을 몰랐다.
히노토라....
일주일 간 몸을 사리며 최대한 동선을 줄여 돌아다녔다.
그리고 학교로도 찾아올 것 같아서 아프다고 하고 학교에도 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서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혹시 몰라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사람들 속에 파묻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인환 상?"
소리가 나는 곳으로 얼굴을 돌려보니, 일주일 전 마주쳤던 그 소녀가 서 있었다.
그나저나, 내이름은 또 어떻게 안걸까....?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얘기 좀 나누고 싶어요."
동그란 검은 눈동자에 마음을 뺏긴건지, 소녀의 말에 이미 발걸음을 돌려 그 소녀를 따라 걷고 있었다.
곧 도착한 한적한 공원.
한 쪽에 자리를 잡은 소녀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할지...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전 당신께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도대체 뭐가 감사하다는 걸까?
아버지를 죽인 사람인데....
"전 도대체 왜 감사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건... 실은 그 분은 저의 친아버지이긴 하지만, 전 일본사람이 아니에요. 저희 어머니는 한국인이십니다. 이 곳, 조선에서 기생으로 살았다고 들었어요. 제가 6살 때, 저의 어머니, 그러니까 양어머니와 친아버지께서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태어나자마자 조선인으로 키우겠다는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저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 친어머니와 절 만나지도 못하게 막으셨구요. 언젠가, 제가 외출을 했을 때였습니다. 저희는 조선땅에서 살고 있거든요. 절 알아본 친어머니께서 저에게 다가와 어머니가 하고 계시던 노리개를 하나 쥐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만, 저희 아버지께 들키고 말았죠. 아버지는 사람들을 시켜 어머니에게 엄청난 굴욕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전 그때, 어머니인 줄 몰랐던 상태여서 그저 착한 아주머니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일을 당하신 후에도 가끔씩 절 찾아와 맛있는 것을 주고 가셨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제가 양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 저의 친어머니를 만나던 날이었습니다. 이젠 모든 상황을 알게 된 저는 이제 그만 찾아오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아버지께 들키고 말았어요. 아버지는 결국 사람들을 시켜 저의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사랑해주지 않던 저를 유일하게 사랑해주시는 분을 제 눈 앞에서 죽이셨어요. 아마, 그 때부터 일겁니다, 아버지를 증오하게 된 게. 그 후에는 제가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하면 때리기 일쑤였구요.
아, 어느새 제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았네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 생각에 울상을 짓다가도 금세 환하게 웃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다시 어색한 침묵.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로 마음 먹었다.
"저,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신거죠?"
"아.....!!"
미안하다는 표정과 함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었다.
이름표였다.
"그 때, 급하게 가시면서 떨어트리셨더라구요. 죄송합니다. 이런건 함부로 가져가면 안되지만, 남아있으면 용의자로 지목될 것 같아, 주웠어요."
저걸 떨어트린줄은 생각도 못했다.
근신을 위해 아프다고 하고 학교에도 가지 않았으니까.
왠지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써준 그 소녀가 고마웠다.
용기를 내어 한가지 더 물어보기로 했다.
"한국어는 어떻게 배우셨어요?"
"아, 가끔씩 친어머니를 만날때마다 조금씩 배웠습니다. 그리고 친어머니임을 안 후에 더 열심히 배웠구요. 그래서 대화정도는 할 수 있어요. 쓰는 건 아직 좀 어렵지만, 계속 배우고 있답니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 가슴이 달달해졌다.
그 후로도 나와 소녀는 가끔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녀에게서 먼저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편지가 왔다.
소녀는 가끔 약속시간에 늦을 때도 있었고, 항상 올 때마다 무언가를 경계하는 것 같았지만 왜 그러는지 한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와 이야기를 나눌 땐 정말 행복했고,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 귀울여주고 진심으로 응해주는 소녀가 정말 예뻤다.
1월의 어느 날,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얼굴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
눈이었다.
"우와, 눈이 와요. 일본에서의 눈은 아직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한국의 눈보단 아름답지 않을 것 같아요."
눈을 받으며 환하게 웃는 그 소녀는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 속으로 사라질 것처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또 다른 암살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동안 해오던 것처럼 완벽하게 계획을 세운 뒤, 암살 장소로 향하였다.
그러나 그 장소엔 이미 일본 순사들이 가득했다.
내부에 변절자가 있는 듯 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몸을 돌려 그 자리를 피하던 도중 일본 순사들과 정면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총부터 처리하는 건데....!
"뭐하는 놈이냐?"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호오, 그래? 이 구역은 지금 암살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구역이다. 따라서 소지품 검사를 좀 해야겠다."
젠장......!!!
"저 자식, 잡아!!!"
절대 잡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갔다.
아직 일도 치르지 못했는데, 잡힐 순 없었다.
젖먹던 힘을 다해 달리는 내 뒤에서 한발의 총성이 들렸고, 허벅지에 타들어가는 아픔이 느껴졌다.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로 인해 다리에 힘이 풀려 절뚝대는 사이, 순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어이없게 잡혀간 나는, 조직원에 대해 밀고하면 풀어주겠다는 말을 무시하고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다.
처음엔 너무 아팠지만, 갈수록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아픔을 잘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정신을 잃으려 할 때쯤, 아쉽다는 듯이 날 고문하던 손을 멈추며 말을 해왔다.
"석방이란다. 운이 좋구나, 아주. 쳇!"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밖으로 나왔을 땐, 그 소녀가 있었다.
이런 못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톡, 톡.
소녀의 볼 위로 무언가가 떨어진다.
소녀가 울고 있다.
나 때문인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소녀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뭐가 좋아서 웃으세요? 얼머나 걱정한 줄 아십니까?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을까봐.... 저는..."
소녀는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눈물만 주룩주룩 흘려댔다.
집에서 몸을 추스린 후, 나는 다른 조직원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변절자를 찾았으며 처리하려 했으나, 일본의 보호를 받고 있어 암살이 힘들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름은 박동현이라고 써 있었다.
박동현이라면 한번 쯤 본 기억이 있다.
나보다 나이는 좀 더 많았고 총기 제작 기술은 뛰어나지만 겁이 많아 거사에 잘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래서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담력이 강한 사람들로만 뽑았어야 하는건데..!
그 후, 나는 소녀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소녀로부터의 편지는 오지 않았다.
그 날, 내 무기력한 모습에 실망하여 아제 날 더 보지 않을 생각인가보다, 하고 상심하고 있을 때쯤 소녀로부터의 편지가 도착했다.
꽤나 급하게 휘갈겨 쓴 편지를 보자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라고 제 편지를 기다리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최인환 상을 풀어주는 대가로 박동현 이라는 사람과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최인환 상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3월 5일,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그 날 10시에 경성역으로 나와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동봉된 노리개는 제 마음이에요. 절 잊지 말아 주세요. -히노토]
소녀의 편지에 동봉된 노리개를 들고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럼 더이상 만날 수 없다는 말 아닌가.
소녀에게 아직 제대로 된 고백 한 번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헤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너무나 아파 손에 들고있는 노리개를 꽉 쥐었다.
3월 5일, 10시에 맞춰 가려했지만 중간에 약간 일이 생겨 늦게 도착하고야 말았다.
숨을 고르며 주위를 돌아보니 역시 나처럼 주위를 돌아보고 있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에 달려가려 했던 그 때, 소녀의 곁으로 한 소년이 다가왔다.
박동현이었다.
조선을 배신하고 일본에게 민족을 판 개같은 자식이 소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순간 달려가려던 내 발은 멈추어 버렸고, 내 머릿 속엔 그 녀석을 향한 증오만 생겨났다.
그리고 소녀를 저런 녀석에게 보낼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이 초라해졌다.
처음부터 나와 소녀는 잘될리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렇게 어이없는 녀석에게 보내주리란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자식은 아직 가지 않으려는 소녀를 달래서 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소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였다.
손에는 소녀에게 작별선물로 주려했던 내 이름표를 꼭 쥔 채.
* * *
"우와, 할아버지, 할아버지 첫사랑 되게 슬프다."
"그러냐?"
"응! 할아버지랑 그 할머니랑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허허..."
그 소녀, 아니 이젠 소녀라고 하기엔 많이 늙었겠지만, 어쨌든 그 소녀도 알고 있을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의 베란다에서는 소녀와 처음 만났던 그 장소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을.
소녀가 준 노리개는 내 아내에게 결혼 예물로 주었다는 것을.
아내와 가끔씩 소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던 장소에 찾아갔었다는 것을.
요즘도 가끔 눈이 올 때면 환하게 웃던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것을.
일본에서 보는 눈은 어떤지 물어보고 싶다는 것을.
그리고 가끔 난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소녀는 기억 못할까봐 가슴 졸인다는 것을.
소녀는 알고 있을까...??
첫댓글 우와 꼭 경성스캔들 생각나서 완전 분위기잇고 재밋어요1!!!!!
ㅋㅋㅋ 허접한 글 봐주셔서 감사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