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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7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동래분원 나눔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 8,11-13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그렇지만 자주 접하게 되면 둔감해지기 마련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맞은 것만 요구하고 이미 보여 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당신의 권능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이 지니셨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마르코 8,11-13
선거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 바리사이의 선택, 신앙인의 선택!
저도 모르게 또 월요일 묵상을 했네요.
월요일 묵상은 다음 주부턴 꼭 쉴게요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그 세대를 두고 탄식하십니다.
왜 하느님을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 이유는 이미 표징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버지이시고 창조자이심을 보여주는데 이것만큼 큰 표징은 없습니다.
만약 아이가 “아빠, 우리 아빠 맞아? 맞으면 한 번 날아봐!”라고 한다면 황당할 것입니다.
이 말은 아빠가 아빠이기를 믿기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를 시험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아빠는 필요없고 슈퍼맨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자신 안에 이 세상에서 아빠의 덕을 보며
능력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로보트 기요사키’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 유명한 사업가입니다.
그는 물론 가난한 아빠도 사랑하겠지만 그보다는 부자 친구의 아빠가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어렸을 때부터 돈 버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키워준 아빠보다 부자 아빠를 따른 것을 더 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마음 안에는 아빠의 따듯한 애정도 좋지만, 이 세상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자신을 키워준 아빠도 사랑하겠지만, 책 내용만 보면 그는 아빠를 ‘능력’으로 평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그를 키워준 가난한 공무원이었던 아빠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도 하느님에게 능력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편의 승진을 위해, 아이의 성공을 위해, 집값의 상승을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가 성취되면 하느님을 믿겠다고 한다면 하느님은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버지’가 되시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챙겨줄 ‘슈퍼맨’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이 없는 것을 볼 때는 가차 없이 버립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능력 있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하며 자신들이 부려먹을 힘 있는 황소와 같은 하느님을 바라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살과 피가 섞인 ‘양식’만큼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을 표징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대인지 아닌지는 ‘선거’ 때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 어필합니다.
이는 벌써 아버지와 같은 후보가 아닌 슈퍼맨과 같은 능력자를 원하고 있기에 우리 자체가 바리사이처럼 돈을 좋아하는 나라가 되었음을 드러나게 합니다.
지도자의 자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바로 ‘비전 – 통솔력 – 청렴함’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전입니다.
지도자는 마치 배의 선장과 같은데 길을 볼 줄 모르면 큰 사고가 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단력 없는 선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세월호 사고 때 깊이 체험했습니다.
비전 없는 지도자를 따라가는 것은 지옥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7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8,11-13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의 원하는 것은 보다 스케일이 큰 표징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늘 그런 것 같습니다.
더 크고, 더 대단하고, 더 엄청난...예를 들면 이런 기적들이겠지요.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모세는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 힘겨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매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이지 기이하고 신기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야는 나라 전체에 3년간의 가뭄이 들게 한 뒤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 대대적이고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도 만나의 기적이라든지 3년 가뭄 사건 같은 눈에 확 띄는 기적, 좀 더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제대로 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치유와 구마 활동, 죽은 이들에 대한 소생사건,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뜨거운 사랑, 한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통해 그분의 신성,
그분의 메시아성은 충분히,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또다시 ‘이거다’하는 표징, 제대로 된 확실한 표징을 또 요구하는 것일까요?
바리사이들은 애초부터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 열정적이고 호의적인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서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전개해나가시는 인류구원사업을
흥미 어린 눈으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예수님을 떠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한심한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정말 크게 실망하십니다.
깊이 탄식하십니다.
여기서 보여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가련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탄식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셨던지 아주 슬픈 어조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오늘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사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통해 크신 하느님 자비와 우리 인간의 비참이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남부러울 것 없는 삶, 탄탄대로가 잘 보장된 삶을 뒤로 하고 세상 사람들 눈에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 봉헌 생활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의 삶,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월요일 강론>
(2025. 2. 17. 월)(마르 8,11-13)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 8,11-13).”
1)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 표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또는 안 믿었기 때문에 요구했음을 나타냅니다(루카 11,16).
<진짜 메시아가 아니니까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작정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더라도 그것을 기적으로(표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 요한복음 9장에 그런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그들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요한 9,16-19)”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정말로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아도 믿으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또는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보는데, 그렇게 설명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되면, ‘미스터리’ 라고 그냥 덮어버리고, 기적이라는 것을 끝끝내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이 탄식하신 것은, 바리사이들의 고집과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믿기를 거부하고, 자꾸만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가기만 하는 고집과 어리석음을......
3)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라는 말씀은, “이들은 왜 믿기를 거부하는가?” 라는 뜻입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을 믿게 만들기 위한 기적은 일으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끝까지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 16장을 보면,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4).”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나의 부활 외에는 너희에게 보여 줄 표징이 없다.”, 또는 “내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을 보게 되면, 너희가 나를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했을 때, 그 증언을 믿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사도 2,41).
<부활 자체를 안 믿은 사람들도 많았고......(사도 4,2).>
4) ‘표징’은 원래, 안 믿는 사람을 믿게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확증해 주는 일입니다.
<표징보다 믿음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 표징과 믿음이 동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신 ‘표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안 믿고 있다가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표징’을 보고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것이 옳은 일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르코복음의 끝부분에, ‘표징’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말이 나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19-20).”
5)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었던 사람이 어떤 놀라운 체험을 한 뒤에 믿게 되는 경우가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표징이 먼저 있었고 믿음이 나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 같기는 한데, 사실은 그런 사람은,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믿고 싶어 했고,
믿으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