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접경이 있다. 그 접경에서 모르는 것이 아는 것으로 바뀐다. 무엇이 아는 것인가? 이미 일어난 것이다. 당신이 “알았다”고 말할 때마다 그것은 이미 과거로 되었다. 아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무엇이 모르는 것인가? 지금에 이어지는 순간들 안에 잠재된 모든 가능성의 마당이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한계가 없고 그리고 자유롭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모르는 것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이 모르는 것이다. 실제로 당신은 언제나 모르는 것 속에서 살고 숨쉬고 일한다. 그러면서 안다고 착각한다. 그 착각에 집착하여 실재와의 연결 고리를 잃고, 죽음을 포함하여 일시적이고 참되지 않은 가짜 현실을 겁내기 시작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정작 아는 것을 겁내야 할 처지에 모르는 것을 겁내며 살아간다. 아는 것 속에서 사는 것은 과거라는 감옥에서, 그러니까 제 상상 속에서 사는 것이다. 아는 것은 하나의 환각(illusion)이다. 진정한 실재는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참으로 있는 것 안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가? 모르는 것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과거에서 자유롭다. 모르는 것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모든 제한에서 자유롭다. 매순간 신선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 의식은 끝없이 유연하고 어디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이것이 ‘존재’의 본성이다. 고정된 생각은 유연하지 않다. 그것은 관념, 개념, 신념에 대한 우리의 집착으로 묶여 있다. 어디에도 묶이지 않음을 경험하는 것이 자유이다. 참으로 자유로울 때 당신의 모든 상황에서 무한히 유연할 수 있다. 이 유연함이 당신에게 어떤 경험으로도 어지럽힐 수 없는 내적 고요와 안정을 준다.
자유는 수용을 의미한다. 오는 것을 오게 하고 가는 것을 가게 한다. 아는 것을 사라지게 놔두고, 삶의 순간마다 거대한 모름 속으로 기꺼이 마음 놓고 들어가게 하는 것이 자유이다. 오는 것이 죽음이라 해도,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죽음을 겁내지 말고, 그냥 모든 순간에 대하여 죽어라. 지금 막 일어나는 것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서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죽어라. 이럴 수만 있다면 당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상상 속 두려움이 당신의 현재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라.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 당신의 현재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라. 늘 신선하라. 막 태어난 갓난아이는 신선한 눈으로 저 자신을 보고 있는 우주이다. 우주를 신선한 눈으로 볼 때 당신은 아는 것에 대하여 죽는다. 지난날에 대한 기억의 강에서 나와 이 순간 처음 보듯이 세상을 볼 수 있을 때, 그때 당신은 바야흐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
이 순간은 우주가 저를 재창조하는 역동의 순간이다. 이 순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아는 것으로 바뀌어가는 모르는 것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무한 가능성을 신선하게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화고 진화하는 ‘존재’이다. 당신이 사는 순간순간이 온갖 가능성으로 흘러넘치는 순간들이다.
일단 당신을 묶고 있던 족쇄가 풀리면, 살면서 겪는 모든 사건에 당신을 온전히 던져 넣을 수 있다. 이 자유 상태에서 당신은 기억되는 과거의 전횡이나 예상되는 미래의 두려움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다.
시인 루미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영원을 맛본다.” 현재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라. 이 순간을 영원의 순간으로 맛보라. 참 자유를 살게 될 것이다.
출처 : "우주 리듬을 타라", 디팩 초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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