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숨겨놓은 신비의 섬, 전북 부안 위도 해안일주드라이브 #1
2024.11.24(일) 오전 7시 45분 비안도항을 출발하여 08:00 가력도항에도착한후 부안 격포항여객터미널로 이동한다.
부안은 예부터 산과 바다, 비옥한 토지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맛과 풍경, 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해서 '변산삼락'(邊山三樂)이라 불렸다.
'생거(生居) 부안'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생거 부안'은 조선 시대 암행어사 박문수가 "어염시초(물고기·소금·땔나무)가 풍부해 부모를 봉양하기 좋으니
'생거 부안'이로구나"라고 한 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사람 살기 좋은 곳이란 말이다.
위도로 가는 여객선은 격포항여객터미널에서 하루 6회 운항하며, 50분 정도 걸린다.
‘여객선 반값 운임 지원 사업’으로 부담 없이 위도에 다녀올 수 있다.
위도는 6개의 유인도와 2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 30여 곳의 섬을 하나로 뭉뚱그려 위도라 부른다.
2017년 전북 서해안권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부안의 적벽강, 채석강, 솔섬, 모항, 직소폭포와 함께 총 6곳이 여기에 포함된다.
위도는 부안에서 13km쯤 떨어진 노을이 내려앉는 쪽에 섬의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해서 고슴도치 위(蝟)자와 섬도(島)를 써서 위도(蝟島)라고 부른다.
위도는 면적 11.14㎢, 인구 1563명(1999)으로 해안선 길이는 36㎞이며, 최고점은 망월봉(望月峰:255m)이다.
그 밖에 도제봉(152m)·망금봉(242m)·파장봉(162m) 등 200m 내외의 경사가 급한 구릉성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섬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으며 변산반도(邊山半島)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해상에 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 풍경이 자랑이다. 세계적 희귀종 위도 상사화가 유명하다.
대부분의 상사화가 진붉은색이지만 위도 상사화는 하얀색 꽃잎이다.
고슴도치를 닮지 않은 고슴도치 섬
고슴도치 섬이라 부르는 이유는 지역 향토사학자들이 찾아낸 옛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간 후 쓴 『고려도경』. 거기에
서긍이 우리나라의 서남해안을 둘러보다가 위도에 들러 주민들로부터 식수를 공급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의 솔잎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하였다.
실제로 위도의 소나무는 독특하다. 지천으로 널려 있으면서도 서해의 거친 바닷바람 탓에 키가 2m를 채 넘지 않는다.
해풍에 시달리느라 허리를 곧게 펴고 있는 소나무도 없다.
일부러 그렇게 키워놓은 것도 아닌데 다들 이리저리 뒤틀리고 구부러지고 해서 멋진 분재처럼 생겼다.
나무가 이러할진대 솔잎이라고 다를까. 어른 새끼손가락 길이보다 작고 억센 것이 위도 소나무의 솔잎인 것이다.
때문에 이 솔잎이 고슴도치 털을 닮았다 해서 ‘고슴도치 섬’이라는 이름이 나붙은 것 아닐까 한다는 것.
그도 그렇지만 섬을 다니다 보면 풍수지리적 차원에서 고슴도치의 형상을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다.
망월봉(望月峰)이 고슴도치 머리고, 밥섬인 식도는 그 머리 앞에 놓여 있으며,
용머리는 고슴도치 앞발, 살막은 고슴도치의 꼬리, 위도 사람들 발음대로 ‘짚은금’으로 불리는 깊은금은 고슴도치 자궁 자리이다.
깊은금은 일 년 내내 샘물이 안 마르는, 물이 귀한 섬 지역에서는 특별한 곳이다.
고슴도치를 닮아 '고슴도치 위(蝟)'를 쓰는 위도는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 풍경, 수산자원이 풍부해
허균이 '홍길동전'을 통해 꿈꾸던 이상향 율도국의 모델로 그려졌다.
심청전에서 효녀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몸을 던진 인당수가
위도의 부속도서인 임수도 해역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섬은 고슴도치가 편안히 누운 모양새다.
만 동쪽 끝 딴시름에는 방파제가 구축되어 있고, 만 안쪽 정금도(井金島)와의 사이에는 방조제가 조성되어 간석지가 펼쳐져 있다.
근해는 연평도(延坪島)·신미도(身彌島) 근해와 더불어 서해안의 3대 조기 산란장으로 유명하며,
4∼5월 산란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어선이 모여 파시(波市)가 선다.
김·굴 양식이 성하며, 근해는 서해의 고기떼들이 집결하는 청정해역으로서 우럭·노래미·농어·감성돔 등의 낚시터로 이름이 높다.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었고, 1993년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이후 위도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어
2000년까지 관광순환도로, 위도해수욕장, 4개의 여객선터미널, 3개의 방파제, 4개의 선착장이 완공되었다.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빼어난 해안 풍경 등 천혜의 경관이 살아 있는 섬으로,
허균(許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었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
문화재로는 위도관아(지방유형문화재 101)가 있으며, 민속놀이에는 마을의 태평과 풍어(豊魚)를 비는 위도띠뱃놀이(중요무형문화재 82)가 있다.
08:20~09:35 격포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하여 위도 파장금항으로 가는 여객선 승선권을 구입 후 파장금카페리호에 승선하여 출발 대기 [위도 편도 승선요금 4,750, 승합차 34,000원]
위도는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14㎞가량 떨어져 배로 50분이면 도착한다.
위도는 변산반도의 서쪽 해상으로부터 약 14㎞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식도, 정금도, 상왕등도, 하왕등도 등 6개의 유인도와 2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어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안 격포항에서 위도의 파장금항까지 카페리호를 타고 들어간다.
09:35~10:30 여객선을 타고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항을 출발하여 전북 부안군 위도면 진리에 있는 위도 파장금항으로 이동 (16.1km) [55분 소요]
채석강과 닭이봉 전망대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닭이봉길 62 번지에 있는 닭이봉(해발 85.7m) 전망대는 변산반도의 서쪽 해안에 있는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의 닭이봉(해발 86m) 정상에 세운 전망대이다.
닭이봉은 변산반도 외변산의 격포항과 격포 해수욕장 사이의 채석강(採石江)을 우산처럼 받치고 있는 산의 정상으로
위도(蝟島)와 격포 일대 주변 관광지, 서해 낙조 등의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3층 건물로 세워진 팔각정 형태의 전망대이다.
1층에는 카페가 있고, 2층에는 갤러리, 3층은 전망대 데크로 구성되어 있다.
닭이봉 전망대가 세워진 닭이봉은 변산반도 국립 공원에 포함된 곳으로, 외변산의 명소인 채석강을 끼고 있다.
변산 마실길 중 볼거리가 가장 많은 3코스 중간에 위치하여 적벽강(赤壁江), 수성당(水城堂), 용암굴, 격포 해수욕장, 채석강, 격포항, 해넘이 공원에서도 올려 보이는 곳이다.
산 아래에서 전망대까지는 600m의 거리이고 걸어서 오르면 20분 정도 소요된다.
산의 남사면에는 침식 작용에 의한 해식(海蝕) 동굴이, 서사면에는 단애(斷崖)와 파식대(波蝕臺)가 형성되어 있는데,
중국의 시인 이백(李白)이 노닐던 곳에 비유하여 ‘채석강’이라고 한다.
채석강은 변산의 주요 명승지로서 최근에는 전북 서해안권 국가 지질 공원으로 지정 받았다.
닭이봉의 북쪽으로는 격포 해수욕장, 적벽강, 수성당 등이 가까이 보이고, 하섬, 선유도, 새만금 방조제 등이 멀리 보인다.
남쪽으로는 격포항이 있고, 조금 떨어져서 변산반도 국립 공원에 포함된 봉수봉(봉수대, 175m)이 마주 보인다.
서쪽으로는 위도의 섬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어선과 여객선이 붐비는 격포항은 원래 조용한 어촌이었으며, 해안에 사구(砂丘)가 발달하여 해수욕장으로도 이용된 곳이다. ‘
닭이봉’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닭이봉 아래 격포 마을이 지네 형국을 하고 있어 재앙이 끊이지 않자,
지네와 닭이 상극이라는 점을 생각해 사투봉에 족제비 형상을 세우고 닭이 봉 쪽을 바라보게 했더니 재앙이 사라졌고, 이후로 ‘닭이봉’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격포와 파장금항을 잇는 뱃길은 비운의 해상로다.
1993년 10월 10일. 위도 벌금항을 출발해 인근 식도를 경유해 승객 362명을 태우고
오전 9시 40분 파장금항을 출발한 배가 위도 3㎞ 지점 해상에서 오전 10시 10분쯤 침몰했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승객 262명이 사망했다.
주말을 맞아 낚시꾼들과 관광객들이 많았고 추석을 쇠고 뒤늦게 일터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배의 정원은 221명, 초과인원이 141명이나 되었다.
10:30 파장금항에 도착한다.
어선이 몰려와 돈이 된다는 뜻이름만큼 파장금항은 대규모 조기 파시로 이름이 높던 곳이다.
1970년대 초까지도 각지에서 몰려온 수백 척의 배들이 위도를 둘러싸다시피 하며 조기를 잡아 파장금에 들어와 파시를 이뤘던 곳이다.
파장금항에 대기중인 위도 공용버스
당시 파장금항은 섬 속의 거대 도시였다고 한다.
30여 곳이 넘는 술집이 오밀조밀 늘어서 있고, 뱃사람들에게 술을 파는 여성이 무려 6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파장금항 마을 뒤쪽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서면, 그 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농짓거리를 던지는 뱃사람이나 흥정을 하는 장사꾼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당시의 북적임이나 흥청거림도 없다.
다만 골목골목 즐비해 있는 술집이며 여인숙, 술 파는 여성들이 사용하던 공동 목욕탕과
몇 개의 우물이 한때의 영화를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듯 무너지고, 피폐해지고, 파손된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다.
조기가 더는 나오지 않게 되면서 1970년대 말 다시 키조개 잡이로 사기를 드높였던 파장금.
1980~1990년대에 들어서는 낚시꾼들의 천국으로 불리며 또 한 번 돈줄을 놓치지 않았던, 그야말로 생금 터였다.
이후 1999년 27km의 섬 일주도로가 뚫린 뒤로 사철 관광지로 거듭나 빼어난 경관과 서해의 황홀한 해넘이 낙조 장관을 자랑하고 있다.
파장금항의 고슴도치 모양의 조형물
10:35 위도 파장금항을 출발하여 서해훼리호 참사 위령탑, 벌금리를 지나
전북 부안군 위도면 위도로 366 번지에 있는 위도 해수욕장으로 이동 (4.0km) 이동한다.
서해 훼리호 사고는 1993년 10월 10일에 일어났다.
221명의 정원인 작은 철선에 위도에서 격포항으로 가고자 하는 362명의 승객이 승선하였으며
기상이 나빠 항해를 할 수 없다는 승무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기상예보는 규정상 운행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결국 서해 훼리호는 출항 후 30분만에 돌풍을 만나 회항을 시도하다가 위도와 격포항의 중간에 있는 섬인 임수도 근해에서 전복되고 말았다.
배가 흔들리면서 선장은 안전한 선실에 머물러 달라는 방송을 하여 피해가 커졌다는 주장도 당시에 제기되었다.
구명정 9척 중 작동 가능한 것은 2개에 불과하였으며 침몰 후 승객들은 구명정과 부유물에 의지하여 구조를 기다렸다.
이들을 먼저 구조하기 시작한 것은 주위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이었다.
해경과 해군이 구조를 시작한 것은 사고가 일어난 1시간 뒤부터였다.
이 사고로 362명의 탑승자 중 292명이 희생되었다. 서해 훼리호 참사는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에도 정원을 초과한 탑승, 악천후에도 시도한 무리한 운항, 정부의 재정 지원 부족으로 인한 열악한 운항 여건,
연료 절감을 위한 위험한 항로 선택 등이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벌금리와 위도해수욕장 사이에는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이 있다.>
그 끝부분에 용멀 또는 용머리라고 부르는 곳의 해식단애 바위 경치도 채석강 저리 가라 할 만큼 빼어나다.
이 용머리 해안 들머리가 벌금항 옛 여객선터미널 옆인데, 이곳 사람들은 ‘갯것 다니던 길’이라고 표현한다.
10:50 위도해수요장 전경
진리마을에서 한 굽이를 돌면 위도면 소재지 서쪽으로 위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위도해수욕장이다.
양쪽으로 낮은 산등성이가 길쭉하게 뻗어 깊숙한 만이 형성돼 있고 그 안쪽에 제법 넓은 모래사장이 형성돼 있다.
활처럼 휜 해변이 1km나 이어진다. 수심이 얕고 파도가 잔잔하고 부드러운 모래밭이 펼쳐져 해수욕하기에 제격이다.
해안을 감싸는 산세가 부드럽고, 툭 터진 바다 저편에는 왕등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위도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위도에서만 볼 수 있다는 흰색 상사화가 서식하는 해수욕장 옆 공원은 위도상사화 군락지다.
육지에서 자라는 상사화와 다른 위도에만 자생하는 종으로 40~60㎝ 곧추선 꽃대에서 상아빛 화사한 꽃이 피어난다.
상사화는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붙여진 애틋한 이름이다.
위도상사화도 이른 봄에 싹을 틔운 잎이 모두 진 후 8월 말경 꽃을 피운다.
반그늘의 산기슭과 바닷가 언덕에 무리 지어 자란다.
위도 대월습곡(大月褶曲)은 위도해수욕장에서 약 1km 숲길을 걸어가야 볼 수 있지만
왕복 2시간이 소요되어 오늘의 일정중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