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여전사 박차정
1919년,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3.1운동은 빠르게 한반도 전역으로 퍼졌고
만세의 함성은 3월 11일,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에서 이어졌습니다.
부산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부산진일신여학교는 여교사와 여학생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독립군 여전사 박차정 의사 역시 일신여학교가 낳은 여성 독립 영웅의 한 명입니다.
박차정 의사는 학창 시절 항일의식이 담긴 소설을 쓰고, 일제의 교육정책에 저항한 동맹휴교에 앞장서는 등 준비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제2의 3.1운동으로 불리며 서울여학생만세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을 주도한 것은 통합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였는데, 박차정은 이 근우회의 핵심 간부로 배후에서 이 운동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체포됐고, 두 번의 구금과 잔인한 고문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그녀에겐 가혹한 운명이었습니다.
박차정은 민족과 여성해방을 함께 주장해 온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여성들이 구시대적 속박으로부터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선 민족의 독립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차정은 중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하고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합니다.
그리고 의열단장 김원봉과 혼인하며 ‘임철애’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이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했고, 난징조선부녀회 창립, 만국부녀대회 대표 참가, 임시정부 특사 등으로 활약했습니다.
박차정은 이론가인 동시에 행동하는 실천가였습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포착됐고, 이듬해 훗날 광복군으로 편입되는 조선의용대가 조직됩니다.
박차정은 22명의 여성 대원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선무활동뿐만 아니라
직접 총을 들고 전장으로 출격합니다.
하지만 일제의 총격을 받아 쓰러졌고 부상의 후유증을 넘지 못하고 1944년 5월 27일 눈을 감았습니다.
박차정은 유관순에 이어 두 번째로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여성 독립유공자입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박차정의 숭고한 희생과 지지 않는 독립 정신을 기억해 주세요.
링크 : https://youtu.be/a_JkRFy_HO0?si=3ygsqD4XTVv35D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